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하이랭커
* * *
“작전 개요에 대해 설명하지.”
유천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는 둘을 향해 탁자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흥...
“끄득...”
킬리언과 엘리스는 지금은 둘이 다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나중을 기약하며 엘리스와 킬리언은 서로의 얼굴을 살벌하게 흘긴 후 아공간에서 항만 시설지도와 몇몇 인물에 대한 보고서를 꺼내는 유천에게 다가갔다.
“운이 좋았어. 사실 녀석들이 모일 거라는 건 예측했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었거든.”
“그럼 어떻게 아신 건가요?”
킬리언의 등장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엘리스는 평상시와 달리 평범한 말투로 유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제 해원의 웬 머저리들이 나를 습격하길래 대장으로 보이는 놈을 잡아뒀지. 꼬챙이로 몇 번 쑤시니 전부 불었다고 하더군.”
유천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갑수 그 늙은이. 심적으로 많이 몰린 거 같더군.”
유천은 생각했다. 자신을 습격한 해원의 자객들. 도갑수는 놈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창남이든 기둥서방이든 수호길드의 유일한 내부이사다. 아무리 멍청해도 자신에게 예상을 벗어난 어떤 수단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을 테다.
“그럼에도 습격을 감행한 이유는 아마...”
“시선 돌리기?”
“그래. 외부세력들이 들어오는 걸 걸리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후에 발토 내부에서 난리가 나더라도, 고작 하루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도갑수 아니면 동양그룹 회장인 박대경 그자들이 이 나라를 뒤집어엎을 수 있다고 확신할 만한 전력들이 들어온다는 거겠군요...”
“그래 그렇기에 이번 일에 다수는 필요 없다. 괜히 시끄러워질 뿐일 거니까. 필요한 건 극소수의 정예 하이스트 맴버.”
그게 우리 셋이란 거고?
“그렇지.”
유천은 지도를 쫙 펼친 후 손가락으로 세 곳을 짚었다.
“가장 중요한 곳은 선착장과 동쪽 그리고 서쪽의 출구, 이 세 곳이다. 놈들이 한데 모일 선착장은 내가 가지. 그리고 내가 랭커들과 상위 각성자들을 죽이는 사이 다른 놈들이 도망칠 서쪽 입구는 엘리스, 그리고 동쪽 입구는 킬리언이 맡아.”
“흐음...이곳을 넘어가면 마석 정제시설이 나오는군요.”
“마석 정제시설은 마럭노심 설계의 꽃이지. 그리고 그 모든 걸 지배하는 여자가 내 눈앞에 있고”
“무, 무슨 말씀이실까요오...”
목소리를 떠는 엘리스를 향해 유천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력노심 긴급통제 코드.”
“......”
“가지고 있지?”
부산의 마석 정제시설은 황금새 빌딩 지하에 매설된 일개 마력노심시설과는 격이 다르다. 마석 정제시설이 폭발한다면 고작 빌딩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항만은 가루가 될 것이고, 장벽은 무너질 것이며, 부산의 기반이 붕괴될 것이다.
최대한 온전히 부산을 흡수하고자 하는 유천은 그런 일은 사전에 방지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전력을 다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다 해도 위험하기 폭발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줬으면 해.”
“...숨길 생각은 없었어요...그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당황했을 뿐이죠...”
“진정해 뭐라 하려고 한 말이 아니니까.”
현재 지구 대부분에서 쓰이는 마력 노심 기술은 드라고니아에서 비롯된 것들. 그리고 엘리스는 마력 구조체의 통제권을 가져올 수 있는 코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드라고니아의 용인족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 자신이 빙의자임을 알지 못하는 엘리스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걸 유천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말을 했지만, 결국 일의 맥락은 간단하다. 큰 피해 없이 녀석들을 죽인다. 내가 놓치는 놈들은 둘이 잡아 죽인다. 혹시 이상이 있을 시 엘리스는 마석 정제시설을 강제 셧다운 시킨다. 그것만 명심하면 돼.”
유천은 어둠이 잠식하기 시작하는 밤하늘 아래. 검게 선팅된 수십 대의 승합차가 항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슬슬 주역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군. 움직이도록 하지.”
*
“발토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소?”
“예...회장님.”
“쯧...일을 어찌 하는 것이오? 해원 길드장.”
“...면목 없습니다...”
‘망할 늙은이가...’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형 선박들이 대져 있어야 했지만, 앞으로 올 손님을 위해 비워둔 컨테이너 부두. 그곳 최후방에서 해원의 길드장인 도갑수는 자신을 타박하는 동양그룹의 회장 박대경에게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주요 전력을 집중시키라고 한 게 누군데?!!’
손님맞이를 위해 자신을 포함한 해원의 최고 전력들을 오늘 이곳에 집중시키라고 명한 것이 박대경이었고, 발토 내부를 흔들기 위해 내부이사인 유원에게 병력을 보내라고 한 것 또한 박대경이었다.
‘쪼개고 쪼개서 남은 인원 중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측근을 보내놨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살기가 치솟았지만, 도갑수는 박대경이 아무런 힘도 없는 민간인임에도 어떠한 압박을 할 수 없었다. 박대경 옆에 있던 자들 때문에 말이다.
“허허...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밑에 것들이 영 시원찮아서 말이오...”
“그러길래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아니 애초에 이곳도 우리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건들 거면 확실하게 하던가 이도 저도 아니게 이게 뭡니까? 아니면 동양그룹 회장님께서는 우리가 나약해 보이셨나 봅니다?”
“허허...그럴리가요. 이건 그저 앞으로 오실 손님들께 보여 드릴 체면치레일 뿐이지요.”
박대경이 공손히 응대한 그는 자신의 절반도 살지 않았을 핏덩이 같은 청년이었지만, 막 기른 칙칙한 회색 머리 사이로 비치는 삭막한 눈동자는 그가 살아온 삶을 반증했다.
“중앙세계의 거대 용병기업인 마사크레분들을 저희가 어찌 무시하리까?”
‘허허...이거 하늘이 돕는군.’
충분한 돈만 받으면 불법적인 일이라도 서슴지 않는 조직 마사크레. 발토가 공격적인 확장을 하는 이 위험한 시국에 그 거대한 중앙세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강대한 조직이 자신을 돕는다는 것에 박대경은 천운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계약은 기억하시고 있습니까? 회장.”
“허허 당연하오. 저에게 이 나라를 주신다는데 고작 여명 따위 얼마든지 내어 드리지요.”
스스로 마사크레의 팀장이라고 말한 회색 머리 남자. 라몬은 1주일 전 자신을 찾아와 단 하나만을 요구했다. 여명의 모든 것. 그렇게만 한다면 이 나라의 왕이 될 수 있게 해 주겠다며 말이다.
‘쯧...아쉽군 아쉬워 이럴 줄 알았다면 왜놈 놈들이랑 짱깨놈들의 도움을 거절하는 거였는데 말이야.’
라몬이 박대경에게 접근했을 때는 이미 발토를 막기 위해 천황국에 중화연맹의 병력지원을 받기로 한 상황이었다.
‘저놈들이 적당히 이득만 누리고 나갈 리가 없을 테고...’
천황국과 중화연맹이 절묘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은 국제 관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자들이 그들을 쫓아내 준다면...’
“흠흠...아실지는 모르겠지만, 그 발토와 협회를 없애도 이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저기 들어오고 있는 저놈들도 후에 처리하면 되는 거 아니오?”
라몬이 가리킨 곳에는 총 두 대의 배가 빠르게 항만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법 한가락 하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우리들 상대는 아니니 안심해도 됩니다.”
중화연맹과 천황국에서 오는 두 대의 배에서 랭커의 기운이 여럿 느껴졌지만 라몬은 여전히 시큰둥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허허! 과연 대단하오! 내 이제 안심해도 되겠구려.”
생각이 빠르게 잘 돌아간다. 거기에 사위를 짓누르는 무력과 카리스마 또한 걸출하기 그지없다.
‘그에 비해서 이놈은...’
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지원해줬지만, 황금을 본 박대경의 눈에 고작 구리에 불과한 도갑수는 더는 눈에 차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만 알 수 있으면 아래로 끌어들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박대경은 그에게 모든 부귀영화를 줘서라도 자신의 아래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중앙세계에서 라몬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고작해야 팀장.
수도에서 일개 공무원을 할 바에 지방에서 왕 노릇을 지내고 싶어 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 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향락을 누리다 보면 충분히 지구에 정착할 마음이 생길 테지.
박대경의 눈에 서린 탐욕을 읽은 라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병신 같은 늙은이. 아랫것들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면서 탐할 수 없는 걸 탐하려고 하는가?’
라몬은 박대경에게서 눈을 돌려 굴욕감에 몸을 떠는 도갑수를 쳐다봤다.
‘랭커급이라...’
분명 해원길드장은 랭커가 아니라고 했음에도 통제하지 못하고 흘리는 살기에서는 랭커수준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래를 갈아치우려는 위와, 위에 자신의 경지를 숨기는 아래라...일이 끝나면 어떻게 흘러갈지 훤히 보이는군.’
온갖 경험을 다해본 마사크레의 팀장인 라몬에게 저런 광경은 흔해빠진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결말의 대부분은 공멸이라는 것도 말이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라몬의 목적은 단 하나. 멸망한 베렌듀크의 후계자인 카이안의 비밀의뢰를 받은 후 실종된 로먼의 팀을 수색하고 전멸했다면 그 원인을 파악하고 후 조치를 취하는 것이었다.
‘수색은...하나마나지. 전멸일 거다. 로먼...이 멍청한 새끼...’
라몬과 로먼은 마사크레에 들어오기 전.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해온, 아니 기억이 있을 때부터 함께 해온 사이였다.
중립분쟁지역, 그 자식마저 잡아먹는 지옥에서 나무뿌리 하나도 나눠 씹었던, 부모가 없어 서로의 이름을 지어준, 친구이자 가족의 죽음을 상상하자 라몬의 눈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조금...오래 걸릴 거다... 로먼...쉽게 죽여줄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집단은 행적이 모호한 음지의 ‘날개’와 갑작스럽게 등장한 수호길드 ‘발토’. 확실한 증거만 확보한다면 라몬은 의뢰고 뭐고 간에 수십 수백 번 삭여온 이 들끓는 증오를 모조리 풀어헤칠 생각이었다.
“라몬. 슬슬 준비해야겠소.”
라몬이 그런 각오를 다지는 사이, 정착한 두 대의 배에서 각각 수십 명의 인원이 하선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으윽...”
“역시나 이렇게 나오는군.”
길들이기를 하겠다는 듯 온갖 기세를 뿌리면서 내리는 천황국과 중화연맹을 대표한 각성자들에 의해, 이 자리에 수준 이하의 각성자들과 민간인들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라몬!”
“쯧...귀찮군...”
같잖은 무능력자이지만 일단은 협력자다.
대기업의 회장이라는 직책을 빼면 일반인에 불과한 박대경이 숨을 헐떡이며 내지르는 절규에 라몬은 인상을 찌푸리고 기운을 흩어버리려고 손을 뻗었다.
멈칫
하지만 그 가슴까지 올라온 손은 그 이상 올라가지 않고 정지한 듯 멈춰 섰다.
“...이보시오 회장.”
“크윽! 왜 그러시오?!”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가며 다급한 어조로 되묻는 박대경이었지만, 라몬은 거기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얼굴을 천천히 굳혔다.
“여기 다른 손님들도 오기로 하였소?”
“그게 무슨 소리요?!”
“그 말은 결국 꼬리가 잡혔다는 거군. 멍청한 아마추어들 같으니라고.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지, 지금 무슨...!”
라몬이 더 이상 존대조차 하지 않고,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자, 박대경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용병이라도 기업이라고 이름을 내건 것들이! 지금 배신을!!”
“닥쳐라. 회장이라는 놈이 이리도 눈치가 없나?”
라몬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요하게 떨어지는 무언가. 이곳에 있는 한심한 수준의 랭커들 따위는 알 수 없는, 마사크레의 히든조커인 ‘하이랭커’급에 도달한 라몬만이 느낄 수 있는 것. 의념(??)과 개념(?)을 휘감은 누군가가 밤하늘을 포물선으로 가르며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네놈이었군...”
“아까부터 대체!”
!!!
배와 배 사이에 정확히 떨어진 그것으로부터 퍼지기 시작한 힘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굉음과 함께 동심원을 그렸다. 퍼져 나간 파동에 두 대의 배는 종잇장 짓이겨지듯 찢겨나갔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내리던 중화연맹과 천황국의 각성자들 또한 일부 몇몇 재빠르게 힘의 영향에서 벗어난 랭커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으아아악!!
내, 내 팔!!
크르르륵...
그리고 그건 내륙에 있던 자들 또한 마찬가지.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철근과 콘크리트의 파편에 고위급 각성자들과 운 좋은 몇몇 빼고는 죽거나 행동불능에 빠져들었다.
“이, 이게...”
“귀...으어억...귀가 안 들려!”
뚜벅뚜벅...
야심과 살기를 숨기기 바빴던 도갑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박대경은 굉음에 고막이 터져나가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라몬은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사님.”
“왜 그러나?”
하이랭커로 등록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비견되는 존재인 그가 팀장인 건 사실상 어불성설. 라몬의 실제 직책은 마사크레 회장 ‘호벨 골디언’ 바로 아래로 여겨지는 전무이사.
회장 아래에 부회장도 있기는 했지만, 라몬은 그 무력으로 기업 내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실질적인 이인자다.
“저희도 함께 갑니까?”
그리고 그의 곁에 지키고 서 있던 부하들 또한 하나하나가 마사크레의 팀장의 직위를 맡아도 될 수준 높은 랭커급의 각성자들이었다.
하이랭커 하나와 아홉 명의 랭커들. 중앙세계에서도 어지간한 세력 하나는 지울 수 있는, 이런 외곽차원에서는 과할 정도의 전력이었지만.
“...직접 공격하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방해만 한다는 마음으로 빈틈만 쑤셔.”
라몬은 본래 홀로 복수를 감행하겠다는 계획조차 수정했다.
‘녀석은 의념과 개념을 다룬다. 최소 나와 동급이겠군...’
“그럼...이 시끄러운 늙은이는 어떻게 합니까?”
“...한 놈은?”
귀를 막고 울부짖는 박대경 말고 도갑수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자 라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저 곳에 정신을 팔려 눈을 돌린 차에...사라진 거 같습니다.”
“아니다. 그래도 꼴에 숨겨놓은 한 수가 있었나 보군.”
아무리 자신이 정신이 팔렸다 해도, 기세조차 갈무리하지 못하는 랭커 따위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진 실력 이상의 특별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특별해봤자지. 내버려둬라. 이곳에서 놈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딴 똥파리를 신경 쓸 때도 아니고 말이다. 일단 쓸모없는 그 시끄러운 것부터 치워라.”
“예.”
라몬은 뒤에서 들려오는 피가래소리를 배경 삼아, 바다 위를 걸어 육지에 도달한 유천을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