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엘리스 파셀(3)
* * *
“좋은 곳이군.”
“그렇죠오...?”
엘리스 파셀이 데리고 온 카페는 높은 고도에서 아래의 항만과 해양 괴수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거대한 장벽이 온전히 보이는 3층짜리 카페. 그 옥상에서 슬슬 다가오는 서늘하면서도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유천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엘리스는 민트초코 프라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
“...그거 맛있나?”
“색깔이 초록색이라 신기해서 시켜봤는데...초코의 달콤함과 민트의 상큼함이 제법 잘 어울리네여...”
“그래 뭐... 개인 취향이니.”
유천이 민트를 혐오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치약 맛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좋은 카페인데 사람이 고작 우리 빼고 종업원뿐이라니”
“아...그건 당연해요오...”
“응?”
“제가 이미 이곳을 1주일 치를 샀거든요오...”
엘리스가 선글라스를 벗자 숨겨져 있던 푸른 눈이 휘어졌다.
“...얼마를 준거냐?”
“에이...얼마 안 줬어요오...”
“어쩐지...손님이 하나도 없는데도 주인장 표정이 좋더라...”
주문을 받은 종업원 아니 주인장이 생각 이상으로 공손하고 표정이 좋다했더니 그런 이유였나. 푼돈이라 했지만 그게 이 지구에서 가장 돈이 많은 여자의 기준이라면 단위가 차원이 다를 거다. 1주일이 지나고 나서는 장사를 접을 수도 있겠지.
“그럼 이제 본론으로...”
“그 전에...”
“응?”
“저에 대해 궁금한 건 없으세요오...? 저는 유원씨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데에...”
엘리스가 유천을 반려자로 점찍었다고 했지만, 아직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성격, 사고방식, 취미, 음식 취향, 그리고 숨겨진 성향들까지.
‘웬만한 거면 전부 맞춰줄 수 있지만...’
처음으로 본 신랑감이지만, 용납되지 않는 예를 들면 네크로필리아나 인육 섭취 같은 취미가 있다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교정하기에는 자신과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힘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럼 포기해야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들더라도 엘리스는 그런 것까지 맞춰 주면서 살을 맞대고 평생을 함께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얘기는 할 일부터 끝내고 하자고. 아직 너는 내 아군이 아니야.”
“으음...네에...어쩔 수 없죠오...”
‘이게 그...나쁜 남자인가요오...?’
색달랐다. 자신이 싱글싱글 웃으며 요구하면 남녀를 불구하고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원은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것이.
‘이런 것도 좋네에~’
“얼굴이 붉군. 추우면 들어가서 얘기해도 된다.”
붉어진 볼을 감싸는 엘리스를 향해 유천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예쁘긴 해.’
화장 하나 하지 않은 얼굴에 꾸미지 않은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웬만하면 잘생기고 예쁜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아름다움이었다. 과연 양하연과 함께 지구에서 가장 선망받는 여성 각성자 두 명 중 하나다웠다.
“아! 추운 거 아니니까 괜찮아여...용인족이 고작 이 정도에 추워할 리가 없잖아요오...”
“그래...?”
배시시 웃는 저 요망한 표정을 봐라. 가을을 담은 선선한 바람과 함께 흘러들어오는 그 모습에 유천은 평상시에 억눌러온 정욕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안 된다. 참아라.’
무방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상대는 DCD의 수장이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자. 아직 아군도 아닌 그런 상대에게 약점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럼 시작하지. 일단 네가 하연씨에게 넘기겠다는 이그드라실과 관련된 정보. 그건 그녀의 원수와 관련된 거냐?”
“네에...”
대답을 하는 엘리스의 표정은 아까와 같이 웃고 있었고, 늘어지는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유천은 순간 그 분위기가 돌변했음을 알아차렸다. 마치 거대 기업의 회장과 같은.
“하지만 흐름이 바뀌었죠... 유원씨는 그 대가로 제가 받기로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오...?”
“...나에 대한 정보였지.”
“네에...맞아요. 하지만 제가 유원씨를 알아버리고 만난 이상 그건 이제 대가에 적합하지 않아요오...설마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셔놓고 정보 값을 받아 가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옛 북한 땅에 갑자기 드러난 호두호수, 인천에서 일어난 여러 전투들, 거기에 황금새 테러사건까지. 엘리스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 이변들의 원인. 그리고 엘리스는 그를 만나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당사자가 유천이라는 걸. 아니 그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유천이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다른 것들은 대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다.
“그래도 제가 밀항한 것도 있고, 호텔 관리를 제대로 안 한 걸로 피해를 보신 게 있으니...전부 알려드릴게요오...”
“......”
“거기에 더해 발토와 저 사이의 동맹까지 어떠신가여...? DCD의 모든 것인 저는 유원씨 당신의 등에 날개를 달아 드릴 수 있어여...”
“그게 왜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제가 본 당신은 잿더미의 왕이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니까여....”
엘리스가 유천에 대해 아는 건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 중 확실한 건 있었다. 가진 힘에 비해 비밀이 많다는 것. 그리고 아래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한마디로 신중하다.
즉 그는 힘으로 지구를 부수고, 공포로 세상을 지배할 생각이 없다는 거고 그 말은 이 지구를 식민지가 아닌 본진으로 여긴다는 말과 동일하다.
“몰랐으면 모를까 당신을 안 이상 저희는 당신과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당신과 싸워 이길 수도 없을 거 같고여...”
“그건 누구의 의견이냐?”
“드라고니아를 대표한 저의 의견이죠...”
“미국은 아니라는 거군?”
“제가 미국의 주인은 아니니까요...하지만 그곳에서 감히 저를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없답니다...그랬다가는 모든 걸 잃을 테니까요오...”
엘리스는 달콤하면서도 늘어진 목소리로 살벌한 말을 내뱉었다. 유천은 부드럽게 휘어진 파란 눈을 쳐다봤다.
‘나쁘지는 않아.’
드라고니아의 지구 대표이자 세계협회의 최고 실세인 DCD의 지배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반고를 견제할 수 있다. 즉 중화연맹과 천황국을 밀어내는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거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쁜 아프리카 대륙의 AMCU나 유럽은 그놈들만 처리하면 손쉽게 차지할 수 있다.
‘분명 파트너로서 그녀만 한 사람은 없겠지.’
거기에 엘리스의 합리적인 성격을 봤을 때 배신의 여지는 적어 보였다. 그리고 왕이라는 표현으로 스스로를 유천 아래로 두는 모습까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한 가지 그 우위에 있다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군.”
아쉽게도 왕의 머리 위에 서려는 신하는 고금을 통틀어도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네...?”
“엘리스 네가 나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왔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모르는 것도 있군. 난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알아.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우리들 사이의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무슨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걸까여...?”
“중앙세계에는 여섯 개의 세계수가 있지.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이그드라실과 드라고니아의 경계에 겹쳐져 있고 말이야.”
유천의 말에 엘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그드라실 의회에는 상원의원 114명 그리고 하원의원 246명이 존재하지. 그들은 각각 크게 강경무투파와 중립 그리고 유화파로 나뉘어있고.”
유천은 엘리스의 굳은 표정을 보며 싱긋 웃었다.
“드라고니아는 그중에서 가장 큰 세력인 강경무투파와 그 세계수를 두고 갈등을 벌이고 있다.”
“...그게 지금 이야기랑 무슨 관계가...”
“마르포세가문.”
“그, 그걸...”
“왜 궁금한가? 내가 어떻게 하연씨의 원수를 알고 있는지가?”
엘리스의 얼굴은 굳은 걸 넘어 새하얗게 변했다.
“역시 엘리스 파셀. 정말 대단한 사업가야. 절대로 이득을 놓치는 법이 없어.”
유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운 반려견을 쓰다듬듯.
“마르포세가문은 강경무투파를 대표하는 다섯 가문 중 하나. 즉 너희 드라고니아와 가장 골이 깊은 가문이지.”
유천의 손이 머리에서 얼굴을 넘어 어깨와 팔을 쓰다듬자 엘리스는 몸을 흠칫 떨었다.
“원한과 복수심은 성장에 최고의 원동력이 된다. 너희는 하연씨의 잠재력을 알아봤을 거야. 그리고 판단했겠지. 그녀라면 드라고니아가 굳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마르포세를 치울 수 있을 거라고.”
실제로 게임에서도 양하연의 손에 마르포세가문이 멸문했으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너는 상대에게 무한정으로 무언가를 주는 것 같이 말했지만, 아니 실제로도 그 거래 상대는 너에게 큰 감사를 느끼겠지. 정말 대단한 수완이야.”
유천이 없었다면...
양하연은 자신의 원수를 알아낸 후, 뒤에서 엘리스의 지원을 받고 성장해서 드라고니아의 적을 죽이는 칼이 될 것이다. 그녀도 모르게.
“참 건방져 진짜 아래로 들어오려고 했으면 그런 수작질도 부리면 안 됐지.”
“저희는 수직 관계가 아니...”
“아니라고? 지금 감히 드라고니아도 아닌 고작 DCD 따위가 나와 동등한 관계를 맺겠다고 한 거냐?”
엘리스는 잡힌 양팔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유천의 포악한 힘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강제로 범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 무슨 소릴...! 읏...!”
엘리스의 팔을 타고 올라간 유천의 손가락이 쇄골을 지나 가슴 윗부분을 스쳐 지나갔다.
태어나서 처음 당해보는 성추행. 그 낯선 감각에 그녀는 몸을 빳빳이 세웠다.
“아델리아 그 여자가 분노할까? 그럼 화이트 일족은 나와 싸우려 하겠지.”
“으읏...”
“그리고 그 화이트 일족마저 부순다면 용왕은 어떻게 나올까? 나와 싸우려 할까? 아니면 협상을 하려고 할까? 응?”
“그, 그만...! 하읏...?!!”
유천이 손가락으로 가슴 윗부분을 스치는 걸 넘어, 두개의 커다란 둔덕을 거칠게 움켜쥐자, 엘리스의 파란 눈이 커지며 등허리가 휘었다.
“아니 그 전에 네가 드라고니아에 말하지 않을 거 같네. 넌 재능 넘치고 똑똑하니, 나한테 능욕당한다고 해도 싸우는 걸 선택하지 않을 거야. 그 결과가 결코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는 걸 알 태니까. 그렇지 않나?”
“하앙...하읏...하앙...”
엘리스는 거칠게 가슴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유천의 뜨거운 손길에 멍하니 나리아노의 말을 떠올렸다.
‘엘리스님. 그 남자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걱정을 시작으로 이어진 유천에 대한 또 다른 정보들. 기어오른 벌레 중 하나의 두 눈을 뽑아버린 것이나, 몰래 한국에 입항한 자신을 죽이고 드라고니아를 공격할 의사를 표현했다는 것 등.
‘그,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에...아읏...!’
발토의 내부이사 유원은 단순히 신중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시와 때가 맞으면 얼마든지 힘을 쓰는 걸 망설이지 않는 패군(?)이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나?”
“네에...? 하앙?!! 아파요오...!! 꼬, 꼬집지마아아...!!”
“집중해.”
엘리스는 멍하니 생각하다가, 어느새 스포츠 브라 안으로 들어온 유천의 손이 자신의 유두를 비틀자 고통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허락도 없이 내 구역에 들어와 놓고 거기에 건방지게 발토와 나를 속여서 이용해 먹으려 한 너를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 제발...으읏...! 아, 아파여...”
유천은 중앙세계로 진출하기 전 지구를 자신의 아래로 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지구에서 자신의 허락 없이 대등한 관계에 서려고 하는 녀석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건 엘리스 파셀 또한 마찬가지. 이 암컷의 머리에 새겨줘야 한다.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를. 그리고 이 세계에 와서 많은 것을 본 유천은 어떻게 해야 암컷이 굴복하는지 알고 있었다.
유천은 엘리스의 부드러우면서도 커다란, 그리고 단련된 몸에 맞게 탄력있는 유방에서 손을 뺐다.
“헥...헥...”
갑자기 포식자로 돌변한 유천에 대한 긴장감, 처음 겪는 일에 대한 혼란, 밖에서 당한 유사강간 행위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수치심 등의 요인으로 엘리스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 이게 아닌데에...’
엘리스의 본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유원의 곁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며 하나하나 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동등한 관계로 가까워진 후에 결격 사유가 없다면 반려로서 함께 하려는 그녀의 앙큼한 계획은 강렬한 수컷으로 돌변한 유천에 의해 깨져나갔다.
‘이, 이러면 안 돼애...’
세상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여성의 상징 중 하나를 유천에게 무참히 쥐어 뜯겼으면서도 엘리스는 분노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녀보다 나약했다면 모를까. 압도적이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컷의 거친 기세는 용이라고 하지만 암컷에 불과한 그녀가 저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봐 엘리스 파셀.”
“으읏!”
“날 봐라.”
유천은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헐떡이던 엘리스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누, 눈이...’
잔잔하다. 감히 주제도 모르는 암컷이 자신을 농락했다는 분노도, 고고하고 드높았던 여인을 희롱했다는 성적인 흥분도 없었다.
유천의 검게 가라앉은 눈은 처음 국밥집에서 마주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국밥집에서 나와 마주친 양아치나 엘리스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였다.
‘분해...’
차라리 화를 냈다면, 이성을 잃고 자신을 강제로 범했다면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 거다. 요녀인 그녀에게 그런 수컷을 다스리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스가 보아온 수컷 중 누구보다 완전무결한 유천의 완전한 무시는 억지로 가슴을 범해졌을 때 이상으로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심장에 불을 일으켰다.
인정받고 싶어.
신뢰받고 싶어.
저 무심한 눈에 나를 담고 싶어.
좀 더 나를 애정 어린 눈으로 봐줬으면...
‘아...그렇구나...’
그녀는 깨닫고, 인정했다. 상대가 자신의 그릇으로 담을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걸. 사람으로서도, 그것을 떠나 암컷과 수컷으로서도.
“하아...하아...”
유천의 용암같이 뜨거운 검은 늪에 빠져 들어간 엘리스의 숨결에서는 서서히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 어떻게 할 거냐? 엘리스 파셀.”
듣기 좋았던 음색이 악마의 속삭임이 되어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마, 만약 거부한다면...어떻게 할 거죠오...?”
엘리스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지만, 유천은 그 저항을 보고 귀엽고 하찮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예에...?”
“아무것도 안 한다.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한 대가는 이걸로 받았으니까.”
“무슨...하응...!”
유천이 한 차례 가슴을 움켜잡고 놓자 엘리스는 아까와는 다른 뜨거운 신음을 쏟았다.
“미국에는 몸 성히 보내주지. 대신 다음 거래는...이렇지 않을 거야. 좀 더 차갑고 사무적이며 서로의 위치를 명확히 하겠지.”
“......”
“말해라. 엘리스 파셀. 네 선택은 뭐냐?”
자신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확신.
‘아...’
네가 말할 것을 알고 있다는 유천의 눈빛에 엘리스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상대는 결코 자신이 담을 수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용인족의 감이, 암컷의 본능을 요동치게 하는 매력적인 상대를 한낱 자존심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구나아...’
그럼 방법은 하나뿐. 상대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없다면 내가 소유물이 되면 될 뿐.
우르릉...
최후의 자존심이란 벽이 무너진 엘리스는 유천의 목을 손으로 휘감고 입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쪽...”
엘리스의 복종을 담은 입맞춤에 유천은 혀를 밀어 넣었다.
“후읍!? 하음....쭈웁...헤읍...”
입안을 파고든 혀에 엘리스는 눈을 크게 떴지만, 다시 눈을 감고 고분고분하게 거기에 자신의 혀를 얽었다.
나에게 당신을 보여주세요...
나를 당신의 색으로 물들여주세요...
나를 가져주세요...
오로지 자신의 흐름에 복종한 진한 딥키스에 유천은 진하게 그녀의 입술을 빨아 당긴 후 입을 땠다.
“하아...하아...”
서로의 입술을 연결한 진득한 침, 붉게 달아오른 볼, 촉촉이 물든 푸른 눈빛을 보며 유천은 입을 열었다.
“엘리스.”
“네에...”
“넌 드라고니아의, DCD의 수장 엘리스 파셀이냐?”
“전...”
이건 그녀를 수하이자 함께 길을 걸을 파트너로 삼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마지막 테스트였다. 그리고 엘리스 또한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안에서 그녀의 위상이 정해진다는 걸.
잠시 입을 멈춘 엘리스는 결심한 듯 평상시의 늘어지는 말투조차 고치고, 정색한 후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전...드라고니아의 엘리스에요...그리고...당신의 엘리스랍니다.”
“드라고니아는 포기하지 못하는군?”
“드라고니아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진정한 고향, 그리고 저의 프라이드입니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포기할 수 없어요.”
“......”
“아직은요.”
그리고 정색을 푼 후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드라고니아를 대신해서 저의 모든 것이 되어보세요.”
“......”
스스로 유천에게 복종했지만, 여전히 당당하며 고고하다. 감히 대놓고 자신을 시험하는 말이었지만 유천은 처음으로 환하게 진심으로 웃었다.
“고유천.”
“예...?”
“그게 내 본명이야. 앞으로 잘 부탁하지 파트너.”
“아...”
그 말의 진의를 깨달은 엘리스 또한 유천을 따라 환하게 웃었다.
"제 이름은 엘리스 파셀. 잘 부탁해요. 유천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