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아르벨라(5)
* * *
아르벨라라는 캐릭터를 플레이하던 집돌이 폐인 게이머였습니다.
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거짓을 언급할 수도 없었고. 음료를 거칠게 들이킨 유천은 바닥이 보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숨을 쉬며 내린 후 긴장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건 예상하고 있지?”
“네...지구도 중앙 세계분이 아니라는 건 짐작하고 있어요.”
“그래...”
아르벨라를 플레이하면서 저지른 수많은 실수와 잘못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진리의 핵심은 공감.
유천은
아르벨라가 직접 겪은.
전장의 피비린내를 맡지 못했으며,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해 원하는 플레이가 되지 않을 때는 답답함을 느꼈고, 슬픔의 문장은 재빠른 엔터키로 스킵시켰다.
그저 모니터 너머의 폴리곤 덩어리를 통해 그런 아픔을 공조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현실로 다가와 자신을 갈망하는 아이에게 유천은 도저히 그런 변명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어...”
“예...?”
회한에 젖은 유천의 말에 사정을 알지 못하는 아르벨라는 당황했다. 과거에 어떤 아픔이라도 있는 것인가? 자신이 물으면 안 되는 무언가를 물은 것인가?
어느 순간부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던 폭군이 새끼 강아지처럼 몸을 움츠렸다.
“고, 곤란한 거라면 말 안 해주셔도 돼요...제, 제가 잘못했어요...그...”
“유천.”
“예? 아...”
“생각해보니 내 이름을 소개하지 않은 것 같네. 아르벨라 내 이름은 고유천이야. 그러니 앞으로 당신께서 라느니 신이라느니 그런 말을 하지마. 아까도 말했듯 난 네가 생각한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어?”
아르벨라가 탁자를 탁치고 일어나 한껏 성난 얼굴을 내밀고 자신을 노려보자 유천은 흠칫 놀라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당신꼐서는...! 아니 유천님은 대단하신 분이에요!!”
“아니...그러니까...내 이야기를 들으면 너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르벨라는 성난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었다. 곧이어 탁자 위로는 물방울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제 삶을...구원해 주셨잖아요...”
별거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저에게 운명을 개척할 힘을 주셨죠.”
삶이라는 투쟁에서 버틸 힘을.
“제가 힘들 때 항상 곁에 있어주셨죠.”
아픈 가슴에 위로를.
“몇 번의 죽음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주셨어요.”
간혹 실수가 있긴 했지만, 그녀가 알지 못했던 지식으로 벗어난 위기가 더욱 많았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것이 한낱 신의 유희라고 할지라도 상관없다. 괴로움과 아픔 또한 지금의 아르벨라 반 엑시르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부품이니까.
“아...”
유천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멍청한 새끼...’
아르벨라에게서 풍겨오는 자신감의 근원이 강자들 특유의 자애(??)라고 생각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그녀가 품고 있는 자애의 더 깊은 근원에는 유천 자신이 있었으니까.
유천에게 아르벨라는 게임 캐릭터였지만, 아르벨라에게 유천은 삶 그 자체다.
그런 그녀 앞에서 유천은 자신을 부정한 것이다. 그것이 여전히 라스트 레거시라는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스스로의 죄책감을 분풀이하듯 내뱉는 이기적인 자학(??)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흑...흐윽...”
“하아...”
다시 울려버렸다. 아니 아까의 눈물과는 다르다. 영화관에서의 눈물이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라면, 지금의 눈물은 그야말로 아픔의 눈물.
하찮은 사람의 유희에 삶을 이용당했다는 분노와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서 한 말이 역으로 그녀를 더욱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아르벨라?”
“흐윽...흑...흐엉...”
어떤 식으로든 대답만큼은 잘해줬는데 이제는 말조차 꺼내지 않고, 오히려 더욱 크게 아이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 여자 저 여자 엮여봤지만, 그럼에도 아직 유천은 여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자 꼬시기만큼은 하이랭커에 가까웠던 술집 형님의 말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뭐라고 했더라...’
우는 여자 앞에서 논리적인 대화를 할 생각 하지마! 아니 사과도 하지마! 오히려 역효과야!
네? 그럼 뭐 어떻게 해요?
뭐긴 임마! 가서 키스라도 날려! 그럼 다 풀리게 돼 있어.
...아무리 봐도 야맨데...저 다 봤어요. 저번에 형님 바람 폈을 때 여자친구분 가게 앞에서 무릎 꿇고 비는...
아니 시발!! 병신아!! 그건 우는 게 아니야!! 화난 거지!!
노발대발하면서 설명을 하는 이제는 이름조차 까먹은 술집 형님. 결론은 간단했다. 몸이 움직이어야 할 때와 입이 움직여야할 때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
즉 여자가 울 때는 그 여자가 원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만약 모르겠다? 모르겠으면 일단 머리를 쓰다듬어 보라는 것. 그럼 반응을 통해 대강 알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럼에도 모르겠다?
‘그럼 나가 죽으라고 했던가?’
유천은 속으로 피식 웃은 후 아르벨라를 다시 쳐다봤다.
“흐윽...흐윽...”
여전히 주저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 아르벨라. 아마 화가 난 거는 아닐 거다. 그도 조절되지 않는 감정의 파동만으로 이 정도의 건물을 날려버릴 수 있는데, 아르벨라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술집 형님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다. 그건 사람을 가볍게 만나고 사귀는 그 사람의 방식이니까. 하지만 그만큼 많이 사귀어본 사람인 만큼 공감이 가는 면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말이 필요할 때가 있고 말이 필요 없을 때가 있다는 것.
“아르벨라...”
유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벨라의 곁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지 않게, 천천히, 머릿결 하나하나 정성 들여서. 아니 그러지 않아도 아르벨라의 머리는 비단결같이 부드러웠다.
쓰다듬을 때마다 올라오는 향긋한 라임향을 맡으며, 긴장한 마음으로 최대한으로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미안해 아르벨라. 내가 잘못했어.”
“......”
“네 심정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가볍게 입을 열었어.”
때문에, 그래서 같은 말은 내뱉지 않는다. 의도가 어쨌든 변명처럼 들릴 테니까.
“네게 내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지 못했다.”
투박함 속에 담긴 진심을 알아줬을까? 더 이상 울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아르벨라의 얼굴은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천은 고해하듯 묵묵히 자신의 잘못을 입에 올렸다.
“아르벨라, 네 삶을 이해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니...용서해줄래? 얼굴도 좀 보여주고.”
머리칼을 파고든 손이 아르벨라의 부드러운 볼에 닿자 고개를 살짝 흔들며 저항했다.
“...싫어요...”
“응? 왜?”
부정했지만 아까처럼 반응은 격렬하지 않았다. 싫다는 건 아니겠지. 그럼 왜일까?
“얼굴이 엉망이에요...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아...”
‘그런 이유였나? 상관없는데 말이지.’
눈물로 범벅되었어도 유천이 아는 아르벨라는 중앙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녀였다. 게임 속...아니 회귀 전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가 독이 되어 수많은 위기를 낳았을 정도로 말이다.
눈물이 아닌 흙이 묻었다고 해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바래지지 않았을 거다.
유천은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뱉지는 않고, 말없이 아르벨라의 턱을 잡고 올렸다. 아르벨라는 싫다는 듯 꿈틀댔지만 정작 유천의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고개가 들어 올려지자 머리카락들이 흩어지고 얼굴이 드러났다.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사나운 눈매 아래로 흐른 눈물 자국은 강인함 속에 숨겨진 나약함.
“아름다워...”
“읏...!”
이 나약함은 오로지 나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내 것이다.
“아...”
욕망에 찬 눈빛. 그리고 그건 아르벨라에게도 익숙한 눈빛이었다. 본래라면 두 눈을 찢어버렸을 눈빛이었지만, 그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분노에서 기쁨과 부끄러움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하며, 달콤해지는 분위기. 아르벨라 또한 소망했던 일이었지만 둘 모두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아...으...”
연애라는 걸 해보지 않은 아르벨라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입술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섦으로 머리를 뜨겁게 달궜고, 멘붕에 빠진 그녀에게는 안 좋은 습관이 있었다.
“으...아아아!”
콰아아앙!!
놀라면 주먹부터 나간다는 것.
꺄아아악...!!
뭐, 뭐야!!
괴수...? 도, 도망쳐!
협회! 협회에 신고해줘요!
아르벨라의 공격(?)에 유천이 카페를 부수며 날아가자, 반파된 카페 안의 사람들은 파편에 휩쓸려 상처 입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녀에게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 내가 무슨 짓을...아...! 유, 유천님!”
자신이 감히 그를 공격했다는 생각에 아연해진 아르벨라는 땅을 박차 올랐다. 물론 정체를 숨기는 건 잊지 않았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저, 저리 비켜!!
바깥의 상황 또한 아비규환. 최근 서울 내에서 벌어진 몇몇 사건은 민감해진 서울 시민들의 정신을 폭주시키기 충분했다.
당연히 아르벨라는 그것을 무시하고, 유천이 날아가 처박힌 반대편 건물을 향해 착지하자 그곳에 보이는 건 어안이 벙벙한 채 자신을 쳐다보는 유천 뿐.
“유, 유천님! 괘, 괜찮으신가요?!”
날아간 유천이 박힌 곳이 임대되지 않은 층이라 다행히 다른 사람은 없었지만 아르벨라는 자신이 유천을 공격했다는 생각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건...생각하지 못했군.”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 쓴 유천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정리해야 할 것을 떠올리면 한숨만이 나왔다.
“...난리 났군.”
“...죄송해요...제가 꼭 책임을...”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 아르벨라.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고 말이야.”
유천 또한 아르벨라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옛 습관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아니 그녀에게 열을 뻗치게 하는 건 항상 적이었으니 종류는 다를지라도 자신의 존재가 머리에 열이 오르게 한 이상 그건 당연한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떻게 책임을 질 수는 있고?”
“그건...”
위원회의 일좌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문젠데, 거기에 더해 난동을 피웠고 사죄를 한다? 어그로도 그런 어그로가 없다.
“벌써 오나? 빠르군.”
멀리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각성자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아마 협회나 관리기구 소속 각성자들이겠지.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아르벨라나 유천 둘은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걸려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협회랑 얘기해서 합당한 보상책을 마련해 둬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유천은 고개를 들어 어쩔 줄 몰라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울먹이고 있는 아르벨라를 쳐다봤다.
“죄송해요...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버리지는...”
“얘가 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국이 운이 좋은 편이라서 그렇지 괴수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이런 광경은 흔해빠진 것에 불과하다. 이제야 아르벨라와 제대로 마주할 각오를 했다. 그런데 고작 이런 일로 그녀에게 화를 낼 이유조차 없었다.
“하지만...제가 유천님께 공격을...”
“무슨 공격? 아프지도 않았어. 괜찮아.”
강화 콘크리트 따위는 그에게는 찰흙만도 못하다. 오히려 아까 아르벨라가 껴안았을 때가 몇천 배는 더 치명적이었다.
“그러니까 뚝 그쳐 아르벨라. 왜 이렇게 울어 응? 너 원래 그런 이미지 아니잖아.”
아직도 어색하다. 저 아르벨라가 남자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광경은.
“유천님이니까요...”
“그건...좀 기분 좋네.”
“가, 감사합니다...”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아르벨라 같은 여자가 저렇게 왔다갔다하는 모습. 상황에 맞지 않았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이야기들도 많았고 여기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짧은 휴가가 이렇게 끝나는군.’
“아르벨라.”
“네?”
“일단 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