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하이랭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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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랭커. 하나하나가 허투루 상대할 수 없는 그 절대자들 중 가장 귀찮은 상대를 꼽자면 유천은 단언할 수 있었다.
자연계 초능력자, 그것도 세상에 닿은 하이랭커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 종(?)을 벗어난다. 그것이 유천이 라만을 보고 당혹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다. 놈들의 그 끈질긴 생명력은 유천이라도 완전히 죽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았으니까.
으드드드...
뼈와 근육 그리고 내장과 살점이 뒤엉켜 마력회로 또한 하나로 합쳐지면서, 동시에 지성과 본능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하지만 지성을 잃더라도 세상과 동조할 수 있는 심상의 깨달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에 라만은 전류 계통의 초능력자.
파지지지지지직!!
대기와 바다가 동조하여 인간의 형상을 잃고 점차 그 부피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지.”
우어어어어어!!
유천은 여섯 개의 팔에 각각 창을 쥔 푸른 거인을 고개를 수직으로 들어 올려다봤다.
정령화.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참 잘 지었다. 저 정도의 자연계 능력자가 저렇게 폭주하기 시작하면 이성을 잃은 정령왕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주인의 힘에 따라 분해되어 각 창을 감싸면서 회전하는 블루 스케일의 파편들까지.
거신이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은 거인이 증오를 담은 소리를 내지르며 유천을 향해 번개의 창을 던졌다.
콰아아아아아앙!!
빛과 같은 빠름을 잃은 대신 공기를 깡그리 불태우며 묵직한 기세로 날아오는 창을 향해 유천은 오른손을 뻗었다.
“이봐 더 부수면 곤란해.”
기둥만한 창. 그 안에 담겨있는 힘의 크기로 봤을 때 저게 떨어지면 기껏 정지시켜놨던 발전소들이 연쇄적으로 모조리 터져나갈 것이었다. 그 폭발은 에너지 파이프와 전선을 타고 부산 전체로 퍼져 나가 생각지도 못한 사상자를 낳게 될 게 뻔했다.
끄드득...
오른손 다섯 손가락 마디가 천천히 굽혀지자, 유천을 중심으로 인력이 뒤틀리기 시작하며 공기마저 지우며 날아오는 창이 요동친다.
“넌 실수했어.”
세계와 동조해 힘의 크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자연에 한 걸음 다가가 좀 더 전기력에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놈은 사냥꾼으로서의 지성과 경험을 잃었다. 유천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힘의 크기가 아닌, 찰나의 빈틈을 찌르는 하이랭커로서의 경험과 날카롭게 제련된 무(?).
하지만 지금 날아오는 창을 보라. 시선을 분산시키는 전략도, 투창에 대한 어떠한 기예도 없었다. 그저 힘의 크기만으로 상대를 누르겠다는 괴수의 포악함 뿐.
그에 유천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감히 나에게 힘으로 대적하겠다는 거냐?”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이 드넓은 세계에서 유천은 단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오로지 힘 대 힘으로 붙는 정면싸움에서만큼은.
나는 천하무쌍(?下無?) 하다는 것을.
파지직! 공기를 태우는 소리와 함께 창극이 유천의 손바닥에 닿았다.
쿵
가진 부피와 힘의 관성만으로도 주변을 궤멸시킬 공격이었지만 폭발하지도 유천을 집어삼키지도 않은 채 조용히 울리며 손아귀에 쥐어져 정지한다.
‘관성도 전기력도 힘이지.’
닿지 않고 외부에 존재했으면 모를까. 이미 유천의 손에 쥐어진 힘은 모든 것을 그 육체 내부에 응축시킨 형용할 수 없는 개념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콰드드득...
내부로 압축 공명한 파동을 손을 통해 창으로 흘려 넣자, 비틀리고 부풀어 오르다 으깨져 소멸했다.
우어어어어어!!!
하이랭커로서의 명예와 힘 그리고 지성을 버린 괴물로 전락한 괴물은 이성을 잃었음에도 눈앞의 적에게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모든 걸 빼앗은 적에 분노했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저 악마에게 자신은 닿을 수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그리고 유천 또한 덜 완성되어 뭉개진 얼굴에 보이는 눈구멍 사이로 괴물의 마음을 읽었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응답해줄 이유는 없다.”
돈에 홀려 먼저 감히 자신의 앞마당에 기어들어온 놈들이다. 그런 놈들을 상대할 때 굳이 감성적일 필요는 없다. 최대한의 효율만을 당길 뿐이다.
“그리고 지금이 최고점이지.”
라만의 수하들에게서도 이득을 보았지만, 놈이 지닌 것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괴물이 되면서 가슴 안쪽에 전류의 결정체인 뇌(雪)의 정수.
거기에 본래의 블루 스케일을 넘어 폭주한 하이랭커의 힘에 더욱 강화된,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블루 스케일. 번경의 거미 때처럼 예상치 못하게 강화된 이득까지 보았다.
부산 내부는 분명 난리가 났겠지만, 이 일이 끝나면 엘리스의 지원을 받아 금방 복구가 가능하다. 마법과 과학이 섞인 세계에서 그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즉 더 이상 기다려줄 이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으어어어어어억!!
스스로의 운명을 깨달았는지 발악하며 괴성을 내지르는 라만이었던 괴물이 여섯 개의 팔을 휘둘러 찍어 누르러 하자, 오른손에 응집시킨 힘을 좌에서 우로 휘둘러 하체를 으깬다.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지만, 이미 육체를 탈피해 전기의 덩어리가 된 녀석은 순식간에 하체를 재생하고 상체를 세워 창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내리치는 거대한 기둥을 보며 유천은 인상을 썼다.
“끈질긴 새끼.”
지성체로서의 모든 걸 버리고 얻은 힘과 생명력은 고작 형상의 일부를 부수는 걸로 사라지지 않았다. 형태에 집중하면 안 된다. 놈의 힘 그 자체를 으깨야 한다.
유천은 육체 내부에서 생성한 파동을 나선으로 꼬아 압축시켜 주먹을 통해 방출시킨다.
파아아아앙!
대기에 물결을 그리며 송곳처럼 날아간 힘이 내리치는 창과 함께 팔을 날려버린다.
쿠오오오!!
하지만 금방 육체를 재생하고 이제 네 녀석이 뭘 할 수 있느냐는 듯, 유천을 향한 비웃음이 담긴 포효하며 나머지 팔로 짓뭉개려고 했지만.
움찔!
무언가에 막힌 듯 그 몸은 멈춰 섰다.
“궁금하군.”
유천은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실험용 쥐의 결과를 관찰하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한 채 부르르 떠는 거인을 올려다봤다.
“나는 멀쩡히 다루는 힘이지만 그걸 너도 견딜 수 있을까?”
체내에서 나선으로 꼰 파동을 유지하고 다루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에 대한 운용 아니면 그걸 견딜 수 있는 극한에 도달한 육체 둘 중 하나는 필수였다.
후자는 이미 완성된 상태인 유천은 팽팽하게 압축시켜 꼬아놓은 파동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없다면...
퍼엉!!
저 거인처럼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풀려버린 파동에 저렇게 안에서부터 파괴될 것이다.
쿠오오오오오오!!!
거기에 녀석은 힘의 덩어리. 유천의 파동은 일반적인 육체였을 때보다 지금의 상태에 더욱 치명적이다.
파바바바방!!
여섯 개의 팔들이 터져나간다.
복부가 끝없이 팽창한 후 파지지직 전기를 분출하며 폭발한다.
체내 곳곳으로 퍼져 나간 유천의 파동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재생을 억제한다.
쿠우우웅...
아까 같이 재생하지 못하고 터져나간 하반신에 제대로 서지 못하고 땅을 기며 꿈틀댄다.
“끈질긴 것아 이제 슬슬 진짜 끝내자.”
유천은 놈이 일어나기 전에 다가가 머리로 보이는 부분을 텁 집었다. 일반적인 랭커나 하이랭커라면 닿는 것조차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유천에게는 아니었다. 결국은 힘의 덩어리.
‘흩어져라.’
파지지지직!
유천은 직접 닿은 손을 통해 의지를 보내 전기를 흩어버리자, 푸른 안개가 만들어지고, 그 사이로 유천이 뚫은 통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우어어어어어...!
“시끄럽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독처럼 작용하는 파동에 용암처럼 기포를 터트리는 안개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 발악하지만, 유천은 라만의 사념이 담긴 전격을 맞으며 그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저거군.”
그 가운데, 사과보다는 큰 배만한 구슬이 둥둥 떠 있었다. 아마 저것이 뇌의 정수. 그것도 하이랭커이자 전류 계통의 초능력자의 모든 것이 담긴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천외지물(?外?物).
유천은 다가가 그것을 손에 쥐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만 둬!!
“뭐냐? 아직 의식이 남아있었나?”
짐승과 같은 순수한 본능만을 남기고 진즉 소멸했어야 할 라만의 의지가 약하지만, 아직 정수에 남아있었다. 아니 인간으로서의 흔적이었던 창을 들고 있는 괴물의 형상이었을 때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네놈!! 네놈이...!!!
“닥쳐라 패배자. 침탈하러 왔다면 모든 걸 빼앗길 각오도 했어야지.”
뇌의 정수에 대해 깨달은 유천은 알맞은 사용처를 생각해 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저런 사념 따위가 없는 완전히 순수한 상태여야 했다. 그러나 그걸 해결할 방법을 유천은 가지고 있었다.
‘이제 일할 때다. 나와라.’
지금껏 마력기관에 잠들어 있던 권능. 유천의 힘만큼이나 불합리하고, 절대적이며, 편의적인 그것이 내부를 쿵 울리며 유천의 몸 곳곳으로 뿌리를 내렸다. 점차 몸에 새겨지는 붉은 선을 따라 화륵 불이 솟구친다.
그리고 유천의 손을 타고 뇌의 정수로 옮겨붙는 불은 오로지 순수한 뇌의 기운만을 남긴 채 유천이 적으로 지명한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아 안 돼!!
당연히 거기에는 라만의 사념도 포함되어있었다.
“현계에 네놈이 있을 곳은 이제 없다. 그러니 네 형제와 딸을 따라 조용히 명계로 꺼져라. 라만.”
유원!! 유우우원원원!!!!
그렇게 유천의 가명을 울부짖으며 라만의 사념은 소멸했고, 그에 유천을 뒤덮은 뇌전의 구름은 한 차례 요동친 후 씌이이 정수로 빨려들었다.
그렇게 지상에서 치던 천둥과 번개들이 거두어지고, 방금의 싸움이 마치 꿈인 듯, 쏴아아, 전기력에 썰물처럼 밀려났던 바다가 되돌아오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유천은 몸에 묻은 굳은 피와 살점들을 툭툭 털며 라만과의 싸움으로 하늘의 구름조차 사라져, 내리는 달빛을 올려다봤다.
“허무하네.”
자신의 싸움은 언제나 그랬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든, 강하든,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든, 결국 처음부터 완성된 이 힘은 모든 걸 순식간에 분쇄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증명되었다. 어지간한 하이랭커들조차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부족하다.”
그렇다고 자만할 정도는 아니었다. 랭킹 Top 10, 그 중 가장 위 다섯, 드러난 전력보다 더욱 많은 중앙세계의 강자들. 그리고 그걸 넘어 외차원의 군주들과 괴수. 거기에 신수가 언급한 암중 세력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까지.
유천은 무력도, 세력도 그리고 권력도 정해진 타이머를 늦추기에 아직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이것들로 생각보다 빠르게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겠지.”
용병 랭커들이 입고 있던 마테리얼 슈트 그리고 아크원자로. 그리고 블루 스케일과 뇌의 정수.
이 정도라면 파괴된 항만을 죄다 허물고 다시 지어도 남을 자산이었다. 랭커 수준의 전력을 강화할 마도구란 구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뇌의 정수는 지연씨에게 주면 되겠어.’
자신이 봤을 때, 그녀의 재능은 양하연과 엘리스 파셀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랭커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를 붙잡는 과거의 망념.
전기 계통의 마법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그녀가 강화된 뇌의 정수를 취한 후, 크롬벨인지 뭔지 하는 빌런을 스스로의 힘으로 찢어 죽인다면 금방 주요 전력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다.
‘킬리언, 엘리스 파셀, 양하연, 이지연 그리고 카렌.’
어째 다 여자이긴 하지만 유천은 하이랭커, 거기서도 충분히 상위에 도달할 재능을 지닌 아군들의 이름을 머리에 새겼다.
‘적어도 이 다섯 명이 완성되는 날. 지구는 위원회 13석에 오를 힘을 가지게 될 거다.’
거기에 아직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위한 재료들은 많이 남았다.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나아가면 결국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다짐하며 유천은 고조된 정신을 가라앉히기 위해 폐허 가운데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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