〈 107화 〉 압도(3)
* * *
세상의 색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다시금 밀려들어 오는 바닷물. 그 거대한 질량을 아르벨라는 고작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멈춰 세웠다. 쓰러져 기절한 유천을 소금물로 적시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것 참...곤란하네.”
본래의 토이박스라면 결계 안에서 일어난 현상은 거짓으로 돌아가 유천과 아르벨라는 처음 있던 석모도 수련장에 있어야 하지만, 흥분한 아르벨라의 힘에 부서진 결계는 그 역할을 고작 반 정도밖에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바다의 흐름에 요동쳐 놨으니 되돌아온 섬들은 그렇다 쳐도 내륙 또한 갑자기 징조 없이 들이닥친 해일에 난리가 났겠지.
‘돌아가자. 음 돈은 아직 남았으니, 숙소라도 잡아서 유천님이 정신을 차리실 때까지 기다리면...’
두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진동소리. 점차 늘려나가는 세기에 그 진원지를 파악한 아르벨라의 발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건...”
잠든 듯 쓰러져있던 유천의 발이 몸 안쪽으로 당겨지고는 상체가 서서히 세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목각인형을 조종하는 것 같은 기괴한 움직임.
으득...끄드득...
손가락 마디 하나조차 익숙하지 못해 온몸을 각기 방향으로 비틀어대는 모습. 일반적인 사람이 봤으면 악몽을 꿀 기괴하고 기분 나쁜 움직임이었지만, 저것이 어떨 때 나오는 현상인지 알고 있던 아르벨라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너...시발 누구야...?”
전형적인 악령이 빙의해 본래의 영혼과 동기화를 진행할 때 나타나는 현상. 온갖 이물과 싸워온 아르벨라에게 피와 살점과 그리고 원혼이 흐르는 전쟁터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은 괴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납득할 수 없었다. 이곳은 전쟁터도 아니었고, 유천의 영혼이 죽음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르벨라의 첫 번째 별이 악의적인 심상을 담고 유천을 향했다면 모를까. 그녀가 그를 그렇게 했을 리는 없었다.
그럼 답은 하나.
유천의 온몸에 황금빛 실선을 뿌리처럼 내리고.
동기화를 마치고 눈을 뜬 채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저것이.
본래 그의 안에서 잠들어 있던 무언가라는 것밖에는 없다. 그분은 저것의 존재를 알고 있으셨을까?
“유천님은 너 같은 게 있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는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 재밌네. 이런 대우도 오랜만이야.”
“......”
벽처럼 세워진 바닷물을 만져보고 혀로 핥기까지 하는 모습은 마치 세상 밖을 처음 나와 본 아이 같은 순수함까지 느껴졌지만, 그녀에게는 저딴 알 수 없는 것이 유천의 몸을 차지한 것에 분노만을 느낄 뿐이었다.
유천의 몸이라도 그걸 움직이는 상대가 유천이 아니니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겠지.
아르벨라는 멍하니 주변을 살피는 그것을 향해 손을 튕겼다.
파앙!
공간을 격하고 들어온 충격에 뺨이 돌아간 그것은 그제야 천천히 아르벨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고서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은 후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은 아르벨라가 기가 막힌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새끼 봐라? 나를 간봐?”
짐승이 상대가 자신의 경쟁자인지, 아니면 잡아먹을 피식자인지를 알아보는 노골적인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유천 본인이라면 상관없다. 이미 애교와 내숭도 다 부렸는데, 오히려 그런 관심조차 그녀에게는 기쁘게 다가왔으니까. 하지만 그걸 허락한 대상은 오로지 유천이지, 그의 몸을 뒤집어쓴 저 정체 모를 귀신새끼는 아니란 말이다.
“하아...내가 한 번만 참아야지. 오늘은 의미 있는 날이니까.”
“.........”
“야 너 뭐하는 새낀지는 모르겠는데, 거기서 나와, 뒈지기 싫으면.”
“.........”
“지금이라도 네 스스로 나온다면 그냥 보내줄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그런데 결국 내가 손을 써야 할 일이 생긴다?”
“.........”
“내 손으로 직접 적출해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명계로 돌려보내 드리지.”
카드드드득...!!
일정 선을 넘어선 심상은 세상을 개변한다.
암석과 산호초, 바다 이끼로 뒤덮여 있던 땅이 검게 물들고 그 땅에서 치솟은 검은 촉수가 유천의 몸을 휘감아 짓이겨 누르고는 몸 안으로 파고든다.
“......!!!!!”
“패천(??). 어렸을 적 내 육체를 갉아 먹은 저주받은 이름이자, 오로지 빼앗고, 부수고, 지배하겠다는 심상만을 지닌 내 첫 번째 별의 이름이다.”
일곱별의 저주 중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폭압이 이제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유천의 몸을 차지한 무언가를 갉아먹기 위해 몸을 넘어 영혼까지 스며든다.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됐어. 취소하지. 그냥 내가 직접 유천님에게서 너를 빼내어 찢어놔야겠다. 그래야 이 기분이 풀리겠어.”
몸에 뿌리처럼 돋아난 황금빛 실선과 붙잡혀 억눌려 있으면서도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빛이 신경 쓰였지만, 그건 놈을 끄집어낸 다음에 생각해봐도 될 일이다.
그렇게 아르벨라가 주저앉혀진 채 억눌린 유천의 머리에 손을 올려 혼의 심층에 박혀 있을 악령을 직접 꺼내려는 찰나.
화르르륵...
유천의 내부에서 치솟은 황금빛 불길이 패천의 힘을 불살라버리기 시작했다.
“뭐...?”
영혼 깊숙한 곳부터 타올라 서서히 실체를 가지기 시작하는 황금빛 불길. 저것에 닿아서는 안 된다는 본능에 따라 재빨리 손을 떼고, 심상을 끊었다.
“쿨럭...!”
그러나 끊어냈음에도, 옮겨붙은 황금빛 불길이 별을 훼손하자, 그 반동을 온전히 받아낸 아르벨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를 토했다.
으득...으드득...
무감정한 표정으로 잔류한 패천의 마력을 끊어내며 일어나는 ‘그것’을 보며 아르벨라는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권...능...?”
추상과 현계의 벽을 넘어 오롯이 하나로서 실존하는 힘. 창조주에 가장 맞닿아 있다는, 하나의 의지에서 비롯한 개념의 극한. 회귀 후에야 딱 한 번 마주한 그 힘에 아르벨라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걸 가지고 계셨다면 말이라도 해주시지...”
알았다면 이런 손해를 보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굳이 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벨라는 잠들어 있는 유천을 향해 약간의 불만을 담은 한숨을 토해냈다.
화르르륵...!!
그 사이 외부로 황금빛 실선을 타고 내려온 황금의 줄기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나선을 그리며 하늘로 치솟아 사방으로 다리를 뻗는다.
구구구구구구궁...
거기에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황금빛 성목. 저것이 권능의 의지가 구상한 제 모습이겠지.
자신을 해하고자 하는 모든 요소를 불태우겠다는 강압적 의지가 열기로 화하여, 바다를 증발시키고, 빛마저 명멸한다.
그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며 버티고 선 아르벨라가 뜨거운 숨을 내뿜었다.
“난리 났네...”
실시간으로 대기가 타오르고, 바다의 흐름이 뒤틀린다. 결정적으로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일로 이 행성은 한 차례 홍역을 치르겠지.
예상치 못한 권능의 등장으로 일이 복잡해졌지만, 아르벨라는 냉철한 눈으로 해결책을 강구했다.
“...어쩔 수 없나?”
떠오른 방법은 단 하나. 그나마 온건한 해결법이지만, 동시에 이후에 받을 수많은 문책과 희생을 각오해야 할 방법이기도 했다.
‘유라가 지랄하겠어...’
아니 그것보다 이제야 만난 유천과 이렇게 빨리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더욱 서글프기만 했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아르벨라는 도도히 흐르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권능을 상대로 힘 싸움을 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하지만 아르벨라는 그것에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마력을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힘 대 힘의 싸움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내 특기는 아니야.”
그녀가 익히고 확립한 무(?)는 하늘에 닿은 경지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본능과 이성의 완전한 조율 속에서 과정을 넘어 승리라는 결과를 갈구하는 광기야말로 그녀의 본질이자 무신이라는 이명의 이유였다.
마력이 엮이고 엮여, 그녀의 손에서 하나의 륜(?)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 대한 공격 행위라는 걸 인지한 권능의 의지가 손을 휘둘렀다.
쿠구구구궁!!!
하늘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나뭇가지 그리고 탑같이 거대한 뿌리들이 땅을 붉게 녹이며 아르벨라를 향해 쇄도한다.
아르벨라라도 닿으면 치명적인 압축된 권능의 불.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일말의 미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섯 신수나 일곱 괴수처럼 완전한 권능이면 모를까. 너 같이 어린 녀석은 빈틈이 있기 마련이지.”
절대적인 존재로 태어난 자의 사고방식은 단순하다. 결국 녀석이 경계하는 건 지금도 미친 듯이 마력을 불려 가며 손에서 회전 가속을 반복하는 륜.
아르벨라는 수십 개의 가호로 뒤덮어 억지로 압축시켜놨던 마력의 륜을 풀어헤쳤다.
파앙!!!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무수한 마력의 선에 목적지를 잃은 권능의 불들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움찔 멈춰 서고 결집이 흔들린다.
유도미사일을 막기 위한 플레어와 같은 원리. 권능의 의지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이리저리 고개를 정신없이 돌리는 모습에서 당황이 물씬 흘러나온다.
그리 길지 않을 빈틈의 순간.
한발을 내디뎠다.
녀석과 아르벨라 사이의 공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든다.
축지(??).
전설로 여겨지는 주술인 분신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최상위 주술이었지만, 모든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처럼, 그것을 아르벨라는 오로지 스스로의 무위만으로 공간에 대한 이해력으로 이루어냈다.
갑자기 눈앞에 난데없이 눈앞에 모습을 보이자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뜬 녀석의 얼굴을 덥석 붙잡았다.
화르르륵...!!
아르벨라는 몸을 휘감은 가호들과 마력들이 실시간으로 불타오르는 걸 느끼며 힘겹게 입을 뗐다.
“백선 영감 보고 있겠지?”
아무리 이곳이 드넓은 중앙세계에서 그의 눈이 차마 닿지 않는 외곽차원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변화를 그 신선이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실제로 권능이 나타나고 얼마 안 있어 하늘 건너에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거기에 온갖 기괴한 힘을 다루는 주술사, 그 정점의 인물이라면 권능을 막을 방도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좀 도와줘. 나나 눈앞의 이 녀석이나 아드릭센과 당신의 계획에 필요할 텐데?”
유천과 자신의 관계를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지만 녀석이라니.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그런 사소한 것에 배덕과 죄책을 느끼는 것에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깨닫자 새삼 실소가 흘러나왔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가 뭔가 놈들을 잡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어? 이대로 변수를 늘릴 거야?”
[...책임을 져야 할 거다. 이 망나니 같은 것아.]
소리가 아닌 정신을 관통하는 목소리. 몇 개의 차원 건너에서부터 보내는 심어는 그가 공간과 차원의 제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주술사임을 의미했지만, 아르벨라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알았으니까! 도우라고 좀 나 힘들어!”
화르르륵...!!
초월적인 무위와 마력제어로 불을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 추위와 더위를 겪지 않는 아르벨라의 이마에서 땀이 주룩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가는 아르스벨그에서 받도록 하지. 질문에 제대로 답해야 할 것이다.]
삐걱. 아르벨라의 옆 공간에 선이 그어지면서 양옆으로 열리고, 그곳에서 반투명한 재질의 고급스러운 새하얀 천이 흐물거리며 흘러나왔다.
이대로 불에 타버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숭고함에 정체를 깨닫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음흉한 영감탱이. 설마 아티팩트를 들고 있었다고?”
그것도 완전히 가공된 아티팩트. 아티팩트를 거두고 봉인하는데 맹목적인 위원회. 그리고 그 정점 중 하나가 개인적으로 그것을 소지하고 있었을 줄이야.
“뭐 됐어. 지금은 도움이 되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시선도 느껴지지 않으니 이제부터 알아서 하라는 것일 터.
손을 뻗자 천이 팔을 휘감아온다. 불의 권능 사이에서도 차갑게 느껴질 정도의 한기(??), 그리고 그 안에서 수호의 결의가 흘러나왔다.
전생에서도 본 적 없는 성질의 아티팩트. 아마 그때도 백선이 들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물건을 빌려줬다는 건 그도 이곳의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겠지.
천에 둘러싸인 손을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한 유천의 머리에 올려놨다. 손에서 흘러내려 온 천이 유천의 머리부터 서서히 내려가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쩌저적...
발 아래 찐득한 용암으로 화했던 암석지대가 급속 냉각되어 가뭄이 난 것처럼 갈라지면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과연 아티팩트라고 할 만한 이적이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래 너도 이제 알겠지? 내가 너한테 적의가 없다는 걸.”
여전히 가만히 눈만 꿈뻑이고 있는 권능의 의지. 생각이 단순할 뿐이지 녀석은 결코 멍청하지 않다.
처음에야 공격을 당했으니 반응을 했지만, 아르벨라의 애매한 태도에 그녀가 유천을 해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었다면 얼굴을 잡힌 채 아티팩트에 묶여 불만 뿜어대고 있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너를 적대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 슬슬 돌아가 줬으면 하는데”
그 말에 권능의 의지는 정말 자신의 주인에게 위험이 없는지 확인하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무언가를 확신한 것처럼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쿠르르르릉...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나무가 희미해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