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정수의 주인
* * *
발토의 이름으로 인천에 새로 증축한 고급 아파트. 유천은 자신의 명의로 등록된 아파트 꼭대기 펜트하우스의 소파에 앉아서 앞으로의 일에 대한 진행방향을 고민했다.
라만과 그 아래 최정예들을 죽였다. 유천은 마사크레의 회장 호벨 골디언이 이번 손실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렇다고 바로 쳐들어오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유천은 곧 자신의 생각 중 하나에 큰 오류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아차 이마를 두드렸다.
“생각해보니...놈의 심장에 박힌 문장...그거 기밀이었지?”
정보의 격차. 내가 아는 것을 남이 모른다는 점은 무력의 차이 이상으로 치명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나는 호벨 골디언에 대해 안다.
호벨 골디언은 유천이라는 존재를 모른다.
나는 마사크레의 대부분을 안다.
마사크레는 발토를 모른다.
이 차이가 자신의 무력 이상으로 놈들에게 치명적인 비수가 될 수 있음에 유천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은 그 중심이 되는 핵을 가운데 두고 뿌리를 내리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터. 유천은 팬을 꺼내 종이 위에 두 개의 큰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안에 두 개의 이름을 적었다.
‘마사크레와 베렌듀크...이 둘이 가장 핵심이다.’
마사크레의 큰 기둥인 라만을 죽인 시점에서 유천과 호벨 골디언 사이에서 협상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인 베렌듀크도 빼놓을 수 없는 고려사항이었다.
그 둘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사건들이 하나둘 뿌리를 내리고, 연결고리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자 유천은 하나의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놈들은 분명히 공격해온다.’
하지만 라만은 회장인 호벨에 비해 그렇게 떨어지는 실력자가 아니다. 거기에 그들에게는 지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있는 땅. 절대 그는 자신만의 세력을 이끌고 혼자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유천이 아는 호벨 골디언 그 영악한 호랑이가 확신할 수 없는 일에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
협력자가 있을 거란 생각에 종이에 그린 보다 작은 여러 개의 동그라미를 노려봤다.
‘반고, 검은 선자들, 흉성 그리고 베렌듀크의 방계들과 그 나머지 세력을 흡수한 저항군. 대강 틀은 잡히네.’
고작 영무문 따위로 반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베렌듀크의 방계? 배부른 돼지들이 정통성이란 이름을 차지하기 위해 모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의 이름이 적힌 동그라미에 엑스 표시를 한 유천은 탁자를 탁탁 두드렸다.
‘여기서부터 막히는군.’
이 셋은 유천이 있는 발토를 공격할 이유와 힘이 세력들. 거기에 짜증 나게도 죄다 중앙세계의 5대 빌런 단체라는 점이 유천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이 미친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분명 이들 중 마사크레와 협력하는 놈들이 있을 테지만, 어떤 방식으로 쳐들어올지 병력 구성이 어떻게 될지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지닌 이성의 합리를 넘어선 비합리적인 광기를 생각하면 막말로 그 수장이 미친 척하고 넘어올 수도 있었다.
이래서 더 많은 고급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강대한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랬다면 좀 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었을 테니까. 아직 본격적인 흐름에 타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에 유천은 혀를 찼다.
“그래도 이쪽이 먼저 선수 칠 수는 있겠어.”
놈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확실한 거는 하나 있었다. 호벨 골디언은 절대 자신이 확신할 수 있다고 여겨질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계획을 앞당겨야겠군.”
유천은 가지고 있는 두 가지라면 적어도 해방군과 용병계를 흔들고 호벨 골디언의 활동을 위축시켜 그 사이에 방비를 단단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여기부터는 자신의 생각만으로 판단할 게 안 되었다. 아직 며칠 정도 더 머무를 엘리스와 그리고 발토와 날개의 중추 인원들을 모아서 의견을 나눠 봐야 할 거라고 생각한 유천은 종이를 구겨서 태우고는 시계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을 텐데...”
그 말과 동시에 밖에서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은은한 조명 사이로 부드러운 천을 쓰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조금 늦었나요?”
이지연. 언제나처럼 단정한 차림을 한 그녀가 유천의 앞에 공손히 기립했다.
“아닙니다. 지연씨 때마침 잘 찾아오셨어요.”
“아...네.”
이지연은 은은하면서도 왠지 야한 빛의 조명에 둘러싸인 펜트하우스 거실을 둘러보며 그날이 생각이 나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잠시 거기 앉아 계시겠습니까? 마실 것을 준비해오죠.”
“아! 아니에요! 유천씨는 앉아 계세요. 제가...”
“하하 아닙니다. 지연씨가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걸 모두가 아는데 이런 것까지 부려 먹으면 제가 욕을 먹습니다.”
“누가...설마! 저희쪽에 유천씨를 욕하는 사람이라도...!!”
“아, 아닙니다. 그냥 농담한 겁니다. 농담.”
이지연은 자신을 웃으면서 만류하며 부드럽게 팔짱을 껴 소파에 앉히는 유천의 모습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음을 느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음란한 자세로 보지를 빨린 경험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섹스를 해보지 못한 그녀는 한껏 붉혀진 얼굴을 보이기에도 부끄러워하는 숙맥이었다.
‘으...내가 무슨 생각을...’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난 사건이었지만, 그날 끝까지 가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도리도리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진정하자...분위기 때문이야.’
그렇게 이지연이 라벤더 향기와 매력적인 남성의 체향 그리고 은은한 조명 때문일 거라고 마음을 다독이며 심호흡을 하는 사이 유천이 두 잔의 커피를 들고 와 각각 자신과 그녀 앞에 놓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으음...제가 여기 살 게 된 지 겨우 1주일 채 안 돼서 찾아보니 이런 것밖에 없네요.”
바쁜 일상에 실제로 자는 것 말고는 잘 이용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펜트하우스라니 대접할 만한 무언가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고작 믹스커피밖에 없어 유천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 죄송해요. 다음에 이것저것 좀 채워놓으라고...”
“아닙니다. 사과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니 일단 그 폰은 내려놔요.”
자신의 말에 곧바로 발작하듯 폰을 꺼내는 이지연을 말렸다. 저대로 놔뒀다가는 지금도 반쯤 구르고 있는 날개의 직원들의 업무가 늘어날 거였으니까. 유천은 그 힘을 정말 필요한 곳에 썼으면 했지. 고작 이런 자잘한 일에 쓰기를 바라지 않았다.
‘정말...언제까지 이럴 건지...’
유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이지연을 쳐다봤다.
양하연이 조심스럽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한다고 한다면 이지연은 자신과 단 둘이 있을 때 항상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마치 버려진 유기견이 새로운 맞이한 주인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끙끙대는 것처럼 미움의 요소가 조금이라도 감지된다면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했다.
극심한 애정결핍.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음을 닫은 여자의 애정은 유천의 마음을 상당히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걸로 저걸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겠지.’
괴물로 변한 라만에게서 나온 뇌의 정수. 유천이 이지연을 자신만의 장소로 데려온 이유 또한 이것을 주기 위해서였다. 적당한 인센티브였으면 모를까 이 정도 천고의 보물을 한 집단의 수장이 개인적으로 부하 한 명에게 넘겨주는 모습은 그 집단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우니까.
거기에 애정결핍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명확히 인지시키는 것. 유천은 이걸로 저 불안정한 애정결핍 또한 해소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질적이고 계산적인 이유였지만 그것이 뭐가 나쁜가? 그걸로 그녀와의 관계가 진전될 수만 있다면, 이지연이라는 사람이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유천은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화제를 돌려놓고 조금 있다가 주자.’
“크흠! 지연씨. 엘리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 네 일단 엘리스님께 날개가 관리하는 호텔 한 층을 통째로 내어 드렸습니다. 일단 모레까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시니까요. 그리고 입국에 대해서는 협회장님과 얘기를...”
유천의 의도대로 이지연은 업무 이야기가 나오자 머리에 무슨 스위치라도 있는 듯 딴사람이 되어 침착하게 하나하나 보고하기 시작했다.
“......부산을 정리하는 것이라면 이미 준비를 완료해놓은 상태이고 거기에 엘리스님의 지원도 있으니...”
“지연씨.”
“걱정하지 않으셔도...네?”
“이거 받으세요.”
그렇게 30여 분 가량 보고를 가만히 들으며 건네줄 타이밍을 재고 있던 유천은 이지연에게 정수를 건넸다.
“이건...?”
“뇌(雪)의 정수. 이번에 얻은 최고의 전리품 중 하나입니다.”
이지연은 손을 통해 고절한 힘과 그 안에 담긴 무수한 마력 운용을 느끼며 이것이 만져보는 것조차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보물이라는 걸 깨닫고 홀린 듯 푸른 구체를 바라봤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그녀는 곧장 고개를 붕붕 저으며 유천에게 손을 뻗었다.
“아,아아 안 됩니다. 이건 제가 받을 수 없어요.”
“아니요. 지연씨 당신은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제가 전기 계통 마법사라서인가요...아니면 설마! 퇴직금...!”
“아니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퇴직금은 무슨 퇴직금입니까!”
유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려는 이지연의 어깨를 붙잡고는 그 촉촉한 두 눈을 바라봤다.
“지연씨 당신이 퇴직하고 싶다고 해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제게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그, 그런가요...?”
“네. 당연하지요.”
유천은 여기서 당신이 없으면 날개와 발토는 누가 운영하느냐는 멋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며 기뻐하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자신은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건 그런 걸 떠나서 당신의 재능만을 보고 드리는 겁니다.”
“재능이요...?”
“예.”
“하, 하지만 저는 아직 5 위계, 즉 랭커 수준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지연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뭐, 뭘...”
“그게 당신의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
굳이 유천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그녀가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동시에 찢어 죽이고 싶은 어떤 여자의 얼굴이 머리를 스친 이지연은 입술을 깨물고는 몸을 떨었다.
‘미안하지만...어쩔 수 없어.’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잊으라고는 말할 생각은 없다. 눈앞에서 자신의 가족을 잔인하게 도륙한 상대를 어떻게 잊겠는가?
하지만 10년 전에 묶여 앞을 보지 못한다면 이지연은 영원히 그곳에서 멈춰 설 것이고 그러면 결국 그녀는 다시 홀로 남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유천은 그걸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연씨.”
“......네...”
유천은 살포시 무릎을 꿇고, 힘없이 멍하니 땅을 쳐다보는 이지연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마법사로서나 사람으로서 당신은 더욱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습니다.”
“...유천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아픈 말을 들은 이지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힘없는 모습보다 그게 보기 좋았던 유천은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요...?”
“제 눈, 그리고 저 유천이라는 사람의 감입니다.”
실제로 3차 초월의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유천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되찾듯 빠르게 성장해 지금에 와서는 범인은 볼 수도, 감지할 수도 없는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천의 눈에 보였고 인지했으며 판단했다. 이지연이라는 사람 안에 잠든 ‘힘’은 자신이 보아온 재능 넘치는 사람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걸.
“저를 전적으로 믿으세요. 지연씨 당신은 그딴 버러지 같은 빌런따위에게 묶여 있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유천이 말한 빌런이 누구인지 아는 이지연이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태생부터가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그런 하찮은 것에 맞춰서 낮추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런 쓰레기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사람입니다.”
아...으...거리며 어쩔 줄 몰라 그 푸른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이지연을 쉴 틈을 주지 않고 떠받드는 유천의 모습은 마치 세뇌를 하는 것 같았다. 너는 굉장히 고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유천은 이지연의 양손에 쥐어진 정수를 가슴팍에 안기면서 그녀의 갸름한 볼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을 살포시 닦아냈다.
“이걸로 강해지셔서 그년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발깁시다. 지연씨.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말입니다. 네?”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그 나름의 위로라는 걸 알아챈 이지연은 유천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 풋 웃었다.
“그래요...그렇게 할게요. 크롬벨...그 년을 꼭 제 마법의 실험 대상이 되게 할 거에요.”
“하하! 그래요. 그 마음입니다 지연씨!”
유천은 싱긋 웃는 이지연의 푸른 눈 안으로 피비린내 나는 짙은 살기를 느꼈지만, 악몽 속에 사로잡혀 공포에 떨 바에는 증오를 불태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말하지도 못했던 그 금기에 가까운 이름을 직접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 그녀는 한 꺼풀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저도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유천씨에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에이. 괜찮습니다. 지금처럼 함께 해주시기만 하면...”
“아뇨. 전 이런 걸 받았는데 가만히 있는 염치없는 년이 아니에요.”
이지연의 손끝에 마력이 깃들자 유천과 그녀 주변의 사물들이 드르륵 밀려났다.
“그런데 제가 유천씨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인 거 같아요.”
지금까지의 어리숙한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청순한 얼굴에 요염한 빛이 머물기 시작했다.
“그...지연씨...?”
처음 보는 이지연의 색다른 모습 탓일까. 유천은 사람을 홀린다는 그 달기와 같은 달콤 칙칙한 색기에 순간 압도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무스...웁!”
소파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지면서 머리를 감싸고 갑작스럽게 입을 맞추자 유천은 놀람에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지연은 입술 사이로 혀를 찔러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스로 처녀라는 걸 주장하듯 어색하기 그지없는 혀 놀림에 정신을 차린 유천은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싸고 리듬에 맞춰 함께 설육을 엮었다.
츄릅, 츕, 츄릅.
음란하면서도 질척한 소리와 흘러내린 검은 생머리에서 풍겨오는 레몬 향, 그리고 부드러운 허리와 골반의 감촉을 즐기다.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내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아, 하아, 하아.”
지적이면서 청순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곳에는 수컷을 바라는 얼굴을 한껏 붉힌 암캐만이 남아있었다. 입술 주변에 나 있는 침 자국들은 더럽다기보다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야하게 느껴졌다.
“하아, 하아...유천씨.”
“네?”
“그날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합니다.”
이지연이 벌을 받으러 온 날이자, 황금새 빌딩이 테러당한 그날. 아마 그때를 말하는 거겠지.
“저...지금 그때랑 똑같이 입었는데...”
이지연의 말에 유천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그녀의 모습을 훑었다.
‘진짜네...’
검정색 팬티스타킹, 그 위로는 짧은 오피스 치마 거기에 가슴을 부각하는 딱 붙는 하얀 와이셔츠까지.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고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변태적인 마조 취향까지 말이다.
"설마 올 때부터 그걸 기대하고 오신 겁니까? 지연씨는 여전히 변태군요."
“히잉...♥그런 말 하지 말고요. 그럼...그날 마지막에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시나요...?”
“...기억합니다.”
나중에, 이어서 해주겠다는 그 말. 어찌 기억 못 하겠나?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그렇게 야하게 한 말을 말이다. 그저 시간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
“저 내일 오전까지는 스케줄 비워놨는데...”
파직 이지연의 손끝에 전류가 깃들더니 와이셔츠의 단추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저번에도 봤지만, 예상보다 큰 가슴에 그것을 감싼 검은색 고급 속옷, 그 아래로 예쁘게 휜 허리와 일자로 살짝 드러난 복근과 스타킹에 반쯤 가려진 앙증맞은 배꼽까지.
사방에 플라스틱 쪼가리들이 나뒹구는 소리를 들으며 유천은 눈앞에 나타난 절경을 감상했다.
“오늘...이어서 할래요~?”
“그때도 느낀 거지만 지연씨 당신은 참 야하군요. 처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요. 설마 저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그렇게 유혹하는 겁니까?”
"하잉...아니에여...저는 유천씨뿐이라고요...♥"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자신을 유혹하는 이지연을 유천은 아무 말 없이 들어 올렸다.
“하앙~♥”
그러자 도저히 그녀의 입에서 나올 거 같지 않은 야한 앙탈음이 들려왔다.
“이런 자세...부끄러워요~♥”
흔히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겨진 이지연은 그것이 부끄럽다는 듯 그러면서도 그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 얼굴을 가렸다.
“뭐가 부끄럽습니까?”
“네에...?”
담담한 유천의 어투에 의아해져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지만, 곧 이어진 말에 이지연의 얼굴은 이보다 더 빨개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터질 듯 붉어졌다.
“곧 이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을 할 텐데요. 변태인 당신이 원하는 그걸 말이죠.”
“그, 그런...저는 변태가...후웁...후응~♥”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그녀는 몸을 비틀며 반박하려고 했지만,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는 유천에 의해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츄릅...츄웁...
그렇게 잠시간의 키스 후 유천은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지연씨.”
“하아...하아...녜에...?”
“저를 유혹한 책임을 지세요.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지 않습니까?”
그때 이지연은 자신의 등을 긁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 자지...’
바지와 속옷에 가려져 있었음에도 그 거대한 고기 기둥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다리를 모았다.
‘저, 저게...내 안으로...’
겁이 난 건지, 흥분한 건지 저것이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는 상상만으로 이지연의 음부는 떨면서 당장에라도 준비를 마치겠다는 듯 짙은 애액을 내뿜었다.
“오늘 잠 잘 생각 버리세요. 아시겠습니까?”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였지만, 결국 하루 종일 섹스를 하겠다는 의미.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처녀임에도 그에 더욱 흥분한 이지연의 자궁이 떨려오고 애액은 팬티를 넘어 스타킹마저 적시기 시작했다.
“녜, 녜에...♥”
몽롱한 표정으로 혀 풀린 이지연의 말과 함께 쿵 침실 문이 닫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