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아르벨라(2)
* * *
평소의 냉철함조차 버리고 다급히 카페를 벗어나는 아르벨라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 유라는 곧 가라앉은 눈빛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위대한 주군께서는 도대체 뭘 그렇게 애타게 바라시는 걸까요...?”
네임드 빅대디를 무리하게 토벌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아니 주군 또한 알고 있겠지.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후...그래도 어쩔 수 없나요...”
이것에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그녀가 측근인 자신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토막 쳐버릴 거라는 걸 예감했기에 결코 알려고 해서 안 되었다.
‘거기에 그 모습은 마치...’
유라는 마지막에 본 아르벨라의 그 눈빛과 다급함이...사라진 정인을 찾은 사랑에 빠진 여인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그 생각을 지워냈다.
‘아니 설령 있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 돼요.’
아르벨라의 위대함과 맞먹는 존재가 아닌 이상 그건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치명적인 약점을 남겨놓기에는 자신들에게 적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유라는 한숨을 내쉬고는 아르벨라가 앉아있던 자리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주군...부디 옳은 선택을 하시길...”
*
후다닥 카페를 벗어난 아르벨라는 뒤에서 들려오는 부하의 애타는 목소리조차 흘러 넘기고 방금 본 것을 떠올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겠지?’
그녀가 특별한 무언가를 본 건 아니었다. 간편한 슬랙스에 흰 티를 입은 남자. 그것도 카페 건너편 음료를 들고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특별하게 다가왔다.
두근...! 두근...!
누구나가 별거 없다고 여길, 별다른 의미조차 지니지 못할 그 장면은 범인은 쳐다도 보지 못할 경지에 도달한 후, 어지간한 레전드급 네임드조차 뛰게 하지 못했던 심장을 미친 듯 뛰게 하였으니까.
무상(無?).
하늘에 닿은 무위는 타인과의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마치 하나의 구조물을 보듯, 자연으로 회귀한 것처럼 건조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게 하였다.
반고에서 말하는 신선이 이런 것이겠지. 하지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점차 옅어지는 감정을 붙잡기 위해 거칠고 본능에 따라 살아왔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하지만 아르벨라의 그러한 노력은 무상을 깨부순 한 남자에 대한 위대한 집착과 조급함이란 형태로 빛을 발했다. 이 널뛰는 감정은 분명 전장에서는 치명적으로 다가올 테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가웠다.
그날은 성인식을 치른 날 포주를 따라 한낱 창녀가 될 뻔했지.
싸구려 케이크를 먹었던 탓인가. 아르벨라는 잊고 있었던, 처음으로 진정한 신을 마주한 날을 떠올렸다.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던 일곱별의 저주. 그것을 해주하고 지배하게 할,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인외의 심법.
천살지멸.
그렇게 타고난 천형으로 나약했던 소녀는 신에게서 별에 저항할 역성(??)을 구원받아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힘을 얻었다.
그것을 받은 이후 자신의 특별함을 깨달은 소녀는 이딴 시궁창에서 벗어나라는 계시에 따라 포주와 양아치들을 때려눕히고, 세상으로 나왔다.
하지만 압도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능숙함과 힘이 그리고 내세울 배경조차 없는 아름다운 소녀의 앞에는 당연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이 펼쳐졌을 리가 없다.
재능을 질시한 무인들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덤벼왔다.
그 화사한 아름다움에 취한 빌런들의 탐욕이 그녀를 더럽히고자 하였다.
그 재능과 끝 모를 가능성을 해부하기 위한 마법사가 나타나고, 미래의 뛰어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씨받이로 만들려는 여러 세력들이 그녀를 차지하고자 했다.
계시에 따라 움직이며, 위기를 피하고, 수많은 선연을 쌓아왔지만 있었지만, 결국 그조차 완전하지는 못했는지 하나둘 괴수나 적대 세력들에게 죽어갔다.
‘힘들어요...신님...’
그렇게 마음이 깎여나갈 때마다 자신을 밝히는 별을 바라보며 울먹이면.
톡
언제나와 같이 연원 모를 사탕 하나가 그녀의 손에 떨어진다.
세월이 쌓이고 나이를 먹기 전부터 그녀가 위태로울 때마다 떨어지는 그 사탕에서는 말 한마디 들려오지 않았지만.
원망할 때는 미안하다는 것처럼...
슬퍼할 때는 같이 그 먹먹함을 나눠 가지겠다는 것처럼...
분노할 때는 힘내서 꼭 원한을 풀라는 것처럼...
점차 삭막해져만 가는 그 마음을 괜찮다는 듯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아파한 소녀의 곁에는 모두가 떠나갈 때에도 보이지 않는 빛이 함께 했다. 실패도 하고 실수도 했으니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시에서 느껴지는, 꼭 살아서 영광을 보기 바라는 마음만큼은 절실히 느껴졌기에 꺾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랭커에서 하이랭커 그리고 네 명의 절대자가 떠나간 땅 위에 새로운 유일한 절대자로 등극했을 때.
자신을 이끌어준 신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그 끝에 달했을 때.
풋풋한 소녀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렇기에 더욱 맹목적인 신앙만이 그녀를 지탱하는 그때.
신은 자취를 감추었다.
‘어째서...어째서...!’
잊을 수 없다. 갑자기 그 존재가 사라진 그때를. 상처가 굳어 애틋하게 남았던 추억이 절망으로 물들어 가슴을 공허하게 적시자 거무칙칙하면서도 질척거리는 무언가가 그곳을 메우기 시작한다.
위원회의 모든 군사권을 쥔 자리를 내려놓고 신을 찾기 위한 탐험의 끝에 도달한 창조주의 의지. 그때의 대담을 떠올리면 분명 무언가 사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물어볼 게 많아요...’
어째서 자신을 떠났는지, 어떻게 이 땅에 실존하여 모습을 드러냈는지, 자신을 어떤 생각을 하고 지켜봤는지, 그리고...어엿하게 자란 지금의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를...
‘그러니...이번에는 놓치지 않아요...’
틈 하나 내주지 않겠다는 듯 앞을 가로막는 인파 사이를 누구도 인지할 수 없는, 극(?)에 달한 유(?)의 기예로 일직선으로 돌파한 후 영화관 정문에 서서 심호흡했다.
“후우...후우...”
힘들어서가 아니다. 이미 무(?)라는 영역에서 한없이 극한에 도달한 그녀에게 인파의 흐름을 헤치지 않고 거스르는 건 눈감고도 할 수 있는 하찮은 기예에 불과했다.
‘맞겠지...? 아니면 어떡하지...? 아니 그 전에 회귀 전 본 그게 창조주가 맞기는 한가? 내가 농락당한 거라면 어떻게 하지...?’
불안감, 두려움, 의문.
만약 그가 자신이 찾던 신이 아니라면, 이 환희가 무효가 되고, 애타게 찾던 희망이 헛된 재로 돌아간다면...과연 자신이 지금까지의 인내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한서불침(???)을 넘어 천무(??)에 도달해 몸의 무의식마저 조절할 수 있음에도 미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손이 축축해진다.
‘아니다. 확실해. 그건 꾸밀 수 없는 거야.’
보면 알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이곳을 들어간 남자의 뒷모습을 봤을 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뇌리를 관통하여 가슴을 찌릿하게 만드는 이 직감은 외차원 태초의 몽마이자 27군주인 몽마의 여왕이라고 해도 설계할 수 없는 환상이다.
그렇게 다짐하고 마음을 확고히 한 아르벨라는 엘리베이터 옆 표지판을 바라봤다.
“매표소는... 8층...”
영화관 말고도 다양한 놀이시설들이 있는 건물이었지만, 남자 혼자 갈만한 건 그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확실할 거다.
띠링! 열리는 문에 들어서서 떨리는 손으로 8이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우웅 소리와 함께 서서히 올라가는 계기판의 숫자. 빠르지 않았으면 하는 불안감과 느리다 느끼면 숨통을 잡는 조급함에 아르벨라의 심정은 복잡해져만 갔다.
하지만 그녀의 심정과는 관계없이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가고, 엘리베이터는 8층에 멈춰 섰다. 소망의 땅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심정이 이랬을까. 떨어지지 않는 발을 내디딘 아르벨라는 천천히 광장을 둘러봤다.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영화관에 입장하는 여러 남녀들.
단체로 온 것처럼 보이는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무리.
팜플렛을 이리저리 바꿔 들며 뭘 볼지 고민하는 연인.
“아...!”
그 너머로 아까 본 청년이 매표소에서 직원에게 티켓을 발권해 받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아...”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에도 숨을 가쁘게 만드는 그 뒷모습에 점차 아르벨라 안에서 어떠한 확신으로 가득해지기 시작하자 그 눈에 일곱 색상의 빛이 차오른다.
성천안(???)
직원은 이미 모든 설명을 끝마친 상태. 무슨 영화인지 자리가 어디인지 듣기에는 이미 늦었다. 가서 강압적으로 물을 수는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신과의 첫만남에서는.
폭력적인 무신이자 위원회의 일좌, 흑경의 주인이 아닌.
과거 나약했던 소녀, 아르벨라로 남고 싶으니까.
한 차원 전체를 관측하고 조율하는 일곱별이 떠오르고 찰나의 점을 억지로 뚫고 벌린 후 잡아당겨 얇디 얇은 선으로 만들자...
치지직...!
세상이 흑백(?白)만을 남긴 채 잠에 든다.
이미 심상에 소우주를 넘어 확고한 정신세계를 구축한 그녀에게 찰나의 순간을 영겁으로 당기는 수준의 시간 조작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자이에르바 그 영감탱이에게 잔소리를 들을지는 모르지만, 그냥 짜증 난다는 듯 혀나 차며 시간선을 뜯어고치고 말겠지.
‘아쉽지만...지금은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미숙하고 나약한 차원은 이런 시간선의 변화에서 오는 사소한 파동조차 견디지 못하고 별의 흐름이 폭주할 수도 있었다.
그는 나의 유일한 구원일지도 모를 존재. 그런 그의 고향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자리에 서서 관측한다.
정신계 안에서 아르벨라의 눈이 그의 앞에 선 직원의 신체 전체를 해체하자, 그 안으로 뼈와 근육 내장 신경계 등 몸에 새겨진 한 인간의 역사가 까발려진다.
이제 무신이라고 불리는 그녀라도 제법 집중해야 하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과정 두 개만이 남았다.
‘이 경지에 도달할 때 깨달은 게 있지. 모든 것은 흔적과 역사가 남는다는 걸. 비록 아주 별 거 아닌 말이나 손짓, 시선조차도 말이야.’
입에서 내뱉어진 음파들.
사방에서 울린 소리에 섞이고 벽에 부딪혀 공명한 음파들 사이에서, 그 흔적을 더듬어 올라간다.
팔방을 관찰하며 매섭게 빛나는 그 눈빛은 마치 허허실실을 구분해가며 상대의 칼날을 맞받아치는 무인의 것과 닮아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하는 과정은 그딴 것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이건 아니고, 이거랑 저거. 그리고 저쪽은 아예 배제한다.’
온갖 소음이 뒤섞여 원형을 알 수 없는 소리의 파형 사이에서 필요한 것만 뽑아내는 그것은 완전히 섞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에스프레소 원액만을 다시 추출해내는 수준.
일개 무인들이 허허실실을 구분하는 건 한낱 아이의 장난질에 불과하다고 말할 아르벨라의 관측력과 판단력은 더는 기예가 아닌 권능에 가까운 신위(??)에 달해 있었다.
‘소리의 분류는 끝났다. 하지만 아직 하나 남았어.’
저 직원이 서 있는 공간 안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전부 인지하고 분별했다. 하지만 이 소리를 의미 있는 단어로 조합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과정을 더 거쳐야 한다.
치지지직......!!
아르벨라의 눈에 담긴 성천안의 빛이 더욱 강해지면서 3차원으로 보였던 흑백의 세상은 점차 하얀 선의 테두리와 흑의 면으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안에 흐르는 오로라 같은 다채로운 빛의 향연들.
누구나 물에 탄 물감처럼 천천히 퍼져 나가는 다채로운 빛의 물결을 본다면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겠지만, 아르벨라는 익숙하다는 듯 냉철한 눈빛으로 직원의 각막에 반사된 빛을 찾아 지나간 흔적을 하나하나 찾아서 머릿속으로 이어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다.
직원의 시신경에 남아있는 빛이 머물고 간 자취를 읽어낸다. 두 가지 흔적을 대조하여 안광이 향한 경로를 확정한 후 의미 있는 지점들을 솎아낸다.
‘시작은 정면, 그리고 13.19도 아래 좀 있다가 21.48도 14.24cm 오른쪽 위. 37.21도 59.12cm 오른쪽 아래 마지막으로는... 다시 정면.’
유의미한 네 개의 지점들. 손님을 받을 때 정면을, 그리고 영화를 고르고 표를 뽑는 것까지가 두세 번째 지점들 그리고 표를 건네주는 걸로 마지막.
거기서도 지금 가장 필요한 정보가 있는 건 두세 번째 중간지점들이겠지.
이제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잘 단련된 무인들조차 시선이 향하는 곳을 중심으로 행동하기 마련인데 한낱 일반인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골라낸 음파의 세기, 입의 향했을 각도, 성대의 움직임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합일시킨 결과...
‘영화 이름은...모낭소리? 특이하네. 시간은 세시 삼십 분, 좌석은 G열 17번.’
원하는 정보를 모두 뽑아낸 아르벨라가 성천안을 해체하자 멈췄던 세상이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고, 멈춰 있던 세상이 재생되면서 온갖 소음들이 들려온다.
“머리 아파...오랜만이라 그런가?”
그녀는 지끈거리는 눈을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옆에 붙어서 그가 정말로 자신이 오래도록 찾아온 존재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만 남았다. 이걸로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는지 아니면 제로로 돌아갈지 알 수 있을 테다.
제로가 된다면...
‘그래도...참아야겠지.’
미쳐 날뛸 수는 없다. 그랬다가 자신의 신에게서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테니까.
거기까지 마음을 확실히 단단히 한 후 시간을 확인했다.
15:28.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아까 그가 있던 직원 앞에 섰다.
“어서 오세요. 어떤 영화...”
“모낭소리 세시 삼십분 G열 18번으로 주세요.”
“어...혼자 오셨으면 빈자리로 안내해 드릴...”
“괜찮아요.”
분출할 듯 억눌린 긴장감으로 딱딱하지만, 동시에 여지껏 바라왔던 소망에 도달한 자의 기쁨과 기대감에 붉게 물든 그녀의 미소는 마치 첫사랑과의 첫 번째 데이트를 하는 여자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일행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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