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하이랭커(5)
* * *
검을 다뤄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의도치 않게 모든 걸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힘을 통제하고자 좀 더 나약한 도구에 기댔다.
하지만 유천은 몇 번 다루고 깨달았다. 토끼가 풀을 뜯어 먹듯, 사자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걸.
무슨 말이냐고?
무의미했다는 거다. 지금도 같다. 유천에게 필요한 것은 통제가 아닌 완전한 조율. 유천은 스스로 맨 헐거운 족쇄를 부수고 느릿하게, 일상적인 걸음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쿵...
옅지만 거대한 음이, 마치 보이지 않는 심구 해저에서부터 끌어올려 진 것 같은 묵직함이 유천의 발을 중심으로 깊은 곳에서부터 멀리 퍼져 나간다.
그리고 이어진 정권(??).
파리가 앉을 느릿한 속도로 뻗어지는 유천의 주먹을 중심으로 주변 풍광이 기이하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큭!”
눈을 감고도 피할 수 있는 하잘 것 없는 속도였지만, 빛을 강제로 굴절시키는 거대한 힘의 압박이 라만의 전기를 왜곡시킨다.
‘빌어먹을!’
닿지도, 스치지도, 아니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저 주먹으로부터 나온, 아직 채 발산조차 되지 않은 ‘힘’이, 어지간한 랭커들조차 뚫을 수 없는 자기장을 우그러뜨리고 침투하여 끝에는 라만의 전기를 왜곡하고 비틀어 마력을 역류시켜 내상을 입힌다.
하지만 그는 하이랭커급의 강자. 역류하는 마력을 붙잡고 조율하여 다가오는 주먹으로부터 피한다.
피하자마자 완전히 뻗어진 유천의 주먹. 그 주먹이 향한 방향에 있는 모든 물질이 소리 없이 분해되는 것을 본 라만은 창백한 안색으로 울부짖었다.
“어떻게-!! 이딴 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이냐?!!”
다가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불합리함. 라만은 가슴을 뒤흔드는 억울함에 하늘로 손을 뻗자, 빛 한 점 없는 하늘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쿠르릉...
창을 다룬다고 하지만 라만의 근본은 초능력자다. 거기에 창을 수행한 만큼 그가 익힌 마법의 경지 또한 낮지 않았다.
“죽어라!”
푸른 구름 사이로 무수한 불규칙한 선들이 유천의 머리 위로 모이자 대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들려온다.
한 개인 이상의, 세상 그 자체의 힘을 다루는 대기마법과 전류 계통 초능력의 융합기가.
견고하기로 유명했던 네임드 ‘아카티’를 죽인 자연계 초능력자의 절기가 두 마리의 용이 되어 하늘을 밝히며 유천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유천은 고개를 들어 하늘로 손을 뻗었다.
“그건 곤란해.”
저게 떨어진다면, 자신은 상관없지만, 발전소와 마석 정제시설이 폭주할 수도 있다.
거대한 힘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상상력과 그 추상을 확고히 하는 직관이 필요하다.
유천은 중지의 마디 끝을 세워 마력으로 그릇을 만들고 그 안에 힘을 담았다. 툭 노크하듯 가볍게 공중을 튕기자 물결을 그리며 무색의 구슬이 선을 그리며 치솟아, 두 마리의 푸른 용을 소멸시키고 끝에는 구름을 흩어버렸다.
파지지직
뚫린 하늘의 장막 사이로 시린 달빛과 전류의 잔흔이 대기와 공명하며 반사하는 빛이 유천의 눈을 푸르게 빛낸다.
“이...이...!!”
이럴 수는 없다. 자신의 절기는 저런 가벼운 동작 하나로 소멸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겨우 과거의 맹약을 끊어내기 위해 온 이런 외곽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자 억울함을 넘어 무력감과 절망이 라만의 마음을 차츰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주의를 팔면 안 되지.”
라만이 그런 생각을 하든 알 바 없던 유천은 마음에 담아뒀던 비아냥을 되돌려 주며, 손날에 무형무색의 힘을 집중시키고, 늘어뜨려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카가가각!!
“으윽!!”
라만이 단두대처럼 내려쳐 진 무형의 힘을 들어 올린 블루 스케일로 막아서 흘리자, 그의 옆 땅이 반듯하게 잘려나간다.
“커억!!”
하지만 마음이 흔들림으로 인한 대가는 컸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그것도 본능에 새겨진 기예가 그것을 빗겨냈음에도 근육과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뭉개져 피를 토해냈다.
“이사님!”
“이 개자식이!”
쓰러져 피와 내장조각을 뱉어내는, 신앙에 가까웠던 존재인 라만의 비참한 모습에 지금껏 기계같이 그의 명령을 들었던 랭커들이 어떻게든 시간을 벌겠다는 듯 유천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드디어 오는군. 날벌레들.”
유천은 10초 안에 나머지 랭커놈들을 죽일 수 으깨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고작 유천이 단 두 번 내지른 공격으로 더는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항만. 그 손실을 메꿔야 했다.
예를 들면 지금껏 라만과 유천의 충돌에서 버틸 수 있게 해준 걸로 추정되는 가슴팍에 박힌 원형의 마도구라거나.
영화에서나 본 아크 원자로 같은 저것은 하이랭커의 힘마저 어느 정도 상쇄해주고 있었다. 지구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신외지물. 유천에게는 쓸모없지만, 그 이외의 날개나 발토의 주요전력들에게 준다면 오늘 입은 피해 그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죽어!”
아크 원자로라고 명명한 저것들 모두를 회수하기로 마음먹은 유천은 소리를 지르면서 넘실거리는 권기를 내지르는 여자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으며 손을 뻗었다. 수십 개의 육각형 에너지 방어막이 유천의 손길을 막았지만, 일순간에 으드득 소리를 내며 으깨지고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이 잡혔다.
“꺄악!”
“일단 한 명.”
하이랭커인 라만의 힘은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 마도구의 흐름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가슴팍 가운데에 있는 이것이 모든 힘의 중심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유천은 그대로 그걸 뽑아냈다.
콰지지직!
“아아악!”
물론 그 과정이 섬세할 리는 없다. 유천의 우악스러운 힘에 마도구가 폭주하자 여자는 눈을 뒤집으면서 거품을 물고 바르르 떨더니 기절했다.
“레이나!!”
고함치는 랭커들 사이로 더욱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리를 친 상대는 유천을 귀찮게 한 갈색 머리의 염동술사.
유천이 고개를 돌려 본 그 머리카락색과 같은 갈색 눈에 담긴 감정은 애처로움과 다급함이었다. 아마 이 축 처져버린 레이나라는 여자와 저 염동술사는 가족이거나 연인이겠지.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각성자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충성심 이외 모든 게 거세된 기계인 줄 알았더니, 이 여자가 잡히자 아무런 공격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유천은 생각했다. 저 유대와 사랑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물론 인질을 잡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유천이 원하는 건 두려움을 넘어선, 증오와 원한과 같은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수렁. 그렇기에...
까드득!!
이 기절한 여자의 머리를 붙잡고 순식간에 비틀어 뽑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침묵에 잠기는 용병들. 거기에는 간신히 몸을 회복시키고 있던 라만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용병으로 살면서 잔인한 것들을 수없이 봐왔지만, 산 채로 머리와 함께 피와 내장조각들이 묻은 기다란 척추가 뽑히는 광경은 잔혹하며 이질적이었으니까.
“아...”
영원 같은 찰나 후 갈색머리 염동술사에게서 목을 긁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레, 레이나...?”
결혼을 약속한 연인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된 채 피를 쏟는 모습에, 염동술사 덴은 이것이 악몽 속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 무심한 악마의 환술에 빠진 것일 거라고.
‘그, 그래...꾸, 꿈일 거야...꿈이어야해...’
그걸 쳐다보는 동료들도 경외하는 이사님도 현실감 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분명 그럴 거다. 저것이 현실이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덴은 저 유원이라는 악마의 손에 붙잡힌 연인의 머리와 피를 쏟으며 좌우로 흔들리는 척추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머리가 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손을 위로 뻗고 있는 유원. 그것을 따라 시선이 이동한다.
“아...”
그리고 그 위로 공중에서 회전하며 자신의 앞으로 떨어지는 연인의 머리를 향해 덴은 멍하니 손을 뻗었다.
콰드득!!
“커억!”
가슴에 뜨거운 통증이 올라온다. 많이 경험해본 아픔. 관통상, 하지만 결코 나을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머리의 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덴은 경험해 본 것은 처음이지만 깨달았다. 아마 이것이 주마등일 거라고, 그러나 다가오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았다. 이미 삶의 의미가 떠나갔기에.
‘레이나...’
덴은 그저 피를 울컥 내뱉고, 이미 알고 있던, 부정하고픈 현실을 받아들이며 하늘을 향해 가만히 양손을 뻗었다.
콰직!
그리고 손에 연인의 흔적이 도달하기 전에 덴의 의식은 소멸했다.
“흠...”
염동술사의 심장을 뚫은 손을 뽑은 유천은 쓰러진 염동술사와 그 품에 안겨있는 머리를 본 후 다른 자들로 고개를 돌렸다.
“쿨럭! 이 미친 것이!”
과연 하이랭커.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현실감을 여전히 현실감을 잃은 랭커들과는 달리 금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 정도 베테랑들이 저렇게 넋을 놓을 정도로 이들 사이에 깊고 진한 유대가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그래도 이걸로는 안 된다.’
아직 사냥개가 사냥꾼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놈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서 불로 달려드는 나방이 되어야 한다.
“쓰레기에 머저리들이었다.”
무감정한 삭막함이, 동료에 대한 비정한 평가가 유천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랭커들의 눈이 서서히 유천을 향했다.
“사냥개 주제에 사랑을 하다니 분수를 알아야지.”
시선을 집중시킨 후 유천은 발을 들어 죽은 두 명의 용병의 머리를 짓밟았다.
퍼석! 퍼석!
“.........”
눈앞에서 죽은 동료의 머리가 담뱃불 지져 밟듯 부서지자 현실감을 잃은 눈에 격렬한 감정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안 된다!”
유천의 의도를 깨닫고 라만이 입을 열었지만.
“이 개자식아!!!”
“우오오오오!!! 죽여버리겠다!!”
결국 사냥개들은 주인의 목소리도 들을 이성을 잃은 채 목줄을 끊고 유천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죽어!”
가장 앞은 검을 든 동양풍의 얼굴로 보이는 젊은 남자. 검기로 유천의 시야를 가리던 가장 귀찮았던 녀석들 중 하나였다.
쉬익!
우상단에서 내려쳐 지는 푸른 검기. 유천은 그걸 온전히 맨몸으로 받아내며 놈의 목을 잡아 비틀어 뽑은 후 터뜨린다. 하지만 동료가 하나 더 죽었음에도 이미 용병들에게는 애도가 아닌 유천을 어떻게든 죽이겠다는 비이성적인 살의만이 남아있었다.
촤악!
손날에 집중시킨 무색의 힘의 응집체에 황소처럼 달려드는 거구의 방패를 든 남자가 방패째로 머리가 날아간다.
콰아앙!
거구의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을 던져 캐스팅을 외우던 마법사의 머리를 터뜨린다.
‘귀한 것들을 버릴 수는 없지.’
머리만을 노리는 이유는 가슴팍의 아크원자로와 그 에너지를 받아쓰는 마테리얼 슈트 때문. 아크원자로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거기에 그 정도의 에너지를 견디는 걸로 보아 놈들이 입고 있는 마테리얼 슈트 또한 유천이 입고 있는 것보다 급이 높았음이 분명했다.
가슴에 구멍이 난 염동술사의 슈트가 복원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동수복기능도 포함되어 있었고.
유천이 입고 있는 SRB 마테리얼 슈트가 협회 차원에서, 즉 국가 예산을 들여 리브레스에서 단 하나 구해온 걸로 생각하면 저것들도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귀한 마도과학의 산물이었다.
‘남은 건 네 명.’
으아아아, 불을 향해 달려오는 불나방들을 향해 유천은 피에 젖은 손을 쥐고 마주 달려나갔다.
암살자로 보이는 용병이 몸을 싸매고 있던 마도구로 보이던 붕대를 풀어 수십 방면으로 공격해왔다.
‘무시한다.’
카가각!
철근과 콘크리트를 두부 자르듯 베며 접근한 검은 붕대였지만, 이미 완전해진 유천의 몸은 저들의 주인도 파고들지 못한다. 퍼걱! 공격을 맞으며 파고들어 그대로 머리를 뽑았다.
셋.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암살자의 시체 뒤로 날카로운 창격이 유천의 머리로 뻗어졌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예.
‘라만의 제자인가?’
하지만 이들 사이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이미 그 연인으로 보이는 두 명을 죽인 이후 더 이상 신경을 쓸 이유가 없어졌다.
파앙!
이마로 그대로 창날을 들이받고 손바닥을 내질러 머리를 터뜨린다.
둘.
탕! 탕!
중거리에서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정확히 유천의 관절부위를 타격한 저격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어떠한 성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고성능으로 보이는 광학망원경 사이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놈은 나중에.’
살려놓은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없었다. 하나는 지금도 발악하듯 유천을 때리는 총알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저거 비싸 보이니까.’
발토와 날개가 가정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가장이다. 이지연과 양하연이 내실을 다진다면 자신은 밖에서 활동한다. 즉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거다.
‘그럼 일단 저 한 명.’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자. 처음 왔을 때 라만의 곁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지금도 유일하게 덤비지 않은 채 이를 꽉 물고 라만의 곁에 서 있는, 측근으로 보이는 자를 향해 유천은 굴러다니는 창을 주워서 집어던졌다.
콰아아아앙!
“크윽...”
“호오? 피해?”
전력으로 던진 건 아니라지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 투창은 고작 랭커 따위가 반응할 수 없는 종류였는데, 과연 괜히 라만의 측근이 아니라는 듯 녀석은 상체를 젖혀 그 궤적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완전히 피한 건 아니지만.’
유천의 공격을 완전히 피하려고 했다면, 그 궤적에서 적어도 수 미터는 벗어나야 한다. 여전히 출렁이는 창이 지나간 길에서 흘러나오는 파동에 방어막을 만들어내던 아크원자로가 파지직 비명을 내며 터져나가고, 마테리얼 슈츠도 찢겨나갔다.
“커억...!”
‘여자였나?’
방어막을 부수고 침투한 잔여 파동에 피를 토하는 녀석의 가슴 안쪽에 반쯤 찢겨 나간 스포츠브라와 그 사이로 삐져나와 출렁이는 가슴에 유천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았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크윽...물러나거라!! 샬롯!”
그때 속을 어느 정도 가다듬었는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라만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사님!”
“닥치고 꺼져!”
다급함. 수하들이 죽어나갈 때도 보이지 않았던 다급함에서는 마치 조금 전에 죽은 염동술사에게서 보였던 간절함이 비쳤다.
놈들의 감정을 자극한 이유는 전부 쳐 죽일 자신이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도망치지 않았으면 해서다. 모든 것을 잃고 분노하여 자신에게 달려들어 주었으면 했으니까.
굳이 라만을 가장 먼저 제거하지 않고, 랭커들을 노린 것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이다. 백색 마왕 때처럼 놈이 가진 ‘최후의 수단’을 완전히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가장 확실한 부분들부터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놈이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최후의 방법이.
‘악마가 된 거 같군...’
유천은 머리를 스치는 악념에 점차 자신이 인간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적을 상대로 효율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도움이 안 되니까 얼른 꺼지란 말이다!!”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샬롯.
재능과 실력의 차에 점차 멀어지는 형제. 그래서 옆구리가 헛헛해서 주워다 키운 딸이었다. 재능도 있었고, 똑똑했으며, 효심도 깊었다. 그래서 어느샌가 의뢰나 작전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제법 뛰어나서 괜찮은 도구라고 생각한다고 여겼지만...아니었나보다. 피신시켜야 한다는 다급함에 한시도 놓치지 않던 괴물의 기척을 놓친 라만이나, 감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서 눈을 돌리는 자신의 딸이나 말이다.
“그, 그럼 같ㅇ...커억!!”
“어딜 간다는 거냐?”
푸욱! 샬롯의 봉긋한 가슴을 뚫고 나온 피에 젖은 손. 그에 라만의 핏줄 솟은 눈이 찢어질 듯 벌려졌다.
“과연 딸이었군?”
“쿨럭...아,아아빠...아파...요...”
입을 피를 쏟는 딸의 뒤로 들려오는 여전히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라만은 가슴 속 무언가가 점차 쩌억 갈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 그만해라...”
“쯧...아직 그걸 쓰지 못하는 거였나? 괜히 시간 낭비했군.”
인상을 쓰며 입을 여는 유천의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라만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아직 내부를 진탕하는 힘은 남아있었지만, 딸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샬롯을 사, 살려서 보내주면...”
“그럴 필요 없다.”
촤악!!
보내준다면 충성이라도 맹세하겠다고 하려고 했지만, 유천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날을 세워 위로 그어 샬롯의 상체를 좌우로 갈랐다.
“아...”
푸드득, 떠오른 내장조각과 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라만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풀썩 쓰러지는,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딸의 뒤에 서있는 남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왜 이렇게까지...?'
한이 가슴을 메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이 약자의 마음이라는 걸. 라만 자신이 지금까지 짓밟아왔던 벌레들의 마음이라는 걸 말이다.
형제를 죽인 남자.
부하들을 죽인 남자.
딸을...죽인 남자.
그 모든 이의 피를 뒤집어쓴 악마가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어때? 이 정도로 했는데도 도망갈 거냐?”
시간을 잊은 듯 멍하니 쳐다본 사이 그는 뚜벅뚜벅 다가와 가만히 내려다보며 악마처럼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을 봐야지? 응? 그러니...슬슬 알을 깨라고. 라만.”
쨍그랑!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금이 가기 시작했던 라만의 심상 무언가가 깨져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