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하이랭커(4)
* * *
콰아아앙!
푸른 전류와 힘의 충돌로 대기가 밀려나고 바다와 땅이 부서지고 있는 현장.
엘리스 파셀과 킬리언.
유천과 라만의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 경이로운 현장으로부터 수 킬로 떨어진 곳에서, 유천이 내린 임무를 완수한 아름다운 두 여인이 그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불리해 보이는데...괜찮을까요오...?”
스승인 아델리아와 대등해 보이는 푸른 전류의 창잡이, 그리고 자신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아홉 명의 랭커들.
그런 그들이 한데 모여 한 명을 공략하는 장면이란... 스승을 따라 수많은 전투를 보아온 엘리스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 한 명이 유천씨라는 게 문제지만요오...’
전기를 다루는 하이랭커급 인사. 전투 성향에서 나오는 상성의 유무, 철과 소금물같이 전류의 매개체가 될 만한 환경, 거기에 지킬 것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까지.
마치 마법사나 주술사의 공방에서 싸우는 것과 같은 압도적인 불리함에 엘리스는 유천이 걱정되어 입술을 짓씹었다.
그렇다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텐데?
“당신은 걱정도 되지 않나요오...? 연인이 저렇게 당하고 있는데 말이죠오...?”
어떠한 공감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도 매정하게 말을 내뱉는 킬리언을 향해 엘리스는 약간의 적의를 담아 비아냥거렸다.
왜 그러지? 사실이지 않나?
킬리언은 하얗게 변한 엘리스의 머리와 그 양옆에 솟아난 동그랗게 말린 뿔을 가리켰다.
그거 일종의 각성기 아닌가?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도 그게 아니라면 흘러나오는 마력 파동에도 견디지 못하면서 네년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지?
“.........”
킬리언의 추측은 정확했다. 지금 엘리스의 모습은 심장을 자극하여 피의 변질을 불러, 태초에 가까워지는 용인족만의 비술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아니면 이 정도의 거리에서도 투기가 실린 고농도의 마력 파동에서 엘리스는 견디기 힘들었다.
저기 저놈들은 중앙세계에서도 저 회색머리 남자 곁에서 함께 싸워온 만큼 괜찮은 방어수단이 있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만, 너는 지금 살아남는 것만 해도 벅차지 않나? 거기다 그 힘, 지금도 안에서 꺼져가고 있군. 그러니 방해나 되지 말고 가만히 구경이나 해라.
“네 분하지만...당신 말이 맞아요오...”
각성기가 왜 각성기겠나? 엘리스는 태생부터 타고난 방대한 마력이 있음에도, 각성기로 인한 거대한 마력소모에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쏟아냈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올린, 이 일시적인 경지로 지금의 전 아까와는 달리 느낄 수 없는 걸 느끼고 있죠...그래서 이해가 안 가요오...”
뭐가 말이냐?
“당신은 왜 구경 중이냐는 겁니다...”
엘리스는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흘러들어오는 마력 파동이 체내를 짓뭉개는 걸 막기 위해 온 신경을 쓰는 자신과는 달리 킬리언은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느껴진다.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드높은, 오히려 저 푸른 창사에 가까운 괴물이라는 게.
“이해가 안 가요...당신이라면, 지금 저 자리에 끼어들 수 있을 텐데요오...”
유천이 저 하이랭커를 맡는다. 그 사이 킬리언이 나머지 랭커들을 도륙한다. 그렇게 한다면 저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될 것인데, 그리고 그걸 본인도 알 것임에도 이 여자가 무심하게 있다는 게 엘리스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인이라고 했으면서...’
유천이 킬리언을 소개했을 때를 떠올리자 엘리스는 솟구친 질투에 미간이 좁혀졌다.
도울 필요가 없다.
“네...?”
전혀 불리한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그게 무슨...”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천의 어깨에서 피가 치솟는다. 아니 지금뿐이 아니다. 유천의 공격은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푸른 창사의 공격은 모두 들어간다. 일방적인 공세. 이게 어떻게 불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가?
너는 유천을 오늘 처음 봤지.
“...그래서요...”
네가 그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는 거다.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너보다 그를 훨씬 오래 알아왔다는 듯 피식 웃는 킬리언의 모습에 불쾌함을 느낀 엘리스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저 정도가 아니니까.
킬리언은 천지를 요동시키는 소리와 함께 흘러드는 폭풍에 뒤집어쓴 후드를 부여잡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곳에 유천이 지켜야 할 것이 많지. 그래서 생각이 많아진 거다. 하지만 모든 걸 손에 쥘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상대를 죽이는 것에 집중한다면...
쿠웅...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조용하면서 훨씬 무겁고 거대한, 격이 다른 기세에 엘리스는 흠칫 놀라서 그곳을 쳐다보고, 킬리언은 저래야 한다는 듯 웃었다.
이제부터 시작이겠군.
“네...?”
우리는 물러나도록 하지.
킬리언은 손을 뻗어 대기의 기류가 한 데 모이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저기에 잘못 휘말리면...죽을 거다.
*
정교하고 계산적이다. 그리고...악의적이다.
콰아아앙!
라만을 필두로 한 마사크레의 랭커들의 합공에 대한 유천의 판단이었다. 라만이 내려친 낙뢰 사이로 뻗쳐오는 무수한 마력 다발들과 마법들. 그 중 단 하나도 유천을 죽이기 위한 일격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허나.
‘사람이 아닌 것 같군.’
오로지 유천의 행동을 방해하며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그것들은 마치 하나하나가 인격체를 가진 사람이 아닌, 라만의 무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도 보라. 유천의 몸에 흠집도 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수하 중 하나인 갈색 머리의 염동능력자는 돌무더기를 쏘아내고 있었다.
프릭션(Friction) 마법으로 마찰계수를 낮춰 균형을 흔든다.
검기 다발로 눈을 가린다. 권기로 땅을 파헤쳐 먼지를 치솟게 해 시야를 가린다. 염동력으로 돌덩이를 던져 거슬리게 한다.
비효율 안의 극한의 효율. 놈들은 도달한 경지의 깨달음으로 인한 강함이 아닌 일차원적인 부가효과를 이용해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유천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있었다.
치졸한 정교함. 정교함으로는 전에 본 베렌듀크의 기사들이 더욱 세련되었다. 그럼에도 유천이 난항을 겪는 건 유르힘의 부하들이 가지지 못했던, 정교함에 마침표를 찍는 절대적인 한 명의 강자.
쉬익!
눈앞에 모기가 날아다닌다면 손을 휘젓는 건 사람의 당연한 본능이다. 유천이 날아오는 돌을 걷어내기 위해 잠시간 눈을 돌리고 손을 휘젓는 찰나의 간극 사이로 푸른 창이 사각에서 노려온다.
“큭”
“그래도 이제 슬슬 보여 임마.”
그러나 이 자리에 세기의 천재는 라만만이 있는 게 아니다. 3차 초월에 도달하여 힘에 대한 초월적인 직관력. 태생부터 지니고 있던 재능들. 그것들이 합쳐져 유천의 부족한 경험을 메우고, 보지 못했던 광격(光?)을 느끼게 했으며, 종국에는 그걸 쳐낼 수 있게 했다.
“이 괴물 같은 새끼...”
라만은 유천의 강대한 힘에 지잉 울리는 창을 붙잡고 그를 노려봤다.
상대를 지긋지긋하다고 느끼는 건 유천뿐만이 아니었다.
‘저놈은 키메라란 말이냐?!’
아니 키메라도 저 정도는 아니다.
유천의 몸을 그은 상처도 어깨를 뚫은 상처도 사라져있다. 아니 그 이후에 입힌 상처들 모두가 없다. 남아있는 거라고는 무수한 혈흔 뿐. 안 그래도 단단한 몸인데, 회복력 또한 말도 안 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녀석은 숨 하나 헐떡이지 않았다.
용병으로서 수많은, 그 지독하다는 네임드들도 상대해 왔음에도 저런 불합리한 한 건 라만 또한 처음 보는 종류였다.
“이대로는 곤란하겠어.”
녀석들은 사냥에 익숙해져 가고, 유천도 그 탬포에 맞춰져 간다. 하지만 어느 한 쪽도 치명적인 수가 부족하다. 이렇게 간다면, 장기화된 싸움 끝에 서서히 지쳐간 놈들은 몸을 피한 후 다시 자신에게 싸움을 걸겠지. 결국 하이랭커와 수차례 이어진 전투로 이 작은 나라는 금방 피폐해질 것이다.
‘결단이 필요하다...’
부서지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을 분별해야 한다. 황폐해진 항만 너머로 보이는 해양괴수의 침입을 막는 방벽, 부산의 모든 에너지를 감당하는 마석 정제시설과 그와 연결된 발전소.
잘못되면 대도시를 붕괴시킬 필수적인 인프라들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용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단 하나...’
유천은 생각했다. 이 평형을 유지하는 저울. 그 중 한 축을 자신에게 끌어오기 위해서는 조금의 부족함을 채워야 한다고. 그리고 그 답은 언제나와 같다.
‘힘.’
“후우...”
유천이 숨을 크게 내쉬자, 무언가...변화한다. 그리고 그걸 라만 또한 감지했다.
“이런 젠장맞을...!”
유천이 느낀 균형은 라만 또한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눈을 감고, 서서히 팔을 들어 올리는 유천을 보며 본능적으로, 그리고 경험상 알아챘다. 저런 알 수 없는 변화는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아니 어쩌면 좋은 기회. 각성인지는 모르지만, 감히 적을 앞에 두고 눈을 감은 채 방심을 하는 유천을 향해 라만은 지금껏 틈이 나지 않아 내지르지 못했던 필살기 중 하나를 내질렀다.
“죽어라!”
뇌명창 2무 연계 오의(??) 연곡(??)
30여 번 내질러진 예리한 창격이 조금의 딜레이도 없이 훤히 드러난 유천의 급소를 하나도 빠짐없이 예리하게 찔러 들어간다.
카가가가각!!
“.........!!!”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모든 창격이 적중했음에도 유천의 몸에는 아무런 상흔도 남지 않았다. 이해 불가한 현상에 경악하며 라만이 입매를 비트는 것을 본 유천은 싱긋 웃었다
번경의 거미와의 싸움 이후 유천은 자신이 힘이라는 개념을 다룰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 많은 시도를 했다.
그 중 하나가 체내의 물리력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정도만을 남기고 체외로 분산시키는 것. 그 덕분에 공간을 다루거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등 다양성과 자유성은 늘었지만, 동시에 힘의 집중은 줄어들었다.
‘잊고 있었어.’
힘의 개념을 깨달은 후 체내의 물리력을 퍼뜨려 놓아 적절하게 줄어든 힘 덕분에 얻은 행동반경의 자유로움에, 다양성에 취해 잊고 있었다. 처음 자신의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초심으로 돌아간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외부로 퍼뜨려놓은 힘의 개념들이 하나둘씩 유천의 육체로 회수된다.
“하아...”
유천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다시금 몸에 차곡차곡 깃드는 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희열을 느끼며 숨을 크게 내뿜었다.
쿠구구구궁...
도저히 하나의 개체가 지닐 수 없는 힘이 집중되자 대기와 바다가 밀려 나가고 땅이 요동친다.
“이 무슨...”
눈으로 보이는 힘과 자세는 바뀌지 않았다. 바뀐 건 단 하나 유천의 마음가짐.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천에게서는 아까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존재감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 내가...?’
라만은 창을 쥐고 있던 팔이 덜덜 떨리는 걸 아연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땅이 울려서가 아니다. 그의 감각은 고작 그 정도를 착각할 정도로 저열하지 않다.
‘이 내가...겁을 먹었다고...?’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동등한 선에 있던 포식자였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세상을 울리는 저 괴물과 자신의 위상은 한순간에 달라졌다.
“그럴 리 없다!!”
저 몸에 더 이상 자신의 이빨이 들지 않는다.
저 포식자는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아니...
애초부터 같은 선상에 있지도 않았다.
가슴을 치솟는 그런 본능을 용납하지 않는 프라이드가 그의 등을 떠밀자, 라만은 경지에 도달한 후 처음으로 냉정을 잃은 채 소리를 지르며 유천을 향해 달려나가 창을 휘두른다.
이성을 잃고 분노했음에도 유려하고 신속하게 휘둘러진 창날이 반응하지 못한 유천의 목에 닿았지만.
캉!
이제 와서는 그의 창은 유천의 피막조차 손상시키지 못하고 튕겨져나간다.
“필요한 건 상상력을 구체화 할 직관과 심기체(心??)의 통일성이었나? 방향성이 잘못된 건 아니었지만, 외부에 신경을 쓴 만큼 내부에도 신경을 썼어야 했던 거였군. 과연 진정한 하이랭커란 재능과 광기가 합일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란 거였어.”
“태연하게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냐?!!”
“너무 화내지는 마. 네가 약한 게 아니라 내가 강해진 거니까. 아니 본래 이랬어야 했던 거겠지.”
유틸성과 다양성에 집중해온 1달간의 기간이 헛되지 않았다. 다시금 내부에 집중된 힘은 여전히 다루기 벅찼지만, 힘이라는 개념을 더욱 깊게 받아들이게 된 유천의 신체는 과거 무식하게 뭉치기만 했던 그것을. 그의 성장을 증명하듯 지금은 마치 격철에 끼우는 것처럼, 좀 더 세밀하게 몸 안으로 압축시켰다.
끄드드득...
쥐어지는 손끝의 움직임을 따라 모든 흐름이 뒤따른다. 강해졌다. 스탯 상의 변화는 아니었다. 더욱 정밀하게 내부에 압축된 힘이 유천을, 이전보다 단단하고 강하게 진화시킨 것이다.
이제 놈의 공격은 자신에게 닿지 않는다. 내 공격은 닿는 것만으로도 생을 멸한다. 이걸로 사냥감과 사냥꾼의 위치가 바뀌었다. 진정으로 불합리해진 상황에 동요하는 라만을 향해 유천은 사납게 웃었다.
“자...그럼 2차전을 시작하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