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화정묵
* * *
서울 한복판 황금새 본관 건물인 35층짜리 빌딩.
콰아앙!!
그 커다란 건물이 연쇄적인 폭발로 간신히 기본 골자만을 유지한 채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꺄악!!
괴수라도 온 거야?!
젠장! 협회는 뭘 하고 있는데...!
가히 내전 현장을 방불케 하는 모습.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다행히 대피 훈련이 되어 있어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인파가 흩어졌을 때 그 파괴의 현장에 남아 있는 건 서로 수십 미터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각성자들 뿐.
고오오오오...
양하연을 위시한 발토.
급히 호출된 카룬의 정예와 협회장 이만성.
그리고 중화연맹과 수호계약을 맺은 영무문까지.
하나하나가 상위라고 불리는 SS급 이상의 각성자 그리고 등급 외 랭커들의 살기의 충돌에 대기가 흔들리고 주변 건물들이 부스러져간다.
지금도 빌딩에서는 커다란 콘크리트 파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면서 실시간으로 쑥대밭이 되고 있었지만,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이 틀어졌어.’
앙햐연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가슴팍에 통일된 영무문을 상징하는 산맥이 그려진 무복을 입고 있는 수십의 무인들.
그녀의 일행이 근처에서 대기하며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뜬금없이 건물 지하에서 튀어나온 이 영무문의 무인들이 잔당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렸다.
이대로는 발토의 국내 정착이 시원찮아 진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양하연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정면의 건장한 체격의 무인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래서 결국 영무문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그렇다.”
“중앙세계와의 연결 이전부터 이 땅의 주인은 한국이에요. 지금 당신들은 수호계약의 관례를 어기고 있는 거라고요.”
“피의 기원이 어디인가. 사건의 해석, 그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다각도의 해석에서 결국 역사를 결정하는 건 다수를 지배하는 승리한 정치가라네.”
‘이 시발새끼들이...’
화정묵, 류청의 사형이자, 영무문에서 중화연맹에 파견된 랭커들의 대표인 놈의 끝없는 오만한 언행에 이를 빠드득 갈았다.
돌려 말했지만, 놈은 한마디로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한국을 나라가 아닌 중화연맹의 일개 지방 도시로 판단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르면 자신들이 이 땅에 머물고 있는 건 관례에 어긋나지 않다는 거겠지.
“거기에 그 정체 모를 버러지들을 죽인 것 또한 우리지. 양하연 그대의 길드가 아닌 우리. 이거 명분도 우리에게 있군.”
양하연은 비릿하게 웃으며 궤변을 토하는 화정묵의 입을 찢어발기고 이딴 짓거리를 벌인 류청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있을 안건수의 머리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게 한이야...’
허나 그들은 반고에서도 무문을 내세울 수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필히 중앙세계에 그에 걸맞은 거대한 인프라를 지니고 있겠지.
그 정도의 적이라면 유천이라는 존재가 있는 발토로서 하나의 통과의례로 여겨도 괜찮을 것 같지만 날개에게는 마사크레, 검은 선자들, 흉성이라는 은원이 쌓인 더욱 거대한 적들이 남아있다.
날개 지휘부로부터 어떤 지시사항이 전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괜히 임의로 행동을 개시하기에는 사안이 컸다.
“그리고 발토라고 했던가? 이 땅의 길드가 아닌 것 같은데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중앙세계에 기반을 뒀겠지. 수호계약을 맺은 게 아니라면 물러나야 하는 것은 오히려 그쪽 아닌가?”
‘아주 개소리를 지껄이네.’
역사가 어떻고 명분이 어떻고. 결국, 이딴 비이성적인 대립이 성립하는 이유는 힘의 차이에 있다.
양하연의 침묵을 암묵적 인정으로 받아들인 화정묵은 그녀를 비웃고 눈을 감은 채 침묵하고 있는 이만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 협회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뛰어난 각성자임을 고려해도 사십이 채 안 될 걸로 보이는 화정묵이지만 그의 말투에서는 어떠한 존중도 없었다.
이만성이 이 땅에서 가진 직위와 최소한의 윤리를 무시하는 화정묵의 태도는 이미 자신들이 포식자임을 단정 짓고 있었다.
“.........”
어쩔 생각이신가요?
양하연은 모욕을 듣고도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는 이도경에게 전음을 보냈다.
놈의 말은 궤변이지만 틀리지는 않아. 혼돈의 시대. 국민들은 국가의 정체성보다 생존을 택할 확률이 높지. 여기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중화연맹은 영무문을 내세워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하겠지.
......
난 이번 일이 아직 어떻게 된 건지 알지 못하네. 그저 자네들 날개에서 무슨 짓을 벌였다는 것 정도만 예상하고 있어.
그로서는 작금의 사태가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렇기에 이만성의 힐난 섞인 전음에 양하연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대들이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 각성자 협회장으로서 나는 한 가지밖에 선택할 수 없어.
뭘 말이죠?
시간을 끌지. 그 사이에 대답을 가져오시게.
한 지역의 기득권이 생존을 위해 초월자와 계약을 맺는 건 중앙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것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이다.
유천이라는 존재가 이 땅에 둥지를 튼 이상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만성은 이 상황에 대한 대답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모든 생각을 정리한 그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전음이 꽤 길었군. 그래. 할 얘기는 끝났나?”
답은 정해져 있다는 저 당당한 태도가 굉장히 거슬렸지만 이만성은 일단 참기로 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흐음. 그렇게 우둔한 늙은이로는 보이지 않았는데...내가 한 말을 못 알아들은 건가?”
“알아들었지. 그러니까 협상을 하자는 것이잖소.”
“......”
“내 입장에서 당신들은 불법 체류자지만 서울을 습격한 빌런들을 쓰러뜨렸단 명분을 가진 이상 협상의 우위는 내어 드리지. 하지만 그 이상을 바랐다가는...이 땅에서 몸 성히 돌아갈 수 없을 것이오.”
이만성은 각성자 협회장. 아무리 참는다고 해도 국가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격마저 져버리고 모든 것을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이 늙은이가 미쳤나?!!”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그만.”
이만성의 도발에 가까운 협박에 영무문의 무인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취했지만, 화정목의 손짓에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드나듦에 자유가 많은 용병과는 다른, 확실한 위계서열이 갖춰진 조직다운 모습에 이만성은 눈을 좁혔다.
‘과연...역사 깊은 무문이라는 건가...’
“하하! 그 건방짐. 본래라면 경을 쳤을 테지만, 이번만은 넘어가도록 하마.”
‘웃기는군. 넘어가는 게 아니겠지.’
화정목의 눈이 향한 곳에는 굴러다니는 복면 머리통을 심란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전신이 검은 남자가 있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저 자 덕분에 일이 최악으로 흘러가지 않았군.’
유르힘. 베렌듀크의 8검으로 꼽혔던 상위랭커인 그가 무의식적으로 뿜어내는 예리한 기세는 영무문의 무인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문. 말이 좋아 전통 있는 가문이지. 결국 잘 나가는 백정 집단일 뿐이다. 아무리 격식 있는 척해도 야생 날것, 약육강식의 천박함을 숨기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가 없었다면 화정목은 말만을 내뱉고 있지만은 않았을 테다. 랭커의 수적 우위에 있는 이상 당장 무력을 휘둘렀을지도 모르지.
“그럼 우리들이 물러나는 조건으로 요구사항을 말하도록 하지.”
“물러나는 조건이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결국, 이곳에 있는 게 잘못되었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지 않나?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는 걸 보면 화정묵 또한 그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를 아주 물로 보는군.’
“우선...”
화정묵이 말한 요구사항은 자잘한 것들을 제외하면 총 네 가지였다. 그리고 그 조건들을 들은 이만성의 눈은 냉막해졌다.
“그딴 조건 우리가 받아들일 거 같소?”
“이 제안 어디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모든 게. 당신이 말한 것 하나하나가 문제요.”
1. 인천을 치외법권이 성립하는 독립안전지대로 지정하라.
2. 동맹국인 중화연맹의 안정화에 이바지하여라.
3. 하얼빈에 잠들어 있는 네임드 거북용을 사살하는 데에 힘을 보태라.
4. 아카데미 학생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라.
“이 땅의 음지를 손에 쥐고 각성자들의 현재와 미래를 빼앗겠다는 심보가 훤히 드러나는데 그걸 모르면 협회장의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지.”
황금새의 도움을 받아 인천을 장악한 중화연맹은 음지로 이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 것이며, 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괴수들을 상대하는 최전선으로 자국의 각성자들을 배치할 것이다.
거기에는 한참 교육을 받고 있는 아카데미의 엘리트들 또한 포함되겠지.
말이 동맹국이지 이건 속국 대우나 다름없다.
그러나 협상은 더할 거는 더하고 뺄 거는 빼는 의논 과정.
협회장님 조금만 참아보세요. 날개 지휘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거기에 때마침 기다리던 대답도 들어왔다.
‘인내는 내 특기다.’
이만성은 이제 조금만 시간을 끄며 기다리면 이딴 좆 같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화정묵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기 전까지 말이다.
“그게 약소국의 비애지.”
“...뭐라고 하셨소?”
“국가로 인정해준 걸 감사히 여기고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게다. 사제 녀석이 다스리는 나라의 동맹이 아니었다면...”
단말기에 집중하고 있는 양하연의 몸을 위아래로 훑은 화정묵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걸세.”
“......”
그래 이것이 중앙세계 놈들이다. 상대가 자신보다 약자라고 낙인찍는 순간 한없이 깔아보는 놈들...
오랜 시간 그곳을 떠나 있어서 잊고 있었다. 저딴 사고방식은 선악을 떠나 그곳에서는 아주 당연한 거라는 걸 말이다.
쿠구구궁...
이 정도의 모욕까지 감내할 생각이 없는 이만성으로부터 묵직한 마력이 치솟았다.
동시에 한 차례 가라앉았던 전의가 차올랐다.
“늙은이...뭐 하는 짓이냐?”
“뭐겠는가? 더는 네놈의 귀가 썩을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게지. 그러니 안건수를 내놓고 보내줄 때 얌전히 돌아가라.”
이만성의 살기등등한 음울한 목소리에 화정묵은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미개한 놈들이 우리 영무문에 대항하겠다는...”
“닥쳐라 류청의 졸개야.”
“...뭐?”
“왜 아닌가? 실력과 배분에서 아래면서 반고 출신조차 아닌 류청의 뒷구멍을 닦아주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이지 않나?”
“......”
화정묵을 담는 이만성의 시선에는 확연한 조소가 담겨있었다.
이만성이 아무 생각 없이 인내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미 대화 같지 않은 대화를 통해 화정묵이라는 자에 대한 분석을 마쳤고 그래도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머리가 굴러가는 척은 하는데 실제로는 무식하기 짝이 없지. 그런데 사문에 대한 자부심 하나는 대단해.”
처음에는 머리를 쓰는 종류의 인간인 줄 알았는데, 거리낌 없이 이딴 제안 같지도 않은 제안을 하는 것만 봐도 놈은 상황을 바라보는 직관력이 전무하다.
지금까지 그럴듯하게 말을 한 건 아마 류청의 시나리오였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더해 속해있는 세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까 스승에게 버림받은 거 아닌가. 사제의 장기 말로 쓰이도록 말이야.”
그런 맹목적인 패트리어트는 조직에서도 배제되는 법.
“너...”
정곡이 찔린 화정목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만성은 류청을 안다. 그 음흉한 놈이 지금 이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즉 애초에 놈은 자신의 사형을 제물로 사용할 생각이었을 터.
그리고 거기에는 스승인 영무문주의 허락이 있었을 것이다. 적당히 써먹다가 버리라는 식으로 말이다.
‘원하는 것은 한국 아니 지구라는 차원에 영무문이 본격적인 침탈을 할 수 있는 분쟁의 씨앗.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화정묵 그래도 꽤 중요한 신호탄 역을 맡는군. 무려 반고로부터의 독립의 제물이라니. 사문을 맹신하는 그대에게 딱 맞는 역할이지 않나?”
중앙세계에서 많이 본 약소차원을 집어삼키는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
강대하고 고일 대로 고인 세상을 벗어나 둥지를 옮기는 건 그리 드문 이야기는 아니다.
“이놈!!”
“이 버러지 같은 것이!! 영무문 8 제자께 그 무슨 망발이냐!!”
“그 입 닥치거라!!”
영무문의 내부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저 감추지 못하는 동요만 봐도 이만성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하하하하하!!!”
화정목은 도저히 이만성의 도발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뛰쳐나가려는 부하들을 제지하고 미친놈처럼 웃어 재낀 후 싸늘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하...하아...이 늙은 것아...나를 그렇게 도발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는가?”
“함부로 무례를 저지른 네 녀석이다.”
“아니 그건 강자의 당연한 권리다. 네놈 같은 버러지는 평생 알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쿠구구궁...
화정묵으로부터 진득한 살의가 담긴 마력이 솟구쳤다.
“해원하! 경호!”
““예!!””
자신의 측근 두 명을 부른 그는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있는 유르힘을 가리켰다.
“몇 놈만 데리고 가서 저자를 잠시 막고 있어라. 이 시건방진 놈의 목만 따고 돌아가도록 하겠다. 류청...그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화정묵의 주먹에 권기가 선명히 맺히기 시작했다.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영무문의 무인들이 튀어나오는 것에 맞춰 전투가 벌어지려는 찰나.
“아니 그럴 필요 없다네.”
“뭐?”
“뭐긴요. 이미 늦었다는 거죠.”
조용히 단말기를 보고 있던 양하연이 고개를 들어 안쓰럽다는 듯 화정묵을 바라봤다.
“불쌍한 인간. 적당히 나대고 돌아갔으면 목숨만은 부지했을 텐데...”
“이......년놈들이 쌍으로 미쳐버린 게냐...?”
빠드득...
이제부터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할 벌레들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자 이를 갈았다.
“감히!! 중앙세계에서 용병 짓 좀 했다고 기고만장...!!”
오싹
그는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불가해한 존재감에 털이 곤두섰기 때문이다.
하늘.
그 존재감이 흘러내려 오는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황금빛 유성이 밤하늘을 열어젖히며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위치는 이제 뼈대만 남은 황금새 길드 본관 빌딩.
유성이 그 꼭대기에 닿는 장면이 슬로비디오처럼 화정묵의 눈에 천천히 담겼다. 그리고 그 후.
콰아아아아앙!!!
천지를 진동시키는 충격파가 서울 전체로 퍼져 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