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변화(5)
* * *
카트레나가 사라지는 걸 지켜보던 아르벨라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주 그냥 고풍스러운 척 귀부인인 척은 다 하더니 나보다 미친년이야.”
일곱별의 저주를 타고 나서 신의 대가 없는 사랑을 받아, 천살지멸이라는 희대의 심법을 익혀 살기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아르벨라가 봐도 카트레나의 눈가에 맴도는 투기와 살의는 만만치 않았다.
“주군...”
“어 유라 고생했어.”
“아닙니다...”
아르벨라와 카트레나 사이의 기 싸움에 얼굴이 새하얘진 유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너도 이야기 들었지?”
“아뇨. 제가 감히 들을 내용이 아닌 것 같은지라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 중천의 검이 직접 자신의 주군을 찾아와 나눈 담화였다. 아무리 유라 자신이 흑경의 이인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허락도 없이 엿들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 다행이네. 꽤 곤란할 뻔했어.”
“......”
‘역시 일부로라도 귀를 틀어막는 게 정답이었어...’
둘이 상하를 넘어서 꽤 친하게 지내고 있다 하더라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리고 아르벨라는 안 그런 듯 보여도 그것에 누구보다 철저했다. 만약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이 절대로 다른 곳에 알려지면 안 되는 종류고, 자신이 그것을 들었다면...
씁쓸한 일이지만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서 주군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죽이...
“안 죽여 임마.”
“네...?”
“너가 들었으면 조금 곤란할 뿐이지. 그렇게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곤란한 내용이다. 당대의 절대자들이 힘을 합쳐 맹약을 어기겠다니. 맹약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자들에게 알려졌다가는 계획이 시작되기도 전에 중앙세계에서 발생할 내전부터 수습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짜증 나게 침울하게 있지 말라고.”
하지만 일개 하이랭커가 알고 퍼뜨린다고 해도 문제가 될 여지는 없다. 얼마든지 짓눌러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로 내가 너를 믿고 있다는 의사표현을 하는 걸로 더욱 확고한 충성심을 새겨 넣을 수 있으면 그게 더욱 이득이다.
이미 돈과 명예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쌓은 하이랭커들은 오히려 이런 사소한 믿음 같은 것에 무게를 두기 마련이니까.
“주군...”
거봐라. 고작 어깨를 다독이며 한 흔하디흔한 달콤한 말에 저렇게 감동을 하고 울먹이지 않는가?
‘그 할망구만 미친 게 아니었네.’
당연하다는 듯 믿음을 이해타산으로 치환하는 식의 사고방식을 하는 게 비정상적이라는 건 아르벨라도 알고 있다.
‘빨리 만나고 싶어요...나의 신이시여...’
그러니 만나야 했다. 나의 마음, 정신, 몸 그 모든 것의 주인.
오로지 그 앞에서만 나는 아이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오로지 그 앞에서만 거짓되지 않은 진실한 자신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너가 알아둬야 할 것들은 나중에 정리해서 건네줄게.”
그러니 주어진 2개월 빨리 찾아야 한다. 오랜 세월 잊지 않았던, 잊을 수 없었던 애정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곧 그 품에 안길 수 있다는 생각에 아르벨라는 신이 사라지고 잃었던 진실 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유라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지금은 좀 놀자고.”
만나러 갈게요...나의 신이시여...
*
“어우 시발...왜 이렇게 소름이 돋는 거야?”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징조인가?’
영무문과의 충돌이 일어난 후 한 달이 지난 지금 유천은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의 힘에 대한 파악이 어느 정도 되었다. 이 초월적인 몸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반응을 일으킬 리는 없다. 분명 인지를 벗어난 무언가를 예지한 것일 터.
“나중에 알아봐야겠군.”
유천은 시일을 다툴 일은 아니라고 느꼈다. 이상하게도...본능은 위협이 될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었으니까.
‘심상치 않은 일이지만 위험한 것은 아니라...’
흥미로웠지만 일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유천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국내 최대 호텔인 그랜드 파에타 호텔의 최상층 레스토랑. 너무도 바빠서 한 달이 되어서야 양하연과의 식사를 예약한 곳이었다.
그랜드 파에타 호텔 레스토랑은 파인다이닝. 하루에 많아야 열 테이블을 받는 이곳은 1년 전에야 미리 예약해야 하는 곳이었지만, 한국의 수호계약 길드 발토. 거기서도 유일한 내부이사와 길드장이란 자리는 얼마든지 예외를 만들 수 있는 권력을 지녔다.
“이런 옷도 입어볼 날이 올 줄이야.”
파인다이닝은커녕 양식집도 별로 가보지 못한 유천은 그냥 깔끔한 코트를 입고 가면 되려니 했지만.
“장난쳐요?”
“예...?”
“누가 그런 가게를 가는데 그런 옷을 입느냐고요? 저 망신주려고 작정하신 건가요?”
“......”
유천이 싱글싱글 웃으며 그 예쁜 녹색 눈으로 욕하는 양하연의 시선을 피하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카드를 내밀었다.
“하아...여기요.”
“그...이걸 왜?”
“백화점에서 양복 하나 맞춰 입고 오세요. 이 카드 내밀고 제 이름을 대면 최고급으로 맞춰줄 거예요. 훈련장에 박혀계신다고 카드도 없으시잖아요?”
사실이다. 근 한 달, 발토의 내부이사로서 필요한 자리에 나가거나 식사를 하는 것 말고는 훈련장에서 얻은 깨달음을 수습하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원래 이래야 한다는 듯 쑥쑥 성장하는데 멈출 수가 있어야지.
“유천씨가 무슨 산속 무도가처럼 훈련에 빠져 있는 사이 발토의 위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발토의 내부이사가 언제 방문한다는 연락만 넣으면 곧장 관리자가 내려와 프리미엄 관으로 모실 거예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권력을 이용하는 재미도 좀 누리고 그러세요.”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곧장 다음날 백화점에 들르자 10여 명의 직원들을 대동하고 내려온 중년인이 굽실거리며 유천을 데리고 올라갔으니까.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아직 권력의 맛을 못 느껴서일까. 유천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을 겪었지만 거북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옷 집에서도 종업원이 무시해줬으면 하는 타입이라고.’
“그래도 확실히 이런 걸 보면 현대판타지 세계답네.”
맞춤정장이란 건 본래 유천의 상식상 족히 한 달 이상은 걸려야 하는데 일주일도 안 돼서 받아 입고 식당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런 별거 아니지만, 일상적인 부분들이 한 번씩 이곳이 원래 유천 본인이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걸 상기시켜줬다.
‘뭐 상관은 없나?’
어차피 전에 살던 세상에서도 자신은 고아 출신에 끈끈한 인연은 없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킬리언이라던가 이지연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가는 양하연 등 새롭게 사귄 인연들이 더욱 깊게 느껴졌으니까.
거기에 세속적인 이유지만...그들 하나하나가 전의 세상이었다면 감히 손 한 번 잡을 수 있을까 싶은 미인들이지 않은가?
지금도 그 중 한 명이랑 데이트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러 가는 중이었고.
“그런 좋은 날에 너희는 뭘까?”
“발토 내부이사 유원 맞나?”
“맞는데 너희 누구냐고?”
시간도 넉넉한지라 약속 장소로 걸어가는 유천의 앞을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10여명의 복면 일당이 막아섰다. 그 중심 대장처럼 보이는 거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따라와라.”
“...이거 웃긴 새끼네. 내가 누군지 아는데 뭘 믿고 그리 당당하나?”
“알지. 양하연 그 계집년 기둥서방.”
“뭐?”
아니 시발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런 제비 새끼 취급을 받는 거지?
“뭘 그리 당황해 하시나?”
복면으로 가려졌지만,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두 눈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거기에는 다 알고 왔음에도 부정하는 상대를 보는 것 같은 가소로움이 물씬 느껴졌다.
“공식 석상에서는 꼭 양하연 옆에 붙어서 등장하고 그 이외에는 외부활동을 하지 않는 내부이사라...말하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 아닌가?”
“......”
“생긴 거에 비해 아랫도리가 꽤 튼실한가 보군. 아 아닌가? 그 년의 아래 입이 부실한 건가? 큭큭...”
하하하!!
어이! 나도 한 번 먹어 보자고!
유천은 자신과 양하연을 두고 온갖 모욕을 하는 놈들을 무심히 쳐다봤다.
‘일단 전문 살수들은 아니네.’
하나하나 느껴지는 기운은 제법이지만, 태도는 저열하기 짝이 없었다. 프로였다면 저딴 말을 지껄이기 전에 자신을 습격했겠지.
' 빌런이거나 행실이 안 좋은 각성자인가. 어딘지 대강 예상은 가지만...조금만 더 떠볼까?’
“이유가 뭐지? 발토와 한국 간에 수호 계약을 맺은 걸 모르나?”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복면들의 대장은 지금까지 웃던 모습을 감췄다.
“수호 계약이라 함은 결국 한국 내 모든 길드가 발토의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 아닌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괴수나 빌런으로 인한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그 국가 내 모든 각성자들은 협회가 아닌 수호 계약을 맺은 집단의 명령을 따르게 되니까.
“우리가 그런 듣도 보도 못한 길드 아래에 들어가야 하나? 그것도 한낱 계집과 그 좆박이 새끼의 명령을 들으면서 말이다.”
계집이니 좆박이니, 유천은 그건 몰랐지만, 한국 내 길드들이 협회가 독단적으로 맺은 수호 계약에 불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뭐 더 들을 필요도 없나?’
확실히 알았다. 놈들이 누군지.
“그러니 그만 조용히...”
“멍청한 놈들.”
“뭐?”
“야 이 허술한 새끼야 적어도 정체를 가릴 거면 억양도 숨기고 왔어야지 멍청한 것아. 그렇게 저 경상도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누가 모르겠어. 어?”
“무슨...”
순식간에 동요하는 복면들을 보며 유천은 낄낄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구라다 병신아.”
"이 새끼가..."
사실 유천의 앞에 있는 놈들은 그 정도로까지 허술하게 준비해오지는 않았다. 그저 마지막 확인을 위해서 해본 블러프였을 뿐.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길드 중 수호계약을 맺으면 가장 큰 피해를 볼 단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 황금새는 아작나서 찢겨나갔다. 여명은 돌아간 유르힘이 관리하고 있다. 그러면 남은 하나 부산의 해원.
그걸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여러 이권이 이어진다.
“예를 들면 주변에 사람들이 사라졌다든지 말이야.”
이곳이 서울에서도 외곽지역이라고 하지만 한참 사람들이 나다닐 저녁 시간에 텅 빌 수는 없다.
마력조작.
그것도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유천이 인지 못할 정도의 은밀한 종류. 하지만 인지한 지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서 바깥으로 작용하는 인식장애 술식이다.
“근데 딱 봐도 무식하게 쌈박질이나 할 거 같이 생긴 너희들이 그런 걸 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아. 그렇다면 마도구겠지. 그래 예를 들면...부적이라거나?”
“......”
“이 정도 은밀성이면 꽤나 귀한 부적일 텐데...천황국 똥구멍을 열심히도 빨았군. 아니 걔네만이 아닐 수도 있지. 중화연맹 아니 영무문도 개입되었나?”
중화연맹이 무인들의 나라라면 천황국은 주술사들의 나라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수호계약을 맺은 차원이 같은 반고라는 것.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영무문이 끼어들었다는 게 과대해석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유천이 말을 이어갈수록 복면들의 살기가 끈적해지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너희는 나에 대해 몰라. 그런데 서울 내부에서 개수작을 피웠지. 즉 협회에 선이 대져 있는 건 아니고...아하...! 정부 고위 인사 중에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 있구나?”
유천은 외부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한 건 아니었다. 머릿속에 사진으로 본 여럿 치워야 할 얼굴들이 떠오르자 미소를 지었다.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군.’
설마 유천에게 시선을 집중시키지 않기 위해 정보를 봉쇄시킨 것과 놈들의 병신 같은 안목이 더해진 결과가 양하연의 기둥서방이라니.
그 취급은 불쾌했지만, 이걸로 한 달간 지지부진했던 한국 내부의 벌레들을 숙청을 진행할 수 있다는 건 만족스러웠다.
"하하하!"
유천이 지은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놈도 따라서 웃었다.
“그래...그냥 내부이사에 올랐다는 건 아니라는 거겠지.”
그 말과 함께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살기.
“당분간 이 주변에 각성자는 없다!”
‘그건 네 기준이겠지.’
이래서 넓은 물에서 놀아야 한다. 실제로 주변에 발토나 날개의 인원들이 없기는 했지만 유천은 고작 랭커도 되지 못한 처참한 실력과 안목으로 장담하는 모습이 한심했다. 거기에 본인 입으로 뒷배가 있다는 걸 알리는 모자람까지.
‘더는 얘기를 나눌 필요도 없겠군. 해원은 고작 이 정도 수준인가?’
이제 슬슬 투기장을 비롯한 인천의 음지 장악, 그리고 국내 정세를 헤아리느라 내버려둔 적폐를 뽑아내야 할 순간이 온 것 같다. 이 놈들 꼬챙이로 좀 찌르다보면 대강 각이 나오겠지.
“놈을 제압...!!”
우뚝
유천이 허공을 부여잡자, 공간에 흐르는 힘이 정지했다. 이미 한 달 전의 깨달음을 완전히 수습한 그에게는 이 정도는 숨 쉬듯 할 수 있는 일개 기예에 불과했다. 그리고 당연히 복면들 또한 달려들려는 자세를 한 채 꼼짝하지 못했다.
‘뭣?!’
복면들의 대장. 해원의 특임조장인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경악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몸을 움켜쥔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머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들려오는 건 패닉과 공포에 거칠어진 숨소리뿐.
‘아무런 마력도 안 느껴지는데 이게 무슨?!!’
중앙세계의 각성자들은 이런 일에 당황할지언정 패닉에 빠지지 않는다. 중앙세계에서 불가사의한 일이란 그리 드문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견문이 좁은 해원의 특임조원들은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 몸에 이성을 잃고 유천의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유일하게 특임조장만이 이 일의 중심에 유천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 티보치나. 하연씨 보러 가는 길에 재밌는 일이 생겨서...”
이 멈춰버린 공간 안에서 유천은 오른손을 움켜쥔 채 내민 채 왼손으로는 멀쩡히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개자식이!!’
웁웁!!
그는 나오지 않는 소리를 내뱉으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유천을 노려봤지만 유천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으며 티보치나와 통화를 이어갔다.
“음 그래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그럼 시체 처리나 이런 건... 아 이 근처에 날개의 인원이 있으니 괜찮다고? 알았어. 그럼 나는 나머지만 처리하고 간다? 하연씨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날개...?’
놈의 입에서 해원의 음지인 마켓을 점점 잠식하는 그놈들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설마...발토와 날개가...?!’
그는 발토와 날개가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둘이 모습을 드러낸 날이 달랐고 설마 그 양하연이 음지와 관련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인지 부조화였다.
그때.
우두두둑
끔찍한 소리와 함께 특임대장의 주변 부하들의 신체가 빨래 짜듯, 과즙기에 넣은 과일처럼 쥐어짜 지기 시작했다.
10초.
피, 근육, 뼈, 지방, 내장이 하나로 엉켜 어육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우우우웁!!
거기다 더욱 두려운 건 그럼에도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는 거다.
주루룩...
소리를 지를 최소한의 자유조차 박탈당하면서 끔찍하게 죽어나가는 부하들을 본 특임대장의 다리 사이로 지린내가 나는 노란 물이 흘러나왔다.
뚜벅뚜벅...
그는 자신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유천을 보았다. 멀끔해 보이는 생김새였지만 착각했다. 놈은 악마였다. 아무리 적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면...사람이라고 생각하지조차 않는 건가...?’
간혹 있다. 상대가 적이라고 판단한 순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는 자들.
“그래 이제 좀 마음에 드는 눈이네.”
그는 자신을 마주하는 검은 눈을, 감는 것도, 떠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쳐다봤다.
거기에 담긴 건 인형을 보는 것 같은 무기질적인 무심함.
그의 가볍기 그지없는 분노는 압도적인 공포에 짓눌렸다.
“내가 충고 하나 할게. 지금 너를 데리러 오는 녀석들이 있거든. 그놈들 아주 잔인한 놈들이야.”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는 공포를 느끼는 와중에도 상대가 지독한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유천의 안쓰러운 눈빛은 앞으로 자신의 앞길이 지옥일 거라는 걸 암시하는 듯했다.
“그러니 가면 묻는 대로 제대로 답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부하들처럼 편히 죽고 싶으면 말이야.”
피잉
그 말과 동시에 들려온 날카로운 소리에 해원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던 특임조장은 의식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