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압도
* * *
자리를 벗어난 둘은 석모도에 있는 유천의 개인수련장으로 향했다.
감정을 가라앉힌 아르벨라는 이 섬 전체가 유천의 개인수련장이란 말을 듣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섬을 돌아다녔다.
“과연 여기도 해양괴수들이 넘치네요.”
죽인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여전히 석모도 주변에는 괴수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내륙 쪽으로 흘러가면 얼씨구나 하고 좋아할 이지연이 떠올라 유천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바다는 땅에 선 인간이 가장 대처하기 힘든 곳 중 하나지. 중앙세계도 마찬가지잖아?”
“네 오죽하면 놈들의 수나 질이 절대 방위선에 근접한다는 말까지 돌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서열정리가 안 되는 녀석들이기도 하지.”
내륙이상으로 깊고 넓은 만큼 끊임없이 등장하는 괴수들. 지성을 잃은 채 먹이만을 찾아 바다를 배회하는 현상형 괴수인 재앙들까지.
만약 해양괴수들이 자기들끼리의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가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었다면 인류는 크나큰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것도 언젠가 깨지게 되지.”
“재앙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래 의지도 지성도 없는 놈들이 하나의 목적성을 가지게 되는 그날 중앙세계의 대양(大?)은 또 하나의 절대 방위선이 될 거다. 아르벨라.”
“네?”
“놈들을 찾아봤어?”
“풍랑, 천공, 흑해를 말이지요?”
“그래.”
재앙의 부활.
풍랑(風?), 천공(??), 흑해(??).
이 세 재앙을 중심으로 통합지성을 지니게 된 재앙들은 하나의 목적성을 가지고 괴수들을 통합한 후 지상으로 진격하는 사건은 세계대전, 외차원과의 전쟁과 함께 유천이 생각한 가장 큰 멸망의 분기점 중 하나이다.
‘아니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왔지. 아무도 놈들이 통합될 거로 생각하지 않았으니.’
세계대전과 절대방위선에서 치른 외차원과의 전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카르발디 군도를 바다 아래로 잠기게 하는 것으로 시작된 재앙의 부활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저도 찾아보려고 했으나...”
“못 찾았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재앙 놈들의 특성상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놈들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의지도 지성도 없이 흐르는 현상은 아무리 3차 초월에 도달한 절대자들이라도 찾을 수 없다. 파도가 치고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것에 무슨 의도가 있단 말인가?
결국 해결책도 없는 문제. 유천은 어영부영 잡히지도 않는 문제보다 더 당장에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일단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아르벨라.”
“예.”
“내 이야기 궁금하지 않아?”
“......”
궁금할 것이 분명할 텐데, 아르벨라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그것에 대해 기분이 상해있는 건가?
“음...아르벨라. 아까 내가 한 경솔한 발언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런 거 때문이 아니에요.”
“응?”
“그냥...다음에 듣고 싶어서요. 뭐랄까...좀 더 극적인 분위기에서 듣고 싶달까...?”
“그래...?”
“네 다음에...제가 원할 때 말씀해 주셨으면 해요.”
얼굴을 붉힌 그녀가 아이처럼 밝게 웃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쁘다면 모를까. 아까처럼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유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대화의 화제를 바꿨다.
“그럼 내가 또 뭐 물어봐도 될까?”
“예. 얼마든지요.”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야?”
“그거라니요?”
“아까 나 날려버린 거 있잖아.”
“아...”
유천은 분위기에 휩쓸려 키스를 할 뻔한 순간 아르벨라의 손에 날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묘했거든.”
다급하게 얼굴로 뻗어졌던 아르벨라의 손은 절대 빠르지 않았다. 라만의 빛살과 비교하자면 굼벵이라고 할 만큼. 그러나 날아올라 건물을 뚫고 반대편 건물에 박히고 나서야 유천은 그 손이 볼에 닿았다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이 자신만을 두고 흐르는 것 같은, 사고력과 인식 자체가 느려진 것 같은 기묘한 감각.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감이 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건 그것이 이제껏 유천이 본 적 없는 아득할 정도로 높은 무(?)라는 것 정도.
“아니 그것보다는 나한테 싸우는 법을 알려줘 아르벨라.”
“싸우는 방법...말인가요?”
“어 싸우는 방법. 네가 보기에 나한테 부족한 것이 뭔지 알려줬으면 해.”
랭킹 5위라는 자리와 무신이라는 칭호를 위원회에서 부여하는 이상 절대 허명이 될 수는 없다.
적이든 아군이든 지금까지 유천이 만나본 자들과는 무력 차이가 너무 심해 이쪽 방면에서의 성장이 더딘 이때.
유천이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을 상회하는 강자이자, 중앙세계에서도 정점의 무인이면서, 강박에 가까운 호의를 가진 아르벨라는 스승으로서 제격인 인물이다.
“부족한 점...”
“내 눈치는 보지 않아 줬으면 해.”
워낙 강한 힘으로 가려져 있지만 유천은 그나마 익힌 전투술이라고는 킬리언에게 배운 기초뿐인 아마추어다. 유천과 동격인 아르벨라라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부족함이 훤히 보일 게 뻔했다.
“그...그러니까...음...”
그러니 저렇게 망설이는 것일 거고, 형편없는 부분들이 있을 텐데 상대가 유천이기에 뭐라 말하기 눈치 보인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당장에 위험한 적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적들 중에도 끔찍하게 강한 자들이 넘쳐난다. 나아갈 방향성은 정했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을 채우려면 유천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의 도움이 필요하다.
“후...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알겠어요.”
유천의 단호한 표정에 한숨을 내쉰 아르벨라가 아공간을 열자 나타난 겨울 세계를 만드는 장치인 토이박스를 하늘로 던졌다. 공중에 떠올라 돔의 형태로 퍼져 나간 흑백의 세계는 석모도와 인근 해안을 덮었다.
“그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천님과 제가 아닌, 각성자 대 각성자의 입장에서 대하겠습니다.”
“...그래.”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에 당황했지만, 아르벨라의 지위가 지위인 만큼 이곳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할 것이다. 최대한 많은 것을 챙겨가야 할 유천에게는 오히려 원하던 바였다.
“일단 제가 유천님의 힘에 대해 잘 모르니까. 간단히 대련이라도?”
“전력으로 가도 되겠지?”
“물론이에요.”
아르벨라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제 생각대로라면...유천님은 제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니까요.”
“하! 설마 이런 식으로 도발할 줄은 몰랐는데?”
유천이 선물해준 무인으로서의 삶과 스스로의 무에 확고한 믿음, 그리고 거짓을 말하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정이 합쳐지자, 유천에게 숭배에 가까운 마음을 가진 아르벨라라도 그를 도발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도발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만?”
자세를 잡으며 사납게 웃는 아르벨라. 자신이 아는 본래 그녀의 모습은 사뭇 반갑기는 했지만, 어찌 보면 자신의 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동시에 유천의 기분은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럼 오십시오.”
“그런 말까지 들으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지!!”
콰아아앙!!
땅이 밀려날 정도로 거세게 박차고 나간 유천의 신형은 공간을 단축한 것처럼 어느새 아르벨라의 앞에 서 있었다.
‘전력을 다한다.’
여전히 무방비해 보이는 아르벨라의 모습. 허나 유천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파워밸런스가 미쳐 날뛰는 중앙세계에서 정점에 닿아있는 여인.
하지만 카페에서 방심하여 날아갔을 때와 화명안으로 그녀를 관측할 때의 자신은 완전히 다르다.
어그러진 물리법칙으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유천은 아르벨라의 양손과 발 그리고 관절의 위치, 무게 중심의 변환, 시선의 이동.
움직임과 관련된 모든 것에 최대한 집중한 후 비어있는 상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게 무엇이든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뚫어내겠다는 의념이 담긴 온전한 전력.
백색 마왕을 상대했을 때와 같이 유천의 주먹이 지나가는 궤적의 공간과 차원의 이음새가 찢겨나가고 소리와 빛조차 사리진 틈으로 공허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공허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이에르바와 동격인 그녀가 공허에 휩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천이 원하는 건 자신 최대한의 전력을 아르벨라가 깨뜨려, 통제할 수 없는, 본능에 주박처럼 박힌 오만함과 나태함을 없애는 것. 그렇게 하여 무공 증진에 대한 이성과 욕망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
이 두 가지다.
‘어떻게 막을 건지 보여라. 아르벨라.’
강기공? 의념지기? 아니면 초월적인 어떠한 기예? 그게 무엇이든 제대로 마주하고 싶었다. 그로 인해 나아갈 길이 보이기를 바랐다.
그때 아르벨라의 손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을 파헤칠 파멸을 담은 주먹과 가녀려 보이는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을 때.
어...?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이 어지러이 번갈아 보인다.
콰아아아앙!!!
어깨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흙과 돌무더기를 뒤집어쓰고도 5초가 지나서야 알아차렸다.
자신이 물수제비처럼 볼품없이 튕겨져나가 석모도에서 떨어진 외딴 섬 하나를 짓뭉개며 박혔다는 걸.
“이게 무슨...”
아프지는 않았다. 고작 바윗덩어리 따위에 부딪힌다고 다칠 몸은 아니니까. 하지만 유천의 정신은 어느 때를 통틀어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똑같잖아...’
손이 움직이는 걸 분명히 인식했음에도 어떠한 작용이 일어난 건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날아갔다.
일말의 방심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집중을 기울였음에도 마음이 풀려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고개를 들어 본 곳에는 아까 있던 곳이 점처럼 보인다. 즉 뒤로 흘려보낸 게 아니라 정면에서 받아쳤다는 것.
그것도 압도적인 힘도, 강대한 마력도 거대한 의념도 없이, 가벼운 산들바람에도 흩날릴 약함으로 말이다.
“단순 물리력으로 공허를 불러 일으킨다라...대단하세요. 유천님. 이런 힘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답니다.”
언제 온 걸까?
분명히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아르벨라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가지런히 조심스럽게 꿇고 앉아서 칭찬하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언제 다가온 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녀는 홀로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가는 건가? 아니 그건 자이에르바가 그런 거 아닌가?
유천이 멍하니 두서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르벨라가 주변을 둘러봤다.
깨지고 검게 물든 공간.
공허.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인상을 썼다.
“음...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공허는 오래 내버려두면 차원에 좋지 않아요.”
지구는 유천이 있는 차원. 아르벨라는 그 땅이 저런 힘 따위에 침식당해 상처입는 걸 두고보고 싶지 않았다.
으적
그녀가 검게 물든 공간을 향해 손가락을 뻗자, 차원이 깨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공허가, 영혼 물질 감정 모든 걸 가리지 않고 집어삼키는 어둠이, 검붉은 무언가에 짓이겨져 사라진다.
‘저럴 수 있는 건가...?’
유천은 자신의 육체조차 잠식하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힘이 저렇게 찰흙처럼 으깨지고, 차원의 이음새가 다시금 이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아르벨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득한 격차.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행한 모든 것이 상상도 납득도 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감정이 유천의 가슴속에 들어차기 시작한다.
“유천님...?”
처음 괴수를 마주했을 때의 혼란. 미지의 실체를 목도했을 때의 공포와 경외.
유천은 절실히 알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의 눈을 보며 걱정스러운 안색을 한 여자가 어째서 중앙세계에서 신(?)이라 불리는지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