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힘이 마법이다-73화 (73/116)

〈 73화 〉 변화(2)

* * *

거미가 소멸하고 거울 세계가 깨져가고 하늘에서는 유리조각들이 붉은 안개처럼 가라앉는다. 하지만 유천은 여전히 투기를 누르지 않았다.

“이대로 끝났으면 하지만...”

던전보스는 끈질기다. 부서진 세계의 파편의 광기 넘치는 생존 본능을 이어받았기에 쉽게 죽지 않는다. 거기에 거울을 본채 삼는 거울 거미라는 종족 특성까지.

유천의 이성과 본능 둘 다 외친다. 놈의 몸은 소멸했더라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휘이잉...

대기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붉은색이 흔들린다. 아니 바람이 불어오는 게 아니다. 무수한 양의 거울 조각들. 그것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대기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역시나 안 뒈졌구만.”

번경의 거미의 진정한 본체는 거미가 아닌 거울세계 그 자체다. 그래서 랜덤으로 등장하는 특수 페이즈가 존재한다. 육신을 버리고 나서 광기의 생존본능에 의한 거울 세계로의 환원.

하지만 그건 거울들이 남아있을 때의 이야기. 이렇게 가루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살아나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특이점이 존재한다는 것.

‘저주인가?’

저주 특유의 질척거림. 그것이 녀석의 목숨줄을 억지로 잇고 있다는 판단이 섰다. 실제로 유천은 유리조각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현상을 게임 내에서 본 적이 없었다.

즉, 지옥만화경 1절부터 3절을 생략하고 동시에 일격에 거미와 거울 세계를 부수어야 나타나는 진정한 의미의 특수 페이즈.

“난 뭐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을 많이 겪는 건지...”

아니 정확히는 나라는 존재가 그만큼 특수하다고 해야지. 지옥만화경을 생략하고 나타나는 거미와 거울 세계를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나?

쿠구구궁?

유천이 생각을 정리했을 때, 하늘 위에서 적운(赤雲)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의지를 가졌지만,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현상과의 전투를 언젠가 겪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재앙이라는 이름이 붙은 괴물들은 하나같이 비정형적인 생김새를 지녔으니까.

‘이걸 지구에서 겪게 될 줄이야.’

라스트 레거시 시작점을 지구로 하면 정말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가? 너무 심하게 하드모드지 않나? 유천에게 통하지 않아서 그렇지 지옥만화경을 대표하는 세 가지 종류의 저주. 침식, 역류, 분열은 일반인에게도 그렇지만 각성자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만약 이걸 깨지 못한 채 지구에 저 적운이 퍼져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40년을 멸망하지 않고 버틴 게 신기할 지경이야.’

그 사이 유천의 머리 위의 적운이 점점 핏빛을 띠기 시작하고 지상의 유천을 향한 악의와 증오 또한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강의 지류처럼 한곳으로 모이는 저주의 기운.

피이이잉­­!!

그것이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유천의 머리 위로 광선처럼 사출되었다. 하늘을 덮은 구름에 비해 광선이지 사실상 거대한 원기둥이 지상을 덮쳤다.

유천은 공간을 찢고 밀어내며 내려오는 원기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거대한 광선은 파직거리며 수천수만 개로 분열되어 다양한 방향을 통해 유천에게로 향했다. 마치 정면으로는 유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분열의 저주. 본래 적의 마력을 갈아버리는 저 힘을 스스로에게 응용할 줄이야.

‘아니 그것뿐이 아닌가?’

수만 개로 나뉜 붉은 광선들은 도저히 그 속도와 힘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급격한 기동을 보이고 있었다. 거울 거미와 이 세상이 지니고 있던 힘, 물리법칙조차 조작하는 능력.

왜곡(?曲).

관성조차 무시하고 전범위에서 덮치는 저주의 빛들.

‘피하는 것도 일일이 전부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몸빵으로 막기에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저 힘은 꽤나 위험해 보였다.

‘사방으로 퍼져서 막을 수 없다면, 전부 모은다.’

진화를 거듭한 것은 녀석만이 아니다. 넓혀진 정신의 지평과 함께 유천 또한 수많은 가능성이 개화되었다. 화염이 지닌 개념을 ‘태운다.’에서 ‘밝히다.’로 전환하여 눈에 담았다. 거기에 공간안의 재능과 힘의 개념을 담자, 일반적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드러난다.

[마안 계통 특수 관측기 ­ 화명안(火??)]

황금색으로 변한 유천의 눈에 대기의 흐름, 중력, 사물 간의 인력과 척력 등 그 모든 ‘힘’이 관측된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흐르는 수많은 파형(??)들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축을 ‘붙잡는다.’

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개념의 영역. 하지만 단순히 다루는 것을 넘어 지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된다.

우뚝­

수만 개의 저주들이 물리법칙을 넘어 불규칙적으로 움직인들. 결국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유천이 개념을 지배하는 영역에 도달한 절대적인 힘으로 공간을 쥐자 세상이 정지하고 수만 개의 광선 또한 공중에 묶여 멈춰 선다.

그리고 비튼다.

그러자 공간을 붙잡은 오른손을 비틀자 모든 광선이 한곳으로 모이고 압축된다. 시각화된다는 건 거기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 손에 잡힌 선율을 통해 파동을 흘려보낸다.

으드득­­!!

공간 채로 붙잡힌 저주의 덩어리가 파동에 서서히 으깨진다. 붙들린 건 광선들만이 아니었다. 단두대 앞에선 사형수같이 유천의 악력에 묶인 적운이 꿈틀대지만 움직이지 못한다.

“이제 진짜 죽어라.”

세상의 모든 힘을 움켜쥔 오른손은 내버려 둔 채 왼손을 들어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굽히고 허공에 손을 걸었다. 유천이 보이지 않는 힘의 선들을 부여잡아 자신이 있는 곳으로 잡아당기자 하늘이 통째로 끌려 내려온다.

쿠구구구궁­­

마치 수챗구멍 물 빠지듯 소용돌이치며 왼손을 향해 다가오는 적운을 향해 유천은 왼손을 비틀어 쥔 후 주먹을 뻗었다.

*

그 시각 양하연은 결계를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괜찮을까요?”

“자네는 나보다 그를 모르는군.”

“협회장께서는 제가 유천씨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시나요?”

영무문이 펼친 결계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반고의 무문의 제자가 어떻게 저런 고위 마도구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천이 저 정도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일로 유천씨가 세상에 드러난다는 게 문제지요. 협회장님도 알잖아요? 세상은 새로운 실력자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세력들의 눈에 새로운 신성을 향한 시선은 두 가지 중 하나다. 흥미로운 포섭 대상, 아니면 크기 전에 제거해야 하는 껄끄러운 대상. 지구는 새롭게 등장한 외곽차원임에도 생각 이상으로 중앙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미국, 천황국, 중화연맹 AMCU가 수호 계약을 맺었다는 게 그 증거.

그들과 수호 계약을 맺은 세력들은 이 작은 나라인 한국에 강력한 경쟁자가 생겨나는 걸 반기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자네가 모른다고 한 걸세.”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양하연은 이만성의 말에 불쾌했다. 자신이 유천에 대해 모른다니.

먹는 걸 가리지 않지만, 양식보다 한식을, 거기서도 매콤한 김치찌개를, 시끌벅적한 술집보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카페 같은 분위기를 좋아한다.

가진 힘에 비해 예의바르다. 거기에 독한 사람인 척하려고 하지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도 어떠한 항의를 할 수도 없는 노예들에게 독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근본은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잘 생겼어.’

그래서 이만성의 말이 불쾌했다. 한 달간 인천에서 그와 함께 지내며, 관심을 두고 관찰해온 자신보다 간혹 유천과 업무상 만나기만 한 늙은이가 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니.

“...지금 내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지 않나...?”

오래 살며 많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아 온 이만성은 볼을 붉히는 양하연을 보며 '청춘이구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하연양에게 씌워진 남성혐오자라는 오명을 벗는 건가?”

“크, 크흠...제가 언제 남성을 혐오했다고 그러시나요?”

“허허 인식은 본인이 만드는 게 아닐세. 그대가 아니라고 해도 만호그룹의 후계자의 하반신을 으깨버렸을 때 이미 대중들은 그렇게 받아들였지 않나?”

“그건 그 건방진 새끼가 무례했던 거고요.”

양하연은 중앙세계를 떠나 한국에 정착하는 그녀를 축하하기 위해 협회 본관에서 열린 연회에서 만난 만호그룹의 망나니 애새끼를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중앙세계의 가문들에 비교하자면 일개 중소기업에 불과한 기업의 후계자 주제에 위치 파악도 못 하고 자신을 비천한 용병 취급하며 화대를 지급할 테니 다리를 벌리라는 새끼를 가만히 내버려두기에는 과거의 그녀는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그 망나니 새끼도 숙청하면 되겠네요.”

황금새의 후원그룹이 만호이지 않나?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니 대강 증거 몇 가지 조작한 후 반역죄로 모가지를 칠 수 있을 것이다.

“...전장에서 그런 말을 했으면 모를까. 그건 너무 과하지 않나...? 거기에 그들도 후계자를 죽이겠다고 하면 무슨 귀찮은 짓을 벌일지 모른다네.”

“만호 현 회장의 자식이 그놈 말고 한 명이 아카데미 생도로 있지 않나요?”

만호의 현 회장 도경민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다. 양하연이 하물을 으깨버린 도명훈, 그리고 현재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도민경 이렇게.

“하지만 그 아이는 너무 어리지.”

도명훈이 현재 29인 반면 아카데미를 다니는 도민경은 고작 18살에 불과하다. 새로운 후계자로 내밀기에는 부족한 나이였다.

“그럼 놈을 옥에 처넣으시지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중요한 건 도명훈의 생사가 아니라...”

“그리고 도민경을 우리 발토가 후원하도록 하지요. 대가리가 큰 망나니보다 아카데미에 들어갈 정도로 우수한 새싹이 그런 대기업의 후계가 되는 게 우리나 협회장님께 좋지 않을까요?”

“차기 한국과 수호계약을 맺을 길드의 후원이라...확실히 그 정도라면 도경민도 납득하겠군.”

본래의 계획에서 벗어났지만, 이지연이 유천을 이런 눈에 띄는 자리에 보냈다는 건 발토와 한국 간에 수호계약을 맺을 생각이라는 의미라는 건 양하연도 이만성도 알아챘다. 카르발디 군도에 등록된 용병길드니 자격에 문제는 없고 능력은 유천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증명할 수 있다.

한 가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에 양하연은 결계에서 눈을 돌려 이만성을 쳐다봤다.

“그런데 저희와의 계약을 협회장님의 개인적인 의사만으로 맺을 수 있나요?”

협회가 지닌 권한이 어마어마해도 결국 정부 하위기관. 수호계약이 협회에 한정된 것이 아닌 국가 전체와 맺는 계약인 만큼 쉽게 성사될지 의문이었다.

“허허...아마 문제없을 거네.”

양하연의 물음에 이만성은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격변의 세상, 내부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주는 무력집단을 어느 국가가 반기지 않을까? 오히려 정치적 업적으로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겠지. 거기에 더해 그 수장이 젊은 여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책상물림 놈들은 하연양 그대를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 조종할 수 있는 상대로 생각할 거네.”

“정말 그런 거라면 멍청한 놈들이네요.”

발토라는 길드의 목적은 지구에 외부 기반을 세우는 것과 유천을 위시한 날개 인원들의 신분세탁.

거기에 수호계약의 주도권은 당연히 이쪽에 있다. 수호계약을 맺은 길드로서의 의무는 수행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이 나라의 정부에 무언가를 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 멍청하지. 허나 우물 안에서 벌레들만 주워 먹는 개구리들은 우물 내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 밖의 세상은 전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네.”

아마 저 멍청한 것들은 무식한 게 용감하다는 듯 이야기를 해도 알아먹지 못하고 선을 넘어 기어오를 거다.

“그러니 이 나라의 정치는 내게 맡기게, 어르고 달래는 건 이쪽도 자신 있으니까.”

“못 알아듣는다면서요?”

“뭐...모가지에 칼날 들이밀면 입 닥치지 않겠나? 하하!!”

“...은퇴하신 줄 알았더니 아직 정정한 현역이시네요...?”

저 모가지에 칼날을 들이민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겠지. 늙어서 은퇴한 후 협회장이라는 공무원 다 된 줄 알았더니 행실이나 언행이나 아직 양하연이 본 이만성에게는 아직 용병다운 모습이 남아있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고 유천 그라면 이 나라, 이 차원을 13 위원회 일각에 걸맞은 위치에 올릴 수 있을 거네. 그걸 방해하는 놈들이라면...나는 들이미는 게 아니라 쑤실 수도 있지.”

중앙세계에서 썰어온 사람이 몇 명인데 갑옷이 아닌 양복을 입었다고 꺼림칙하게 여길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이만성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슬슬 준비해야겠군.”

“네 딱 타이밍이 좋았군요.”

쩌저적...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어지간한 고층 건물 이상의 높이를 지닌 돔 형태의 결계가 꼭대기부터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다.

“모두가 보고 있겠군요.”

“그렇지.”

서울 한복판에 펼쳐진 거대한 결계는 어디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으니까. 국민들과 언론, 타국의 정보원부터 중앙세계 타 세력 중에도 이 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올 유일한 한 사람을 목도할 거다.

“그러니 자네들이나 우리나 대비해야 하겠지. 새로운 변화를 말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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