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엘리스 파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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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가 지나간 듯 보이는 산길. 차 한 대 없는, 드문드문 존재하는 조명 아래. 날아돌아가도 되었지만 유천과 양하연은 인도를 아무 말도 없이 걸어 내려갔다.
“그래도 되었던 걸까?”
묵묵히 아무 말 없이 걷던 양하연의 물음에 유천은 고개를 돌렸다. 키 차이 때문에 보이는 거라고는 백금빛 머리와 가운데 귀엽게 난 정수리뿐이었다.
“왜요? 제가 너무 잔인했던 게 마음에 걸려요?”
“아니 설마.”
양하연은 코웃음을 냈다.
“입 잘못 놀려서 그것과 관계없는 사람들 수십 수백이 죽는 것도 봤는데. 그 정도는 예사지.”
왕국과 제국의 귀족들.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한 그들은 어제저녁에 무얼 먹었느냐 가지고도 명분을 잡아 상대방을 죽이기도 한다. 그런데 한쪽이 힘도 명분도 압도적으로 밀린다? 전부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니 내가 혹시나 이번 일로 유천이 너를 뭐 다르게 보거나 하는 건 없으니 괜히 눈치 보지 마. 너 눈치 본다고 나도 숨이 탁 막히니까. 알았니?”
“...그렇게 티가 났나요?”
아무리 죽일 만했다고 하지만 양하연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좀 그랬었는데 그게 다 보였나 보다.
“그래. 내가 묻는 건 그 여자 눈, 특별해 보이던데 그렇게 해도 되겠느냐는 거였지. 너의 잔혹함을 탓하는 게 아니야.”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오히려 익숙해지면 더 좋지. 더 나쁠 건 없을 테니까요.”
“응?”
“음...그러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아직 양하연은 하이랭커가 아니다. 그녀는 유천 자신이 보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시각장애인의 청각이 뛰어나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건 유사과학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죠.”
유천이 본 유경하의 능력은 눈에 한정해 있지 않다. 유천의 공간안이 눈에 귀속되지 않은 것처럼. 유경하의 능력이 어떤 세상을 그녀에게 투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유천의 힘이 그 작은 머리를 터뜨리려는 순간 보았다.
두 눈이 사라지면서 그 힘이 확장하는 것을. 아마 일종의 희생 술식. 생명이 아닌 신체 일부를 바치는 저런 방식은 유천도 처음 보았지만, 그 덕분에 그녀는 살 수 있었다.
‘마나 자체를 움직일 수 있다니.’
세상을 구성하는 것의 최소단위는 마나. 유천의 상식상 그것을 가공해서 사용하는 건 가능하지만 마나 자체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유경하의 힘은 세상에 퍼진 마나 자체를 움직였다. 유천은 거기서 마치 세상이 자신의 힘을 부정하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 가혹한 훈련을 받고도 살아있다면...그 여자는 쓸 만한 조커가 될 겁니다.”
자신이 지닌 특이성을 깨닫는다면 그 여자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유천은 기대가 되었다.
“흠...그건 그래 유천이 네게 맡길게. 그나저나...”
“네 슬슬 꼬리를 떼어내야겠군요. 그만 나오시죠.”
뚜벅뚜벅...
구두가 딱딱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명의 어둠을 헤치고 흘러나왔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 말과 함께 유천의 앞을 한 명의 여자를 중심으로 한 네 명의 일행이 막아섰다.
연보라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육감적인 몸매. 색기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여자의 분위기는 사무적이었다.
뒤에 서 있는 세 명도 마찬가지. 하나같이 보기 드문 미남미녀였지만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니 그들은 눈 앞의 여자와는 달리 두려워하는 걸로 보였다.
“모를 거로 생각했습니까? 호텔을 나올 때부터 따라오셨는데 말이죠. 저 가장 위층에서부터 말입니다.”
“...실례했군요. 처음부터 아시고 계셨을 줄이야. 죄송합니다.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여자가 90도로 고개를 숙이자 깔끔하게 한데 묶은 기다란 머리가 흘러내려 왔다.
“아뇨 상관없습니다. 그쪽이 누구인지 아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유천이 있던 레스토랑보다 위에 있는 곳에서부터 느껴졌던 기세. 착각은 아니다. 호텔에서 자신과 양하연을 제외하고도 랭커급의 기세를 품은 사람은 이 여자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랜드 파에타 호텔의 지배인이겠죠. 거기에 지구에 존재하는 랭커는 아니고. 인간과 심장 소리가 달라. 엘리스 파셀이 최대주주로 있는 호텔이니 그럼 드라고니아 출신 용인족이신가?”
유천이 서서히 말을 낮추기 그랜드 파에타 호텔 지배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 알고 계시니 저에 대한 말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자가 나를 왜 미행한 거지?”
“미행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실 몰래 드리고자 하는 말이 있어서....”
“호텔의 손실에 대해서는 갚도록 하지. 하지만 그전에 그쪽이 손님 관리를 잘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게 개새끼인지 아니면 사람 새끼인지 구분을 잘했어야지.”
“......”
“애초에 이런 꼴 보기 싫었으면 위에서 가만히 구경하고만 있었으면 안 됐지 아닌가?”
유천이 김민경과 갈등을 겪고 있을 때 그의 초월적인 육체는 저 높은 곳에서 내려 보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맞습니다. 저희의 잘못이지요.”
“응?”
도발에 가까운 유천의 말에도 그녀는 어떠한 흥분도 하지 않았다. 지구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엘리스 파셀이 이런 호텔의 지배인을 맡길 정도면, 거기에 드라고니아의 용인족 랭커라면 그만한 오만함을 보여줄 거로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역린 때문인가?”
용인족이 지니고 있는 역린. 용인족이 지닌 가장 큰 약점인 그것은. 가장 민감한 부분이면서 민감하기에 신체 어느 부위 중에서도 가장 먼저 상대를 파악한다.
“역린이 아니더라도...그런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셨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증명이 된 양하연과 달리 발토의 내부이사인 유원은 온갖 정보들이 넘쳐나는 DCD에서도, 아니 적어도 드라고니아의 선이 닿는 중앙세계 어디에서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없었다.
아는 거라고는 지구에서 발생한 일들과 관련된, 예를 들면 황금새 테러사건을 제압했다는 것. 그리고 본신의 실력이 양하연 이상이라는 것 정도.
화이트 일족의 아델리아가 자신의 직계 제자인 엘리스를 위해 보낸 측근 중 한 명인 나리아노는 아까의 끔찍한 기세를 떠올리자 몸이 굳었다.
‘양하연 이상이라고? 다 틀렸어...이 자는 괴물이다...’
화이트 일족에서 가장 강하다는, 자신이 모시는 장로 아델리아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녀라도 저 정도로 포악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랭커, 그것도 강인한 용인족이었기에 견딜 수 있었지. 지금 자신을 보좌하기 위해서 따라온 뒤의 세 명은 그때 애벌레처럼 쓰러져 꿈틀거리기밖에 할 수 없었다.
‘마치...용왕님을 보는 것 같은...’
랭킹 9위. 드라고니아의 로드. 용왕(王) 마케아누르켈. 아델리아와 대화를 나눌 때 한 번 본 그분처럼 숨을 쉴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큼...”
이 이상 생각을 이어나갔다는 불경을 저지를 것만 같아 나리아노는 생각을 멈췄다. 그분은 오랫동안 드라고니아를 이끌었던 지도자이자 절대자. 아직 정체도 모르는 이 유원이라는 자를 그런 분의 위에 놓을 수는 없다. 이건 용인족으로서의 프라이드의 문제였다.
“아무튼 이번 일에 대해 저희는 발토를 비롯해 그 내부이사님이신 유원님께도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습니다. 당연히 금전상의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그것 말고 저희와 할 이야기가 뭡니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상대에게까지 으르렁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유천은 맥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재 제가 모시는 분께서 유원님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스 파셀?”
“예.”
“하연씨가 아니라 저에게요?”
“예.”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는 건 알겠는데 말이야...’
“3일 뒤에 한국에 들어와 만나면 될 것을 굳이 지금 할 말이 있다는 겁니까?”
“그...사실...”
나리아노는 마치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 마냥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천과 양하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지금 그녀가 한국에 있다고요?”
“예...”
“하하...그건 또 무슨...”
3일 뒤에 공식 방문을 할 그 여자가 왜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언제 들어온 겁니까?”
“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나리아노는 낮게 으르렁대는 유천을 도저히 쳐다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틀 전입니다...”
“뭐? 이틀 전? 하하하하!”
유천은 한차례 시원하게 웃은 후 그녀를 노려봤다.
“이 무시는 드라고니아나 미국의 뜻이냐? 아니면 그녀의 의사냐?”
엘리스 파셀이라는 거물이 한국에 몰래 5일 전에 방문했다. 그것도 협회도 한국의 수호길드인 발토조차 모르게.
“그 여자는 생각이 없는 건가? 내가 가서 그 여자를 찢어발겨 놓아도 너희는 할 말이 없을 텐데? 아니면 드라고니아나 미국이라는 배경을 믿고 설치는 거냐? 네년 눈에는 내가 그곳들을 두려워할 거 같기는 하고?”
이건 고작 김민경 같은 일개 각성자가 기어오른 것과는 다른 국가와 국가, 세력과 세력 간의 분쟁이 일어날 만한 문제였다.
유천이 없었다면 모를까? 그가 있는 이상 지금의 미국의 전력은 한국보다 위라고 말할 수 없었다.
“큭! 아, 아닙니다! 드라고니아나 미국, 그리고 그분에게도 당신들을 무시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그 분을 붙잡기도 했고요!”
유천이 발하는 기세에 시야가 점차 멀어지며 의식이 차단당하는 기이한 감각을 느끼며 나리아노는 이대로 쓰러졌다가는 상대가 오해한 상태로 일을 저지를까 봐 다급히 소리쳤다.
“납득시켜봐.”
“네?”
“그 여자가 미리 그것도 몰래 들어온 이유. 이해시켜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는 나를 그저 조금 강한 일개 랭커라 생각하고 행동했다고밖에는 여겨지지 않아. 여기에 그것 말고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나? 응?”
“......”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드라고니아나 미국 또한 그녀가 걸린다 해도 적당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로 여겼고 말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어. 이 남자가 용왕님과 비견되는 자라는걸.’
알았다면 진즉에 무슨 일이 있어서도 뜯어말렸을 거다. 아니 말리지 못했다고 해도, 한국의 협회나 발토에 알렸겠지.
“너가 날 이해시키지 않으면 너와 엘리스 파셀을 죽일 거야. 그리고 미국으로 넘어가 게이트를 타고 드라고니아로 가서 아델리아에게도 책임을 물을 거다. 궁금하지 않아? 용왕은 과연 나를 죽이려고 할지 아니면 사죄와 함께 그녀를 바칠지?”
‘나로서도 나쁘지 않아.’
안 그래도 사방에 자신을 도발할 만한 세력들이 넘쳐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혼자 13 위원회 일각인 드라고니아로 쳐들어가 화이트 일족을 반쯤 부수고 나면 눈치를 좀 볼 것이다.
위원회의 개입은 문제없다. 차원의 멸망과 관련될 정도로 큰 것이 아니면 위원회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처음으로 전력으로 날뛸 수 있겠군.’
유천은 이 한 번 달아오르면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힘을 해소할 곳이 없어 난감했는데 잘 됐다는 생각에 씨익 웃었다.
‘어쩌지...?’
나리아노는 입을 열기가 망설여졌다. 엘리스 파셀이 몰래 한국에 들어온 이유가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하찮아서 과연 이 사납게 웃으며 분노하는 괴물이 이해할 지가 문제였다.
“그...예전에 한국을 방문하기 전...그분이 이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습니다.”
“뭐?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냐?”
“일단...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나리아노는 도저히 한 마디로 이 남자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서 이 일이 일어난 계기부터 말하기로 했다.
“한 나라를 알려면 당연히 뭐겠습니까? 의식주지요. 그 중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식 아닙니까? 그래서 가장 흔하면서도 이 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는 대중적인 음식을 드신 적이 있습니다.”
“네 국밥이었습니다. 제 입맛에는 안 맞지만...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튼 국밥을 드신 그분은 그것이 태어나서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고...”
“아니 시발...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 그러니까!”
“삼 일 뒤에 들어오면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당연히 최고의 것들만 들여오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신 그분은 당연히 국밥은 그런 감성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아니...그러니까...”
이쯤 되면 유천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그 여자가 일정보다 빠르게 몰래 들어온 이유가 식도락 여행을 즐기려고 그런 거라고...?”
“고, 공식적으로 들어오면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 않습니까?! 그, 그래서!”
‘이걸 내가 왜...’
엘리스 파셀의 재능은 대단했다. 혈통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드라고니아의 용인족들이 그녀 안에 잠들어 있는 용의 인자가 지닌 가능성을, 동족으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여길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아델리아의 명령으로 그녀를 모시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나리아노는 자신보다 어린 엘리스를 존경하고 존중했다.
그리고 나리아노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번 명령에 원망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말하고 납득시키라는 건가?! 한국 현지의 국밥을 먹고 싶다고 몰래 들어왔다고 말이다.
나리아노가 치솟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눈을 감자, 유천은 생각도 못 한 그 말에 한탄을 내뱉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그녀가 말하라고 한 건 뭡니까...?”
“네...? 납득하신 겁니까?”
나리아노는 유천이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받아들인 걸로 보이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됐습니다. 그게 진짜든 가짜든 이제 다 귀찮아졌어요...”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엘리스 파셀. 랭커 중에 그렇지 않은 자도 드물지만, 그걸 포함해도 그녀는 유천이 본 누구보다 괴짜일 거라는 걸 말이다.
‘그런 인간은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는 게 마음이 편해.’
“그, 그럼!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리아노는 유천이 생각을 바꿀까 두려워 재빨리 입을 열었다.
“큼큼...그러니까 한 마디로 ‘장소와 시일만 말해주면 찾아갈 테니 3일이 되기 전에 개인적으로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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