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아르벨라(4)
* * *
유천은 품 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내는 아르벨라를 데리고 영화관을 벗어났다. 펑펑 우는 아름다운 여인과 그를 위로하는 남자의 모습은 눈에 띄었지만, 유천은 그런 시선 따위에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여러 가지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예상은 했었지.’
엑시르라는 성, 그리고 일곱별의 저주를 벗어나 지배하여 중앙세계의 지배자 중 하나로 우뚝 선 모습까지. 무엇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동시에 그 모든 건 그녀가 게임 내에서의 일들을 알고 있다는 것 하나로 모두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다행이기는 하지만...마음에 들지 않아.’
이곳이 진실한 하나의 세상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고였던 죄악감이 뚜렷해지자 입맛이 썼다. 게임 내에서 타인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은 아니다.
이것은 효율적으로 강해지게 하겠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희생하게 한 것들에 대한 부채감.
누구보다 라스트 레거시에 진심이었던 한 사람으로서 최애 본캐의 처절한 삶의 궤적에 대한 아픔.
그리고 그럼에도 자신을 갈구하는 소녀를 보고 다행이라고 여기는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였다.
‘역겹네.’
나라면 어땠을까? 지금까지 감정과 고뇌를 짓밟고 하나의 방향성만을 강조한 존재를 마주한다면. 예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같은 아픔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테지.
그래서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혹시나 하는 예감이 맞아떨어진다면 아르벨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아르벨라에게 나는 괜찮은 주인이었던 걸까...’
아니 그딴 자기 합리화로 마음을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지나간 과거는 흐르는 물처럼 담을 수 없는 것.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나,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지.
대화를 나눌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유천은 주인을 찾은 강아지처럼 얼굴을 부비는 아르벨라를 데리고 룸카페를 찾았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딸기 스무디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어...딸기 스무디 하나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맞으신 가요?”
카페 직원의 눈이 잠시간 훌쩍거리는 아르벨라에게로 향했지만, 그저 다툰 연인이겠거니 하면서 자연스럽게 외면하고는 모니터를 두드렸다.
“12,500원 되시겠습니다.”
“여기요.”
“포인트 적립은 필요하신...”
“괜찮습니다. 방은?”
“여기 17번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유천은 직원에게서 방 키를 받아 재빨리 들어가 문을 닫고는 아르벨라를 천천히 품에서 떼어내려 했다.
“으으응...”
“아르벨라...”
그러나 품 안에서 얼굴을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는 절대로,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매미처럼 유천의 등허리를 양팔로 붙들었다.
으드득...
‘아프네...’
라스트 원 급 하이랭커인 라만이 전력을 다한 창격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던 것이 유천의 뼈였다. 그러나 고작 아르벨라가 껴안는 것만으로 유천은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이 세상에 오고 나서 느낀 적 없던 낯선 압박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13 위원회의 일좌(一?), 흑경(??)의 주인, 랭킹 5위, 무신(??) 아르벨라 반 엑시르. 새삼 그 압도적인 위상이 다가온다.
지금껏 적수가 없던 유천이라지만, 이 완전무결에 가까운 무인인 아르벨라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힘, 명예, 권력.
그 중 무엇 하나도 정점이 아닌 것이 없는 여자가 모든 걸 벗어던지고 한 명의 아이가 되어 애정을 갈구하고 있다. 고작 과거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걸 외면한다니. 그건 힘이 아까운 걸 넘어 남자 새끼가 아니다.
‘그런 새끼는 자지를 떼어내야지.’
유천은 반으로 접힐 거 같은 등뼈의 통증을 내색하지 않으며 아르벨라의 등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아르벨라?”
“으으으응...!!”
“어디 안 갈게. 어디 안 갈 테니까. 이거 잠시만 놔주겠어? 가서 음료만 받아올게. 응? 너도 다른 사람한테 눈물 보이기 싫잖아?”
“......”
“네가 좋아하던 딸기음료를 시켰어. 응? 먹고 싶지 않니?”
아르벨라는 딸기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딸기 주스, 딸기 우유 등 맛이랑 상관없이 딸기와 관련된 모든 걸 좋아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천이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하나씩 선물해준 사탕이 딸기 맛이었으니까.
“......”
그러나 유천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 딸기에 환장하던 아르벨라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슴에 얼굴을 박은 채 팔에 힘을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아닌가...? 어...혹시 취향이 바뀌었니...? 내가 그걸 생각을 못했네...아하하...”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회귀 비스무리한 걸 했을 거라는 건 추측 가능했다. 이렇게까지 강해진 걸로 봐서는 한 사람의 바뀔 시간을 지새웠을 거다.
유천은 부모를 잃은 아이를 마주친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거 마시고 싶어? 그런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내가 다 사줄 테니...”
“딸기.”
“어?”
영화관에서 나오고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아르벨라가 입을 떼자 유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래에서 빼꼼 고개가 들어 올려지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조명 아래에서 그 얼굴이 유천의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장미가 그 아름다움을 잃으랴. 눈물에 흠뻑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유천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옅게 빛나는 붉은 눈이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훌쩍...딸기...좋아요.”
*
아르벨라가 팔을 풀어준 덕분에 프런트로 가서 음료를 받아온 유천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딸기 스무디를 만족스러운 표정을 마시는 모습을 쳐다봤다.
‘그런데...정말 맞아?’
시간이 지나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고 이성을 되찾게 되자 현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외모는 분명 같다. 머리나 눈동자의 색, 얼굴의 윤곽이 약간 달라 보였지만, 정체를 감추기 위한 조작이겠지. 거기에 유천과 아르벨라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까지. 그러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인데도 유천은 긴가민가했다.
전대 13위원회 직속 제 1 기사단장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여걸.
13위원회의 일좌 중 하나인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용사 가문 베렌듀크의 씨를 말려버린 폭군이.
“훌쩍...”
저렇게 아이처럼 코를 들이키고 있다고 말한다면 누구나가 조롱성에 가까운 블랙 조크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 의문을 드러낼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딱 봐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아르벨라가 다리까지 사용해서 몸을 꼭 붙들어 맬 거라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대로 아무 말도 않을 수는 없었기에 눈을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맛은 괜찮아?”
“아뇨 맛없어요...”
“응...?”
생각한 대답은 이게 아닌데...?
“냉동 특유의 불쾌한 식감에 부족한 맛을 추가하기 위해 시럽을 과하게 뿌렸어요. 거기에 얼음을 통째로 성의 없이 갈아 알갱이가 균일하지 않아요. 지구라는 차원 식문화가 다양한 건 인정하지만, 대부분의 품질은 완전 싸구려. 엉망이에요.”
“......내가 모르는 너의 시간에 많은 일이 있었나 보네...”
분명 기어 다니던 애벌레도 주워 먹던 아이가 어느새 전문 미식가가 되어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아르벨라의 한 끼 식단은 어지간한 중산층 가정의 1년 치 생활비에 비견될 테니까.
“그, 그렇다고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에요...”
아르벨라는 빨대 끝 부분을 물고 얼굴을 붉힌 채 눈만을 들어 유천을 부끄럽다는 듯 쳐다봤다.
“우유가 들어 있는 게...전에 당신께서 주신 사탕과 맛이 비슷해서...오히려 더욱 만족스러웠어요...그리운 맛이었거든요...”
“...네가 원한다면 이런 건 언제든 먹을 수 있지 않아?”
“그런 건 의미 없어요.”
“왜?”
“당신께서 주신 게 아니니까요.”
“......”
설마 저런 말을 저렇게 직설적으로 할 줄이야.
부끄러움과 여러 복잡 미묘한 감정에 유천은 실룩이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미묘한 간질임이 속을 긁었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겠지. 이런 일상 같은 대화가 아쉽기는 했지만, 다음으로 나아갈 때다.
“아르벨라.”
“네?”
“지금 내가 궁금한 게 많아.”
내가 떠난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회귀해서인 건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며, 나는 어떻게 알아봤는지까지.
“시간은 얼마든지 들어도 되니까. 전부 말해줄 수 있겠어?”
“...좋아요. 저도 해드릴 말이 많으니까요.”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 시작된 유천이 이 세상에 불려 오고 난 후 끊어진 시간을 살아간 아르벨라의 이야기는 지평선 너머로 반절 넘어갈 때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니까...세상은 멸망했고, 그런데 거기서 창조주가 나타나 너를 직접 회귀시켜줬다고...?”
“네.”
“그리고 내가 올 것도 알았으며, 가면 나를 알아볼 거라고 했고?”
“네.”
“그게 무슨...”
라스트 레거시의 게임 GM과 창조주 간의 관계에 대해 고심한 적은 있었다. 유천을 이 세상에 떨어뜨린 GM과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창조주가 유천이 이 세상에 떨어질 것은 예언한 이상 그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게 되었다.
‘도대체 그 둘은 무슨 관계지...’
동일한 존재 같지는 않다. 창조주의 예언은 본인이 그런 일을 벌인다고 하는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마치 일어날 사건을 입에 담은 것 같다고 할까?
하지만 둘 다 이해를 넘어선 어떠한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만큼은 확실할 거다.
“그럼 아르벨라 베렌듀크는 왜 멸문시킨 거야?”
“...혼내시는 건가요...?”
“아니 네가 전생에 어지간한 귀족들에게 어떤 견제를 받아왔는지 얼마나 놈들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밑에 있던 자가 머리 위에 오르는 걸 용납하지 않는 것이 기득권이라는 족속이지만, 제 고귀함을 논하는 귀족들은 그중에서도 지독하다.
“하지만 베렌듀크는 그런 귀족들과는 결이 달라, 네가 원한다면 충분히 괜찮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건데,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대할 필요가 있었어?”
수천 년 전의 최초의 용사이자 베렌듀크 가(家) 초대 가주 레온 베렌듀크.
원초(??)와 누가 더 가까운가. 그것이 당시의 전장을 지배하던 개념이었기에 레온 베렌듀크의 등장은 중앙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낳았다.
그는 일개 마을 촌부의 아들이라는 몸으로, 용인족과 거인족 같이 날고기는 혈통을 타고난 자들을 제치고 중앙세계에 정점에 선 인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능력지향주의에 가까웠다. 실제로 회귀 전의 아르벨라와 귀족들이 충돌할 때 그들은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음...그걸 설명해 드리려면, 당신께서 사라지고 난 후의 이야기가 필요할 거 같아요.”
“이후의 이야기?”
“베렌듀크가 중앙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아시지요?”
“절묘하지.”
능력지상주의에 초대 가주가 평민이다. 그것은 민중의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게 한다. 수천 년 전이면 모를까. 지금 와서는 권력과 명예를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귀족으로 귀족들의 경의를 얻는다.
민중과 귀족. 양립 불가능한, 극과 극의 사이에 선 가문. 그것이 베렌듀크 가(家)다.
“동시에 애매해져 버렸죠. 이유가 뭘 까요?”
“...Top 5?”
“맞아요. 중앙세계 역대 최강의 시대라고 불리게 한 주역들. 초대 베렌듀크의 가주와 같이 이질의 재능을 타고난 절대자들이 무려 다섯이나 존재해요. 그것이 초대 베렌듀크에 대한 환상을 옅게 만들었죠.”
“설상가상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베렌듀크의 힘은 줄어들고 말이지. 그렇군. 적폐가 되어버린 건가?”
“네. 저는 그렇게 될 바에 놈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걸 선택한 거고요.”
“애매한 동맹 따위로 눈치를 볼 바에는 스스로 휘두르겠다는 거였나?”
그래 이게 아르벨라지.
착각하면 안 된다. 유천의 앞이기에 고분고분한 거지 수많은 경험으로 삭막해진 그녀의 본질은 패도(?)에 가까웠으니까.
“질문이 끝나셨으면, 저도 뭐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올 것이 왔나?
유천 자신에게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할지를 예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유천은 아르벨라의 미묘하게 빛나는 눈을 쳐다보며 해줄 말과 하면 안 될 말을 머릿속으로 정돈했다.
“당신께서는...이곳에 오기 전에...어떤 분이셨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