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압도(2)
* * *
“어떻게 한 거지...?”
“음...”
“아니...이게 아니야. 그렇지?”
이 질문이 아니다. 유천은 아르벨라의 걱정스러운 얼굴 사이로 스친 난처함에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의문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재빨리 인지했다.
‘멍청하긴...’
수년 동안 수천 수억을 쓴 게임 고인물에게 뉴비가 와서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라고 물으면 그저 떨떠름하게 ‘현질하세요.’ 라고 밖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아르벨라가 행한, 유천이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던 기예를, 아르벨라의 역사나 다름없는 그것을 어찌 말로 표현한다는 말인가?
뉴비인 유천은 고인물인 아르벨라에게 해야 할 옳은 질문을 떠올린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가?
아까의 질문과 그 의도는 같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정답이에요. 유천님.”
아르벨라의 얼굴에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난처함과 옅은 질책의 기색은 사라지고 뿌듯함의 미소만이 남았다.
“보니까. 너는 다 알고 있었나 보네.”
“...특별한 건 아니에요. 본래 대부분의 사람은 일어난 현상에만 집착하기 마련이니까요. 그 사이의 역사와 과정을 엿보려고 하는 자는 별로 없죠.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은 이유는...”
“나를 위해서인가...?”
“그런 미묘한 관점과 눈높이의 변화는 누군가 말로 설명해 줄 수 없는, 본인이 깨달아야 하는 종류의 것이에요.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를 철저한 자신들만의 교육으로 교정한 것들이 명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고요.”
아르벨라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란 건 아니지만, 철저한 커리큘럼에 따른 교육을 받고 자란 명문가의 무인들을 많이 만나봤다.
그녀는 한 개인보다 세력을 중점으로 한 안전지향주의인 그들의 방식이 무작정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무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마음가짐은 배울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본래는 그런 섬세한 것까지 가르치지 않았겠지만, 상대가 유천인 만큼 아르벨라는 철저히 무엇하나 부족하지 않게 가르칠 생각이었다.
‘뭐부터 필요할까...’
아르벨라는 유천을 마주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걸음걸이, 호흡, 무게중심의 이동, 사소한 습관까지 전부 파악했다. 중앙세계의 무신인 그녀에게 그건 숨 쉬듯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 그것부터...’
“유천님. 그럼 제가 하나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얼마든지 말해줘.”
“잔인한 말이겠지만...유천님에게 무공은 어울리지 않아요.”
“...벌써부터 센 이야기가 나오네...”
“죄송합니다...하지만 착각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재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차고 넘치는 게 문제니까요.”
유천이 지닌 고뇌를 그와 같은 격에 도달해 있는 아르벨라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 강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힘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조율하고 싶겠지. 냉정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쓸모없는 고민으로 보였다.
“유천님이 제게 그렇게 허망하게 당한 이유는 그 무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쌓은 지혜의 정점인 무를 그것도 아르벨라 네가 부정하는 건 모순적이지 않아...?”
자신의 고민을 무가치하다고 평가하는 말에 유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새어나왔다.
“네 전혀 모순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벨라는 그 말에도 여전히 침착한 모습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인간은 먼 옛날부터 자신보다 강한 짐승을 죽이기 위해 무기를 만들고 기술을 연마해왔습니다.”
“무슨 말이야?”
“무(?)는 어떻게 예쁘게 포장한다고 해도, 힘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한 기예. 결국, 좀 더 잘 죽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무신이라고 불리는 자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냉혹한 평가. 허나 아르벨라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것이야말로 무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제가 유천님께 알려 드릴 이것 또한 무의 일종이겠지만...동시에 무공이 아니기에,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제한될 테지요...”
“음...잘 이해가 안 가네...”
“타고난 이질의 재능을 말하는 겁니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천명 받은 불합리의 집합체.”
아르벨라의 무를.
카트레나의 검을.
자이에르바의 마법을.
여학천의 주술을
그들의 이질적인 오성은 일정 경지에 도달한 순간 파악한다. 무슨 수를 써도 이 영역에서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걸.
그리고 그것이 아르벨라가 유천을 막으려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유천이 무공을 익혀 강해진다고 해도 그 영역에서는 아르벨라를 결코 넘을 수는 없으니까. 그건 자존심도 확신도 아닌 정해진 사실.
“유천님에게도 우리들이 지닌 이질성이 있어요. 그리고 그건 저와 같은 길을 걷는다고 개화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에요.”
아르벨라는 그의 형편없는 정권을 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유천 또한 지니고 있다고. 스탯이니 뭐니 단순한 수치를 넘어선 무언가가 억눌러진 채 저 몸 안에 내재하여 있다고.
“...그게 뭐지?”
“보아하니 모르시는 거 같지는 않아 보이시는데.”
“......”
아르벨라의 말대로 짐작 가는 면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폴른을 상대할 때 표출된 과도한 폭력성.
이성과 효율이라는 허울뿐인 변명을 뒤집어쓴 약자에 대한 멸시와 적에 대한 비이성적 악의.
“짐승의 본능.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감각도(???)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건...”
“손에 넣은 것까지 부스러뜨릴까 봐 두려우신 건가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무를 추구하시는 건가요? 통제할 수 없을까 봐?”
아르벨라의 말대로다. 문명에서 살아오고 살아가길 소망하는 유천은 사회의 합의 밖에 존재하는 태초에 가까운 추악한 본능과 폭력성이 언제 적을 넘어 자신의 것에까지 손을 뻗을까 두려워 억누르고 외면해왔다.
정신을 차린 헤라클래스가 손에 자식과 아내의 피가 묻힌 채 절규하는 모습에 자신이 투영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 초월적인 힘은 그것을 아주 손쉽게 이룰 수 있게 하였으니까.
“외면하시면 안 돼요. 유천님.”
나약한 양들 틈에서 어울리기 위해 저 늑대가 얼마나 인내해 왔을까? 그 누가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다가와 유천의 두 손을 감싸 쥔 아르벨라는 쓰게 웃었다.
“그렇게 억누르다가는...원하지 않는 순간 폭주하여 최악의 결과를 낳게 할 거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억제해 왔음에도 점차 과거의 자신에서 동떨어진 존재로 바뀌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유천은 순순히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쉬워요.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뭐?”
“헐거운 철장에 미친개를 가둘 바에는 꺼내서 목줄을 채워 산책이라도 하는 게 낫지요. 그냥 분노하고, 욕망하고, 오만하시면 돼요.”
“...난 내가 어떻게 변할지 장담하지 못해...”
간혹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들조차 혐오스러웠는데 이성의 탈을 벗을 때 더 깊은 곳에서 무엇이 나올지는 유천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누군가에게, 그것도 아르벨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실망하게 하고, 또다시 슬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이곳에 제가 있잖아요.”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뒤로 물러선 아르벨라가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는 듯 팔을 벌리며 자애롭게 웃었다.
“유천님. 누구도 아닌 저, 아르벨라라면 당신의 장대하고도 순수한 추악함 그 전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르벨라는 자신 있었다. 유천이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 기저에 무엇이 있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자신이. 아니 자신 말고는 없었다. 있으면 안 된다. 그것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전부 안겠습니다. 그러니 전부 저한테 풀어주세요.”
쿠구구구궁...
아르벨라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흑백의 세상에 일곱 빛깔의 별들이 빛을 수놓자, 거짓된 거울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유천이 알고 있는, 아니 회귀 후 더욱 강해진 아르벨라. 고작 기운을 내뿜는 것만으로 차원방벽에 가까운 결계가 흔든다.
사납지만, 정제된 기운. 어쩌면 유천이 무에 집착한 이유에 자신이 키운 최고의 캐릭터인 아르벨라를 닮고자 한 것 또한 있을 것이다.
으드드득...
검붉은 기운에서 강압적인 살기가 흘러나와 유천을 옥죄어오고, 어지간한 공격에 흠집조차 나지 않던 피부가 가뭄이 난 듯 쩍쩍 갈라지며 피가 흘러나온다.
지금껏 경험해본 최강자인 라만이라도 기겁하며 물러나거나 도망칠 초월적인 살의.
아까처럼 어설프게 덤비지 말고 온전한 본성을 꺼내서 싸우라는 거겠지.
처음 경험해보는 압도적인 기세였지만, 유천은 오히려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그럼 너를 믿지 아르벨라.”
외면하여 바닥에 처박아 놓았던 감정을 제대로 주시하자, 희미했던 정체가 뚜렷하게 가슴에 박혀온다.
동시에 심장은 급하게 맥박치고, 온몸에서 핏줄이 솟아나며 두 눈은 짐승의 그것처럼 벌겋게 충열되기 시작한다.
“크르르르...”
목을 긁으며 올라온 뜨거운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유천은 아르벨라를 노려봤다. 그녀를 보며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지만, 그것들을 언어화할 이성은 본능과는 반대로 옅어지고 가라앉고 하나만이 당장의 정의가 되어 가슴을 채운다.
이 개좆같은 감정에서 벗어나서 만족에 들기 위해서는 저 년을 깔아뭉개야 한다는 질척이는 사념을 뿌리기 시작한 괴물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 이 시발년아!! 제대로 한 번 붙어보자!!”
오만한 괴물의 피. 그 심장의 박동이 감히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기세에 분노하여 울부짖으며 부스러뜨린다.
까드드득...!!
괴물은 자신을 덮은 검붉은 기운을 으스러뜨리고 열 손가락을 구부려 땅에 박은 후 앞으로 달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이름 모를 섬의 상체를 통째로 날려버리며 아르벨라의 앞에선 괴수가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손을 긋는다.
비상식적인 힘의 집중에 손가락 끝에 모인 과도하게 집중된 인력은 하늘을 무너뜨리고 바다로 추락시킨다. 그리고 그 멸망 속에서 아르벨라는 담담히 손을 뻗어 흔들었다.
키이이이이이!!
허공을 긁어내리는 듯한 요란한 소음과 함께 다섯 줄기의 선은 아르벨라를 빗겨나가 그녀의 뒤쪽 바다와 섬을 토막 내 버린다.
“역시 당신께서는 이게 어울리네요.”
아르벨라는 예리하게 베인 점퍼를 손으로 훑었다. 유천을 두 번이나 날려버린 회(回)의 묘리를 온전히 방어에만 치중시켰는데도 완전하게 비틀지 못했다는 뜻.
아르벨라라도 완전한 자신의 힘을 개화하기 시작한 유천을 가볍게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내 아래에 깔려서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지 한 번 보자 이 개년아!!!”
“그런 욕망도 좋네요.”
굴욕을 준 상대의 팔다리를 비틀어 고통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하고 싶어하는 비틀린 악의. 동시에 그 안에서 강하고 아름다운 암컷을 임신시키고 싶어 하는 눈빛 스며나온다.
언제나 느껴본 기분 나쁜 끈적거림이었지만, 아르벨라는 오히려 얼굴을 붉히며 기뻐했다. 깊은 곳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유천 또한 자신을 갈망하고 있다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양팔로 자신을 붙잡으려는 유천의 품 안으로 들어간 아르벨라가 손등으로 복부를 치자, 투웅 무거운 파동이 그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저는 저보다 약한 남자의 아래에 깔릴 생각이 없으니까요!!”
몸 안으로 스며든 파동에 근육이 경직되어 정지한 유천을 아르벨라는 중(?)의 묘리를 담아 다리를 들어 머리를 내려쳐 바다 아래로 처박았다.
쿠우우웅!!
유천이 박힌 지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밀려나는 바다는 해일이 되어 결계 내부의 섬들을 집어삼켰다.
그 상공에서 아르벨라는 중의 묘리에 수심 자체가 내려앉은 바다를 차분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저는 아직 하나의 ‘별’조차 꺼내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듣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녀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으시면, 본능에 집어삼켜 지는 게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쿠구구구궁...
힘의 잔흔에 투명한 구체가 박힌 것처럼 눌려진 바다 한가운데가 떨리며 볼록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그곳에 박힐 거랍니다.”
“그 입 좀 닥쳐!!”
콰아아아앙!!
서해바다 깊숙한 바닥을 박차고 솟구친 괴물은 더욱더 분노하여 채찍처럼 발을 휘둘렀지만, 아르벨라는 그 발을 붙잡고 몸을 회전시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다.
“이런 씨이이바아알!!!!”
카가가가각!!!
팽이처럼 회전하며 바다로 추락하는 몸을 양팔로 공간을 뚫어 억지로 고정시켜 멈추고 바다 위에 섰다.
고작 몸을 멈추기 위해 그 모든 반동을 자신의 신체로 받아들이는, 효율과 비효율을 넘어선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아르벨라는 더욱 진하게 웃었다.
고절한 심상이나, 깊은 깨달음이 아닌 저 괴수와 같은 무식한 광기야말로 유천이 자신만의 극의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크르르...죽인다!!!”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바다를 박차고 치솟는 괴물. 그러나 아까와 같은 이런 정직한 궤도로는 똑같은 결과만을 낳을 뿐이었다.
아르벨라가 그것을 몸 깊숙이 무의식에 박아 넣어주기 위해 손을 뻗은 찰나 그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이어진 옆구리 사각(死?)에서 공간을 헤치며 날아드는 주먹을 몸을 틀어 피했다.
파아아아아앙!!
일말의 깨달음 없이, 무식하게 힘만으로 구현된 고위 무류의 하나인 격공(??)에 결계를 부서질 듯 흔들렸다.
그러나 그 파동을 가까이서 맞은 아르벨라는 여전히 침착한 눈으로 순식간에 마력에 심상을 담아 고밀도로 응집시킨 검강(??)을 늘어뜨려 사선으로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궤적의 선상에 존재하는 바다가 사선으로 일그러지고, 증발해 안개로 화할 정도의 위력. 하지만 그녀는 안다. 이걸로는 유천의 몸을 찢을 수 없다는 걸. 그런데 아무런 반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이 사선으로 찢겨 나간 형상은 누구란 말인가?
눈앞의 존재가 유천이라는 본능과 그건 말이 안 된다는 이성이 충돌하는 찰나의 고민 속에서 이성의 손을 들어준 아르벨라는 검강의 채찍을 줄여 손목과 어깨를 흔들어 휘둘렀다.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나아간 채찍은 그녀의 등 뒤. 동시에 막강한 반탄력과 함께 행성이 잡아당기는 듯한 인력에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하하하!”
그곳에는 검강을 부서질 듯 쥔 채 자신을 노려보는 유천이 있었다. 뒤에서 사라지는 존재감. 하나의 존재가 두 개의 존재감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학문은 알고 있었다.
“주술. 그것도 분신이라...그건 여학천 그 영감탱이나 할 수 있을 최고위의 주술인데...주술도 배우셨나요? 아니면 자이에르바처럼 시간계열 마도라도 익히신 겁니까?”
아르벨라는 기쁨에 찬 흥분을 참을 수 없었다.
분신. 심상을 완전히 세워, 세상을 희롱하여 속이고 자신을 은닉할 수 있는 마법사나 주술사만이 존재라는 개념을 조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아르벨라가 아는 한 그런 이적을 가능케 하는 건 자이에르바와 여학천 이 둘뿐.
그런데 그걸 방금 잠시지만 유천이 이루어냈다. 오로지 사냥감에게서 자신을 숨기고자 하는 본능과 그 모든 반발을 받아낼 수 있는 육체만으로 말이다.
유천이 자신의 이질성을 개화하자마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그 모습이 아르벨라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역시! 제게는 당신뿐이에요!! 나의 신이시여!”
“크르륵...내 발밑에서 울부짖게 해주마!”
광기와 광기가 맞부딪친다.
이후 상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이어진 공간 전투는 처음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팔을 휘감아오는 회의 묘리를 회복력을 믿고 팔을 있을 수 없는 각도로 억지로 비틀어 벗어난다.
중의 묘리를 담아 내리찍는 손바닥을 몸을 공간에 고정한 채 맞받아친다.
콰과과과과광!!!
하나의 짐승이 되어버린 유천과 아르벨라가 순식간에 결계 내부 곳곳에서 충돌하자, 발생한 충격파에 회색으로 물든 구름은 찢어발겨 지고 섬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으며, 공간 채 밀려난 바다는 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진 검붉은 검강을 붙잡은 유천은 그대로 바다였던 바닥을 향해 아르벨라를 집어던졌다.
쿠쾅!!
지층을 부수며 추락했지만, 고작 저 정도로 죽을 여자가 아니란 것을 아는 그가 아래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을 향해 공간을 걷어차며 떨어졌다.
“뒈져!!!”
음속을 아득히 넘어선 속도와 자신의 힘. 이 둘이면 저 강한 암컷을 쓰러뜨릴 수 있다. 그 뒤에 이 더러운 감정을 그 몸에 씻어낸다.
이성이고 뭐고 날아가 괴물이 된 유천은 가슴을 채운 저열한 감정에 모든 걸 맡기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성을 잃었기에, 그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녀가 무신이라고 불리게 된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투웅...
산을 뒤집어엎는 파괴음 대신 북을 때린 것 같은 둔탁하면서 묵중한 소리가 들려오자 유천은 눈을 부릅떴다.
“유천님 아쉬우시겠지만, 이번에는 여기까지만 해야 할 거 같네요. 거울세계도 더는 못 견딜 것 같고요.”
아래에 자신의 주먹을 막아내 밀어내는 검은 안개와 그에 휩싸인 채 부드럽게 웃고 있는 암컷이 보이자, 경악한 짐승은 재빨리 손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물러나 그녀와 대치했다.
“크르르르...”
“일단 이 정도만 해도 제 상상을 초월하셨어요. 설마 첫 번째 별을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세요.”
자신을 경계하는 새끼고양이를 보듯 기쁜 표정으로 유천을 쳐다보던 아르벨라가 팔을 쭉 뻗고 손가락을 내밀자, 검은 안개들이 모여든다.
우그그그극...!!
철판을 접어 뭉개는 소리와 함께, 형태를 고정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검은 젤리와 같은 그것은.
마치 세상의 빛을 모두 집어삼키겠다는 것처럼 주변에 어둠을 흩뿌려 모든 물질을 멈춰 세워 색을 먹어치운다.
“아직 같이 할 이야기가 많아요. 앞으로의 성장에 대해서 말씀드릴 부분들도 있고요.”
점차 구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어둠.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아래로 보는.
아래에 속하지 않는 모든 걸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겠다는.
‘아...’
자신의 본능조차 짓이겨 누르는 오만한 패도(??)에 유천은 서서히 이성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닫는다. 어째서 이 암컷, 아니 아르벨라가 무신이라고 불린 이유를.
저 어둠이 그녀 본인의 것을 포함해 일곱별까지. 그녀가 지닌 여덟 개의 심상 중 첫 번째 별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좀 주무시고, 나중에 뵈어요.”
“아...”
정신을 차렸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쏘아진 검은 구슬이 자신의 몸에 닿자, 고뇌 감정 생각 등 모든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지워버린다.
카드드드득...!!
뒤로 쓰러지면서 퍼져나간 어둠에 결계가 갉아 먹히는 걸 보던 유천의 눈은 잠이 들 듯 감겨오고.
‘졸라 쎄네...시발...’
그 생각을 끝으로 유천은 무아(無?)속 포근한 어둠 안으로 잠겨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