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아르벨라(3)
* * *
“뭐지...?”
벤티 사이즈의 초코음료를 손에 쥔 채 영화관으로 입장한 유천은 전신을 스치는 미묘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작은, 퍼뜨려놓은 물리력의 실낱같은 요동이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할 기괴한 기분.
아니 기분만이 아니다.
한 번 인지하기 시작하자 눈에도 보이는, 마치 게임 내에서 프레임 드랍이 일어난 것 같은 미세한 끊김 현상에 영화관 좌석에 앉아 주변을 차분히 둘러봤다.
‘나만 느끼는 건가...’
팝콘을 나눠 먹거나 영화 평점을 보며 재미를 예측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어색한 현상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착각...일 리는 없고...’
오직 유천에게만 보이고 느낄 수 있는, 사방에 퍼뜨려놓은 무수한 물리력의 실들이 현을 치듯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으니 착각은 아니었다.
개념의 영역에 닿은 몸에 적응하는 것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한 유천의 정신은 세상 본질의 이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무언가에 대한 징조거나 그게 아니면...
‘이미 일어난 뭔가에 관한 결과라는 거지.’
유천의 머리에 떠오르는, 시공을 흔들고, 개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두 가지. 차원을 흔들 정도의 막대한 에너지가 차원과 충돌하였거나, 아니면 또 다른 개념이 개입했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첫 번째는 아닐 거다.’
차원을 흔드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대륙판을 흔들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거나, 북한산 사태를 몇십 배 뛰어넘는 다중 던전 아웃 브레이크, 아니면 핵폭탄 같은 전략 병기 수백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야 그게 가능할 건데, 그랬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는 없을 테고.
‘그럼...누구지...?’
지구에 차원에 영향을 미치고, 개념을 건드릴 수 있을 정도의 누군가 있다는 좆 같은 결론에 유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검은 선자들의 성자, 성녀? 아니면...그 위의 교황이라도 직접 왔나? 아니 흉셩의 별들 중 누군가 왔을 수도 있겠군. 호벨 골디언은...아니겠지. 그 신중한 영감탱이가 이렇게 움직일 리는 없고.
그리고 유천의 뇌리를 스치는 여러 인사들이 악연을 쌓은 미래의 적들로 귀결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어떻게 움직일지 장담할 수 없는 광인들의 집단인 흉성과 검은 선자들은 거기서도 가장 요주의 집단이었고 말이다.
“젠장...일어나 봐야겠어.”
프레임 드랍 같은 현상은 끝났고, 불이 꺼진 영화관에서 광고가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이 불길함을 무시하고 휴식을 취하기에는 여의치 않다.
그렇게 엉덩이를 떼려는 찰나.
“잠시...실례할게요.”
머리 위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미성에 고개를 든 유천은 눈을 부릅떴다.
검은 머리에 옅은 붉은빛이 감도는 눈을 지닌 여인. 어두운 영화관 실내.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비치는 윤곽만으로도 몇 없을 미녀였지만. 유천이 경악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개념이...비틀려...?’
개념은 현세가 아닌 추상 영역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물리법칙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같은 세상에서도 다른 위상에 존재하는 거울 세계처럼, 유천이 퍼뜨려놓은 힘의 개념은 그의 의지가 깃들지 않는 이상 물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투과하는 것이 정상이다. 실제로 유천이 거미줄처럼 퍼뜨려놓은 힘의 실은 다른 관객들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여자만큼은 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돔을 뒤집어쓴 듯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빗겨나가고 있었다.
“저기...”
“예?”
“잠시 비켜주실 수 있나요?”
“아, 예.”
겉으로 보기에는 살짝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곤란한 것처럼 눈을 바르르 떠는 미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왜일까.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유천은 저 공손한 어투와 무언가 조심스러운 태도가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무심코 생각했다.
다리를 당겨 공간을 만들어주고는 무릎과 앞좌석 사이를 지나가는 여자의 옆모습을 음료를 들어 눈을 가린 채 유심히 지켜봤다.
“응?”
그러나 자신의 옆자리에 털썩 앉자 유천의 입에서 무심코 의문이 담긴 소리가 새어나왔다.
“저기.”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쪽 분 자리가 여기입니까?”
“어? 여기가 G열 18번 맞지 않나요?”
“...맞긴 합니다만...”
유천은 주변을 둘러봤다. 넓은 규모에 비해 한산한 내부 공간.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관객의 수는 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럴 수밖에. 모낭소리는 유천이 이 세상에 불려 오기 전 지구에 이름도 형식도 비슷한 영화가 있다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흥미가 생겨서 고른 마이너한 장르의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였다.
한마디로 자리가 넘쳐난다는 거였다.
‘그런데 굳이 이 많은 자리를 두고 하필 내 옆자리라...’
분명 매표소 직원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혼자 온 손님에게 붙어있는 자리를 줄 리가 없을 텐데...
의심은 점차 깊어져 간다. 아니 확신하기 시작했다고 봐야 맞겠지.
유천만이 인지하고 구축할 수 있는 개념 세계를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아니 스스로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은 채 비틀고 흘리는 여자가, 하필 이런 마이너한 영화를 보러 와서, 옆자리에 앉는데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둔한 거다.
거기에...그걸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고.
광고가 꺼지고 슬슬 영화 인트로가 올라오기 시작했음에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눈으로 유천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확실한 거겠지.
유천은 좌석에 머리를 대고는 심해와 같이 가라앉은 눈을 정면으로 향하고는 천천히, 그리고 경계심을 숨기지 못한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누구야?”
*
“너...누구야?”
유천이 자신을 한껏 경계하고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시작했을 때, 아르벨라 또한 그에게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단해...’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보인다. 감추고 퍼뜨렸음에도, 숨길 수 없는.
일개 개인의 육체가 지녔다기에는 믿기지 않는, 하나의 개념으로 화해 버린 파괴적이면서도 묵직한 힘의 고동(??)이.
불안과 의심은 줄어들고 확신과 기쁨이 가슴에 차오른다. 미숙하고 엉성하지만, 심상을 넘어 자신만의 확고한 사상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하는 이 남자가 그분이 아니라면 이런 차원에서, 누가 이 ‘아르벨라 반 엑시르’의 신이라고 칭할 수 있겠나?
타인을 아니 적을 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어투에 살짝 서운한 감은 없잖아 있었지만... 일부러 계(?)를 흔들었다는 점에서 그녀가 의도한 것이기에 넘길 수 있었다.
덕분에 이런 관심을 받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심증은 확고했지만, 아르벨라는 확실한 증거를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큼큼...
헛기침으로 떨리는 긴장을 눌러 내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저기 혹시...저희 어디선가 본 거 같지 않나요...?”
“뭐...?”
아르벨라의 맥락 없는 뜬금없는 말에 유천의 표정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너무도 흔해 빠진 유치하고 촌스러워 이제는 어디 만화나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이성을 꼬시기 전에 내뱉는 대시와 닮아있었다.
처음 본 아름다운 미녀가 고혹적인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한다면 안 넘어가는 남자가 없을 테지만, 이미 미인에게 익숙해진 유천의 표정은 더욱 차가워져 갔다.
“헛소리하지 말고 물음에나...”
“소도시 델라딘.”
“...너...방금 뭐라고...?”
“그곳의 용병 위무 시설에서 일하던 창녀에게 한 명의 딸이 있었어요.”
“......”
말을 끊고 흘러나온 이야기. 초면인 사람에게 할 만한 과거사는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의 도입부를 들은 유천의 눈빛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중앙세계 북방에 위치한 소도시 델라딘.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가 마지막으로 남은, 라스트 레거시 10년 겜창 인생에서 가장 애정을 쏟아 부은 자신의 본캐인 한 소녀의 이야기가 시작된 도시였으니까.
“시간이 지나 성인식을 치른 그 소녀의 운명은 그녀의 어미와 마찬가지로 비참할 예정이었답니다. 하지만.”
아르벨라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타고 올라와 손등에 닿았음에도 유천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 여자의 입을 타고 나온 이야기는 그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으니까.
“그 소녀는 제게 내려온 구원자에 의해 운명을 개척할 힘을 부여받았어요.”
그 이후 여자의 입에서 오래도록 흘러나온 한 소녀의 모험담은 건조한 사실의 나열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지루한 일기에 가까웠다.
포주를 패고 소도시를 탈출하여 펼친 치열한 추격전.
강해지기 위해 보물과 기연을 찾아 떠난 가슴 설레는 모험.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 소녀의 곁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는 동료들.
그러나 동료인 줄 알았던 자의 배신으로 살기 위해 숨어든 던전에서의 생존 극까지.
입담이 부족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보고서에 가까웠지만.
“아...아쉬워라...벌써 영화가 끝나버렸네요.”
“어...?”
여자의 탄식에 정신을 차린 유천의 눈에 초첨이 잡히고 주변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영화는 끝이 났고,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쁘고 따뜻한 손이 손등을 덮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눈은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영화 내용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알아차린다. 자신이 음료의 얼음이 녹아 밍밍해질 때까지.
영화가 끝이 나 막이 오르는 순간까지.
이 여자의 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걸.
유천은 고개를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려 여자의 얼굴을 훑었다.
‘...다르다.’
그녀의 머리는 저렇게 검지 않다.
그녀의 눈은 적색이지만 저렇게 옅지 않다.
무엇보다도...저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부정하는 건가...’
부정하고 싶겠지. 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무지에서 비롯되었다지만, 자신은 재미를 위해 여러 삶을 희롱하면서 살아왔다는 거니까.
‘그래도...받아들여야지. 뭐 어쩌겠어?’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나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어째서 엑시르일까?”
이번에는 아르벨라가 말을 잃을 차례였다. 기습적으로 나온 뚜렷한 증거에 그녀의 머리는 하얘지기 시작했다. 회귀한 이후 언제나 애타게 바라왔던 순간이 이렇게 다가올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야...이걸로는 부족해.’
더, 더 들어야 할 것이 있어. 좀 더 확실한...그러니...
“엑시르(Exilr). 본래의 성인 래서(Lexir)를 버리고 싶다고, 새로 만들어 달라는 여자아이의 부탁을 들어준 거였어. 본래의 성을 단어 몇 개만 떼어내서 그 배열을 바꾼 것에 불과한 성의 없는 성이었지. 그런데... 그 아이는 그걸 굉장히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어.”
“아...”
언제였을까? 자신의 사막처럼 메말라 비틀어진 눈에 이리도 습기가 차올랐던 적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머나먼 과거였지만 그 순간에 항상 같이 있어준 소중한 존재가 있었음을 잊지는 않았다.
“그래도...다행이라고 할까...만약 나를 기억한다면...원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원망했어요...
3일 밤낮을 지세어도 남을 말이 많았는데...이렇게 제대로 마주하니.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얼룩진 쓴웃음을 지으며 자상하게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니.
목이 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못 알아봐 줘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머리색을 바꾸고, 미묘하게 얼굴을 교정했는데 알아보는 게 이상하다. 진심이 담긴 사과를 듣자 지금까지의 모든 원망과 서러움은 씻겨나간다.
눈물은 오로지 슬픔만을 대변한다고 여겼는데,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듯 설움과 원망이 씻겨나간 자리에 행복이 가득 차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허나 아직 부족하다. 아직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소망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름을...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름을 불러주세요...
계시 따위가 아닌...그 목소리로...
회귀 전부터의 오래된 소망.
죽어도 되니까.
단 한 번이라도 이 고독함과 괴로움을 이해해줄 유일한 존재인 자신의 신이 다정하게 자신을 불러줬으면 하고 바라왔다.
그리고 그 소망에 화답하겠다는 듯 유천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아르벨라.”
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