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힘이 마법이다-85화 (85/116)

〈 85화 〉 엘리스 파셀(4)

* * *

“자 그럼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해보지.”

“아...”

유천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엘리스는 아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고자새낀가요오...’

어떻게 자신의 가슴을 떡 주무르듯 만져 넣고. 이런 달달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저리 무심히 돌아간단 말인가?

“응?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흥...아무것도 아니에요오...”

“그래? 그럼 하던 이야기부터 정리하지.”

괜히 자존심이 상한 엘리스는 볼을 부풀렸지만, 유천은 모른 척 말을 돌렸다.

“나한테 드라고니아랑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수가 하나 있다. 들어볼 의향은 있나?”

“무슨 수를 말하는 거죠오...?”

“하연씨의 복수, 그리고 이그드라실의 강경무투파의 세력을 줄이는 방법. 궁금하지 않아?”

“호오...그게 무엇이지요오...?”

유천의 말에 엘리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졌다.

“일단 너한테 내가 가진 비밀 중 한 가지를 풀 필요가 있겠어. 이건 너라도 모를 거다.”

“흠...저를 믿으시나요오...?”

엘리스가 지구 내에서만큼은 유천의 아래를 자처했지만 둘이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다. 시간과 신뢰가 완전히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

“믿는다.”

하지만 유천은 당연하다는 듯 그렇다고 말했다.

“엘리스 난 이번에 너와 새롭게 맺은 관계를 제외해도, 드라고니아의 딸이자 뛰어난 사업가인 네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니까.”

“호오...더욱 흥미가 끌리네요오....그게 무엇이지요오...?”

“그 전에 먼저 엘리스 넌 이그드라실의 강경무투파의 인물들에 대해 잘 알겠지?”

“지피지기 백전백승(???己 ?戰??). 이 나라에서도 유명한 말이지요오...저는 화이트의 장로이신 아델리아님의 제자. 당연히 그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말한 조건에 맞는 인원을 꼽아봐라.”

유천은 바닥을 보인 얼음을 씹으며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일단 상원의원은 안 돼. 그러니 하원의원. 거기서도 권력가이거나 가주격의 인물은 안 된다. 그러면서도 가진 명예나 직위가 높은 자가 있나?”

“흐음...”

엘리스는 빨대를 휘저으며 유천이 언급한 조건에 맞는 인물을 생각했다.

그러길 5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명. 유천씨가 말한 조건에 맞는 인물이 있네요오...”

“누구지?”

“네르파 로바린. 이그드라실의 하원의원이자 과거 리브레스 교수회에 속했던 군사학 교수였지요오...”

“였다?”

“그가 제출한 군사학 논문 중 몇몇은 한동안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정도로 교수로서의 이름이 높은 인물이죠오...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사상을 지니고 있어 교수회 아니 리브레스에서 퇴출된 자이에요오...”

“그 리브레스에서 퇴출되었다라...”

학문적 교류에서 자유로움을 중시하는 그 리브레스에서조차 거부당했다는 건 네르파라는 자는 분명 흑마법급의 미친 사상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자는 극단적인 엘프 우상 주의자였어요. 그에 대한 논문들도 교수회에 제출했죠오...세계수는 창조주의 유산이 사라진 세상을 지탱하는 최후의 기둥이다. 그리고 엘프는 유일하게 그걸 가꿀 수 있는 종족. 그러므로 그 이외의 모든 종족들은 엘프의 노예가 됨이 지당하다...뭐 이딴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어요오...”

“미친놈이군. 그리고 엘리스 네가 왜 그를 언급했는지 알 것 같네.”

한쪽으로 너무 극단적인 사상을 지닌 자는 같은 세력에게도 외면당한다. 놈의 사상은 잘못했다가는 위원회에서도 축출될 수도 있는 그런 종류. 분명 강경무투파 안에서도 겉돌고 있을 거다.

“놈은 사이비 교주 같은 녀석이겠어.”

“네 정확해요오...그 놈의 사상에 감화된 광신도들은 이그드라실 하류층 상류층을 가리지 않고 그 수가 적지 않아요오...과연 여기까지 파악하시다니, 대단하세요오...”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지 않나? 본래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거나, 자존감이 부족한 자들이 국가나 종(?)에 집착하는 건 역사만 돌아봐도 흔히 있는 일이지.”

네르파의 주장은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일그러져 있었지만, 국뽕의 광기는 지구에 한정하지 않는다. 본디 지성체에게는 보편을 넘어선 특별함에 집착하는 본능이 내재하여있으니까.

“권력과 재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교수였던 하원의원이라는 명예. 거기에 추종자 또한 상당하다라...역시 엘리스 파셀. 딱 내가 생각한 인물이야.”

“고, 고마워요...그런데 놈을 찾으시는 이유가...”

“그놈을 죽일 거다.”

“!!!”

그 말에 엘리스는 유천의 칭찬에 배시시 웃던 표정 그대로 굳었다.

“...직접 말인가요오...?”

“그래 직접. 이 일의 중요성은 상당하다. 계획한 대로만 된다면, 후에 발토는 별다른 방해 없이 세력을 키울 수 있을 거다.”

“...제가 모르는 재료들이 있나보군요오...당신이 그리는 그림. 저한테도 알려주실 수도 있으신가요오...?”

“물론. 이 계획에는 드라고니아의 힘이 필요해.”

“...설마 이그드라실과 전쟁을 벌이라는 건...”

“그런 무력적인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니니까 안심해라. 오히려 화이트 일족을 넘어 드라고니아에서도 만족할 거다.”

“아...”

다리를 꼰 채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웃는 유천의 모습에 엘리스는 새삼 그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에...’

공평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방적으로 자신만 두근거린다는 것에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일단 내 계획을 말해줄 테니. 엘리스 네가 어떤지 평가해봐.”

*

꼭대기에서 따사로운 빛을 내리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넘어갈 때쯤 유천의 말이 끝났다.

“...유천씨”

그리고 묵묵히 유천의 계획을 듣던 엘리스는 입을 열었다.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네요오...”

“그래서 실행 가능성은?”

“후우...”

엘리스는 고개를 젖혀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봤다.

“제가 생각한 거 이상으로...큰 판이었네여...”

“그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

“위원회가 끼어들 여지가 있을 수도 있어요오...”

“아니 위원회라고 뭉쳐놨지만 결국 그 13석은 더원(The One) 아드릭센이라는 절대자 아래에서 오월동주(????)하는 관계지. 적당히 이득을 보면 그들은 모른 척할 거다.”

“아아악...!!”

엘리스는 품위 없이 소리를 지르며 풍성한 분홍색 머리를 비벼댔다.

“머리 아파요오!!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대계를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에에에...!!!”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하나? 실행 가능성은 충분해 보이나?”

“그 전에 먼저 하나 확인할게여...”

유천은 흐트러진 머리를 한 채 눈을 흘기는 엘리스의 모습은 귀신같다고 생각했다.

“베렌듀크의 후계자 카이안. 그건 확실한 건가요?”

유천이 엘리스에게 푼 카드 중 하나는 바로 이 땅에 숨어들어 있었던, 용사가문 베렌듀크였다. 그리고 그들을 자신이 아래로 흡수했다는 것까지.

“믿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네게 보여준 물건. 그건 확실할 텐데?”

“그거 말이죠...”

엘리스는 유천이 베렌듀크의 증거로 꺼내놓은, 그리고 이번 대계에 불을 지필 물건을 떠올렸다

‘물건은 확실해...그 안에 깃든 걸 내가 못 느낄 리가 없어...’

이 남자는 자신이 화이트 일족이라는 것까지 계산하고 말한 걸까? 그게 사실이라면...

‘여우라...정말...하나도 어울리지 않아...’

무식한 거인족들도 경시할 힘을 가졌으면서 그 심계도, 적의 입장이라면 교활하고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아하하하하!”

계획이 아직 완전한 건지, 아니면 숨기고 있는 히든카드가 남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세부적으로 문제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엘리스는 그 계획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성공만 한다면 유천의 말대로 드라고니아가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만나기 전 정보를 통해 알 수 있던 신중함.

국밥집에서 보인 어리숙함.

엘리스 자신의 가슴을 거세게 쥐어뜯는 패도적인 모습.

거리낌 없이 신뢰를 주는 자신감.

거기에 이번 계획을 통해 보여준 교활함까지.

보통 힘이 세면 단세포 같기 마련인데 그는 여러 다양한 모습을 엘리스 자신에게 보여줬다.

‘정말...미칠 거 같아요오...♥’

엘리스는 자신의 젖통을 잡혔을 때부터 아니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식지 않은 아랫도리의 열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허벅지를 비볐다.

‘아, 안 돼요오...’

엘리스는 이 자리에서 발가벗고 다리와 보지를 벌려, 저 우량한 수컷의 자지를 받아들이라는 여성 용인족의 본능에 최대한 저항하고자 손가락을 깨물었다.

‘나는 그렇게 싼 년이 아니에요오...’

“하아...후우...”

“엘리스?”

“괜찮네요. 아직 같이 다듬어 봐야 할 부분들이 있지만, 괜찮은 계획이에요오...”

갑자기 웃다가 심호흡하는 자신을 유천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엘리스는 재빨리 대답했다.

“언제쯤 실행할 생각이신가요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한국을 정리하고 나면 여유가 생겨, 그때 중앙세계에 다녀올 생각이니까. 그걸 묻는다는 건...”

“네. 굉장히 급진적인 방식이지만...마음에 들어요오...나중에 미국에 돌아가서 제가 직접 스승님께 말씀드려볼 게요오...”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진정한 자신의 고향인 드라고니아의 힘은 더욱 커질 거다. 전직 교수이자 이그드라실의 하원의원을 살해하는 일이었지만 경천(??)의 힘을 지닌 유천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끄응...그나저나 굳이 부산까지 내려오셔서 할 말은 아니었던 거 같고오...”

엘리스는 손을 앞으로 뻗어 기지개를 켜며 유천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니...저를 만나는 김에 부산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오...?”

“...저 아래 보이는 항만. 누구 거 인줄 아나?”

유천은 산처럼 쌓여있는 컨테이너, 그리고 커다란 선박들이 대져 있는 곳을 가리켰다.

“흐음...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걸 물으시는 건 아닌 거 같고...”

본래 항만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이 맞지만, 한국은 과거 북한산 사태로 인해 중앙정부의 힘이 약화되었다. 부산의 항만에 힘이 닿지 않는 건 당연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즉 이곳을 관리하는 건 공사도 공무원도 아니라는 거다.

“항만의 입 출입을 관리하는 건 원륭물산. 하지만 실제 뒷배는 동양그룹과 그리고 해원 길드, 그리고...그들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군부세력들로 알고 있어요오...”

“그래 맞아. 잘 알고 있군.”

“그럼요...제가 누군데요오...”

그리고 그 통제를 잃은 건 군 또한 마찬가지. 이만성이나 이도경 같은 랭커들이 있기에 대놓고 수탈하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서울의 수도방위사령부를 제외하고는 각 대도시의 군부세력들은 반쯤 독립적인 군벌로 거듭났다.

“그럼 오늘 저곳에서 군부의 장군급 인사들, 도갑수를 포함한 해원의 핵심전력과 동양그룹의 회장단, 그리고 천황국의 주술사들이 모인다는 것도 알고 있나?”

“네...?”

“아니 천황국뿐만이 아니지. 중화연맹까지 끼어들 거다. 거기에는 랭커들 또한 일부 포함되어있을 거고. 엘리스 너라면...이제 내가 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지?”

“설마...”

점차 공격적으로 성장하는 발토.

거기에 위기를 느낀 최후의 거대길드, 그 후원 그룹. 얌전히 그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개새끼를 자처한 무능한 군부세력.

서울의 거점을 잃은 중화연맹과 한국을 먹고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천황국.

거기에...저들이 집결한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내버려둔 유천까지.

“쥐새끼들이 한곳에 모이길 기다렸군요오...”

“그래 놀란 쥐새끼들이 흩어지면 귀찮아지지 않나?”

“그렇죠...그때는 일 처리가 시끄러워질 테니까요오...그건 결코 당신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겠죠오...”

조용히 쥐구멍에 쥐새끼들이 모이길 기다린다. 그리고 전부 모였을 때, 그 안으로 화염방사기를 뿌리는 방식.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고 깔끔하다.

“너무 깔끔해져서 부산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오...?”

그들은 분명 유천의 적이지만, 동시에 부산을 지키는 필요악이다. 이 대도시를 이끌어온 머리들이 일순간에 잘려나갔을 때 발생할 혼란은 어쩌려는 것일까?

“부산이 돌아가는 핵심은 무역과 조선 그리고 마석 정제다. 실제로 해원길드와 동양그룹의 전력 대부분은 거기에 집중되어있지. 해원길드가 해왔던 일들은 우리가 받아서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숙청당할 동양그룹 경영단의 자리까지 받기에는 너무 일이 많아. 그러니까 필요하다. 그걸 이어받아 줄 믿을 만한 누군가가.”

유천은 거기까지 말한 후 엘리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지금 그걸 저에게 맡기겠다는 건가요오...?”

“미국에는 아니 드라고니아에는 뛰어난 자가 많을 텐데? 그랜드 파에타 호텔의 지배인인 나리아노처럼 말이다.”

“아예 대놓고 제 직속을 박아 넣겠다고요...? 여러 말이 나올 텐데요오...?”

“언론은 이쪽에서 주물러주겠다. 어차피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이어받는 것뿐이다. 유능한 경영인이 넘치는 그곳에서 그 정도는 일도 아닐 거고, 거기에 그놈들이 착복해온 것들을 성실히 국가에 내기 시작하면 곧 떠도는 말들도 금방 사라질 거다. 내가 그렇게 하게 할 거고.”

“당신 주머니가 아니고요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유천을 보며 엘리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나쁘지는 않아요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이, 정확히는 발토와 드라고니아가 손을 잡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그녀가 한국에 들어오는 걸로 나도는 여러 찌라시들도 거기에 포커스를 맞출 테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당신에게 신뢰받았는데...저도 좀 더 확실한 스탠스를 취해줄 필요가 있겠죠오...? ”

“음? 뭐가 더 있나?”

“그건 비밀...다 끝나고 나면 아실 거에요오...”

“......”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한 채 요염하게 검지로 자신의 입을 막는 시늉을 하는 엘리스의 모습을 보며 유천은 새삼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크흠...일단 후일을 논하기 전에 오늘 저녁의 뒤처리부터 똑바로 해야지.”

멍해지는 자신의 눈빛을 숨기고자 유천은 헛기침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 괜한 찌꺼기가 남아서는 곤란해. 완벽하게 처리해야 하지. 그래서 조력자가 필요해.”

“저 말고도요오...?”

유천이 직접 오늘 일어날 전투에 끼어들라고 하지 않았지만, 엘리스는 이미 그의 여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당연히 둘이서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조력자라니?

“그래. 아 왔군.”

“네에...? 어디...”

뚜벅뚜벅...

‘뭣?!!’

엘리스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둘만 있어야 하는 공간에 발걸음 소리가 그것도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자 오싹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누구...?'

그곳에는 회색 후드티에 짧은 청바지 거기에 검은색 워커를 신은 편한 복장을 한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뒤집어 쓴 후드로도 가려지지 않는 풍성한 하얀 머리,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와 거기에 품이 큰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폭력적인 몸매와 건강해 보이는 갈색 피부에서는 마치 아마조네스 여전사와 같은 강인함이 흘러나왔다.

­흠...

“......”

엘리스는 예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람 또한 포함되고 말이다.

‘뭐야...’

하지만 지금 자신을 무시하듯 지나치며, 퇴폐미가 넘치는 보라색 눈을 아래로 흘기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상대가 자신과 비견할 만한 외모를 지녔음에도...엘리스의 가슴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악의가 솟아났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어.

“하하...그런가?”

자신을 지나친 그 여자는 자연스럽게 유천과 손깍지를 낀 채, 다정하게 그와 대화했다.

“아...”

엘리스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치솟는 검은 것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평생 느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감정.

“아 엘리스 이쪽은 이번 일에 나를 도울 내 동료이자... 연인인 킬리언이라고 한다. 그리고 킬리 이쪽은...”

­아니 내가 직접 물어볼게.

킬리언은 엘리스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유천이 내 소개를 했듯이 내 이름은 킬리언이다. 그대는 누구지?

“......엘리스 파셀...”

­그래...만나서 반갑다. 엘리스 파셀.

착각일까? 저 부드럽게 접힌 보랏빛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여유 넘치는 가소롭다는 기색은?

“......네 반가워요. 킬리언양.”

평소에 늘어지던 말투조차 감추고 딱딱해진 엘리스를 향해 킬리언은 더욱 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유천이 잘 부탁해.

“......”

‘...이 시발년이...’

그리고 무언가를 확신한 엘리스는 눈앞의 여인, 킬리언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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