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화정묵(2)
* * *
하늘 위. 지상의 모든 것들이 모래 알갱이처럼 보이는, 사실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은 압도적인 광경을 아래로 두고 있었지만 유천은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발바닥부터 허벅지까지 이중 나선으로 꼬여진 마력 구조체를 쌓아올린다.
아직 섬세함이 부족한 마력 운용을 다섯 개의 마력기관이 대체한다. 질의 부족을 물량으로 눌렀다.
[마력개변 탄성부여]
단단함, 묵직함을 넘어 철(?)의 마력이 지닌 개념을 확장시킨다.
다리의 근육이 수축하고 그 스프링처럼 꼬여진 마력구조체를 통해 유천의 거대한 힘이 흘러들어 간다.
끄드득...
압도적인 힘에 구조체가 극한까지 압축되었지만 사고가속의 재능이 그 형태를 유지하도록 마력의 농도와 탄성 개념을 실시간으로 조작한다.
‘마지막 과정.’
요새 부수기의 묘리의 기본은 폭발이다. 집중시킨 힘을 일순간에 일 점에 폭발시켜 파동의 파도를 만드는 방식.
마력으로 온전히 통제된 힘이 발바닥에 압축되었다. 요새 부수기의 기본 묘리에 맞춰 발을 박찬다.
파앙!
공간안이 인지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관성을 사고가속이 통제, 압축해 방향성을 일관시켰다.
그에 주변에 흩뿌리던 파동의 크기는 줄어들고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비행체의 안정성을 내다 버리고 오로지 속도에 집중시킨다는 미친 행위였지만 유천의 육체는 어떠한 미동도 없다.
인천에서의 한 달. 마력이라는 힘을 다루는 방향은 정했다. 야생마처럼 날뛰는 유천의 육체 능력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 훈련의 결과 중 하나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네.’
비정상적인 육체 능력으로 억지로 욱여넣던 방식. 그 기술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하던 비효율적이었던 것이 제법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이대로 더 발전하면 요새 부수기의 하위 스킬로 등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짜증 나는군...’
기술에 대한 생각이 끝나자마자 다리 사이로 야한 물을 뚝뚝 흘리던 이지연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며 갈 길 잃은 성욕이 ‘나 찾았음?’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만하자...열불만 난다.’
유천은 최대한 떠올리지 않기 위해 이지연과의 대화를 복기했다.
단장님 가셔서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죽이셔야 합니다.
그래도 됩니까...? 안 그래도 이쪽에 신경 쓰고 있는 놈들이 많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만 해도 이미 흉성의 맴버들을 상대했지 않았는가?
네 그러니까 더욱 확실하고 강렬하게 처리하셔야 합니다.
영무문의 무인들 또한 반고의 소속이고 반고는 위원회의 일각인 만큼 절대 방위선에 투입되는 임무에 큰 힘을 쏟고 있다.
즉 영무문주는 지구의 일은 류청에게 맡기고 큰 신경을 안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다.
다른 말로 하면 영무문주가 류청을 아끼고 있다는 말도 되겠죠.
랭커 다섯. 영무문주는 중화연맹 본토도 아니고 파견인원으로 인 걸 고려하면 적어도 열 이상의 랭커를 류청에게 투자한 것이다. 류청이 제자 중 막내인 것을 생각하면 생각 이상의 신뢰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럼 류청도 죽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류청은 남겨놔야 해요. 그마저 죽이면 영무문 또한 물러나지 못합니다. 무문의 명예를 위해 끝을 보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판이 뒤집힌 지금 중요한 건 영무문도 황금새도 아닌 단장님입니다.
저 말입니까?
이지연은 유천의 물음에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네 본래의 계획보다 빠르지만...이번 일로 단장님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 겁니다. 물론 날개의 단장이 아닌 발토의 내부이사겠지만.
랭커나 하이랭커가 아니라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기인들은 수도 없이 많다. 신생 길드의 내부이사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강자라도 큰 의심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확실하게 자격을 증명하셔야 합니다. 단장님이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라도 함부로 이를 들이밀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는 게 가능한 자라는 걸 말이에요. 나머지 귀찮은 일 처리는 저에게 맡겨주세요.
이지연은 자신을 믿으라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유천에게 차분한 미소를 보냈다. 유천 또한 그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사뿐 올렸다.
네 그럼 믿고 다녀오죠.
네 잘 다녀... 아! 단장님!
예? 아직 무슨 남은 말이라도?
이지연은 SRB 마테리얼 슈트를 챙겨 입으러 가려는 유천을 불러 세웠다.
아...그...저...
우물쭈물 손을 비비던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빼꼼 올려 유천을 바라봤다.
모,모모!! 못다 한 나, 나머지는!! 돌아오시면 해드릴게욧!!!
......
‘하... 좆같네...’
이성은 일의 경중을 생각하고 판단하라고 하지만 본능은 섹스를 방해받았다는 것에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시발 솔직히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딸딸이를 방해받아도 기분이 더러울 지경인데 이지연 그 단아한 미인의 아다보지를 눈앞에 두고 나왔다.
차려진 진수성찬을 걷어찼는데 어떤 병신이 꼭지가 돌지 않을까?
‘영무문...쳐 죽여주마...’
타오르는 빌딩이 발아래에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지만 이 한밤중에 저렇게 커다란 불장난을 하는 곳이 또 있을 리는 없다.
유천은 그곳을 향해 분노를 실어 발을 박찼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골자만 남은 빌딩을 완전히 분쇄한 후 귀청을 터뜨릴 무지막지한 굉음을 내며 땅에 박혔다.
잔여 충격파에 사방의 대지들이 유천을 중심으로 부서지고 밀려 나가며 서울 한복판에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콰과과과광!!!
동시에 지구의 에너지를 점차 대체하기 시작하는 마력 노심 시설이 황금새 빌딩 지하에 있었는지 거대한 마력폭발이 일어났다. 내부에 새겨진 술식이 비틀린 결과 잔잔한 마력이 화염으로 변환되었다.
유형의 물질을 넘어 무형의 영혼조차 증발시킬 화염 폭풍 가운데 선 유천은 묘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신수가 한 말이 이런 거였나...?’
화염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유천의 내면에서 강렬한 격변이 일어났다.
격이 너무 아득해서였을까? 권능을 봤을 때는 깨닫지 못한 불에 대한 깨달음이 정신을 덮쳤다.
불에 대한 재능을 넘어선 극점의 특이성. 아마 중천의 검 카트레나 론 다브디엘라가 지닌 검에 대한 이질의 것과 비슷한 성질. 신수가 금방 알 거라고 했던 것이 이것이리라.
한 손을 뻗고 권능을 일으킨다. 혹사한 몸이 뻐걱거렸지만 지금 다가온 깨달음을 수습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모여라.
마력도 없이 오로지 심상만을 투과해 현상에 개입하는 것은 하이랭커 그것도 두 자릿수 이상에 해당하는 최상위의 괴물들만이 가능한 영역.
그러나 불이라는 것에 한정한 특이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화르륵...!!
고여서 폭주하는 화염의 폭풍, 퍼진다면 소도시 하나 정도는 재로 돌려보낼 거대한 염화(?火)가 유천의 손바닥으로 응집된다.
순식간에 열기를 모조리 흡수당한 주변 공간에는 싸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놀랍군...”
웅웅...
테니스공만한 크기로 압축된 불은 마치 소형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먹고 싶은 거냐?”
육체와 심상에 자리 잡은 권능이 이 불을 달라고 재촉하는 것을 느낀 유천은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그래 먹고 쑥쑥 자라라.”
나무뿌리처럼 퍼진 금빛 혈관을 통해 불이 흡수되어 유천의 가슴으로 향했다. 권능은 게걸스럽다 싶을 정도로 불을 탐했다.
쿵...
심상이 한번 흔들리고 작은 묘목 같은 크기의 권능이 더욱 깊게 뿌리내리고 덩치를 부풀렸다.
유천은 동떨어져 있던 권능이 좀 더 근본 심상에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즉 의지로 다룰 수 있는 힘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좋네.”
화륵...
손바닥에 주황빛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유천은 권능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만든 것을 쳐다보며 언젠가는 금빛 화염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씨익 웃고 땅을 박찼다.
콰앙!
유천은 공중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놈들이군.”
양하연과 이만성 앞에 대치하고 있는 무복을 입고 있는 집단. 저들이 영무문일 것이다.
쿵...!
그렇다면 길게 끌 필요가 없다. 유천은 그대로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집단 사이로 착지했다.
“죽어라...!”
그러자 곧바로 사방에서 온갖 무기들이 날아들었다.
“누가 중앙세계 놈들 아니랄까 봐....반응 한 번 예술이네.”
정체불명의 상대라면 무조건 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죽이고 확인하자는 식의 반응.
우위를 가지고 서로 통성명이라도 하면서 이 자리에 없는 안건수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던 유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몇 놈 밟으면 얌전해지겠지.’
유천은 정면에서 날아드는 창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쉬이익...
그러나 창은 유천의 손을 뱀처럼 휘어 피하고 목으로 날아들었다.
‘이것 봐라?’
괘씸한 의도를 가지고 이 나라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수련과 실전을 통해 쌓은 무의 경지는 만만치 않았다.
‘상관은 없지만 말이지.’
유천은 뒤로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카가가각!
“뭣?!”
창날에 오히려 목을 들이미는 유천의 대응에 조소를 흘리던 무인은 목이 잘리기는커녕 흠집조차 나지 않는 광경에 경악했다.
텁
창사가 멈칫한 사이 유천은 그의 목을 잡아 올렸다.
유천은 파동에 관해 연구할 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만약 내부에 공명으로 쌓아올린 파동을 직접 접촉한 상대에게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무슨 짓을...! 커억...!”
생체폭탄. 차원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내구를 지닌 유천의 육체여서 멀쩡하지 일반적인 각성자에게는 그냥 무형 무취의 폭탄을 몸 안에 집어넣는 것과 다르지 않을 거다.
“나보다는 친구들 품에서 죽는 게 낫겠지?”
유천은 점점 핏줄이 솟구치면서 붉게 변하는 창사를 몸을 돌려 등 뒤의 무인들에게 휙 집어 던졌다.
그러자 검을 쥔 무인이 자세를 비틀어 자신에게 날아오는 동료를 받았다.
“크윽...며,명하! 괜찮은가?!”
‘생각보다 유대가 깊은 집단인가 보군.’
그럼 더욱 좋다. 애초에 이 아이디어는 효율적인 살상을 위해 만든 방식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함께 전장을 누비며 피로 이어진 가족보다 더욱 짙은 인연을 이어온 동료들이 동료에 의해 죽는다면 과연 어떨까?
사기의 하락.
감정적 동요.
공포의 각인.
이건 오로지 그걸 위해 만든 기술이었다. 동시에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가장 효과적이었다.
‘크으으...아 안 돼!!’
마치 실험용 쥐를 바라보는 것 같은 유천의 눈빛에 명하라고 불린 창사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요동치는 몸의 상태가 어떤 수작이라는 걸 깨닫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크...크르륵...피, 피해애애애애!!!”
“왜 그러...”
콰아아아앙!!
그러나 한참 늦은 대응. 명하는 주변으로 다가온 무인들과 함께 그대로 폭사했다.
툭...투둑...
““......””
영무문의 무인들, 심지어 화정묵 마저 그 순간 모든 행동을 멈추고 육편이 되어 떨어지는 동료들의 살점들을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봤다.
그들이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중앙세계의 무인이지만 이런 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죽을 거라고 상상하지 않았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그래 이제 좀 대화할 자세가 됐네.”
얌전해진 그 모습에 유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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