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흉성(6)
* * *
“왜?”
죽이지 말고 데려가는 게 어떤가. 어차피 전투의지를 상실한 적이다. 데려가서 고문하던, 노예로 부려 먹던 아니면 결국 처분하던 말이야.
“으음...의외네.”
킬리언이 적을 죽이지 말고 살려두자는 의견을 내뱉은 건 유천의 예상외였다.
심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 생각이 아니라 그대가 죽이기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내민 제안인데...필요 없는 오지랖이었나?
“...내 얼굴이 그렇게 티가 나나...?”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읽혔단 말인가?
후후...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전부 보인다.
“크흠...”
꽤 민망했다. 적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적을 욕심 내는 리더라... 유천 본인이 당사자라면 꽤 서운해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뭐, 유천 그대가 욕심을 낼 만해. 전력이 아니었다고 해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킬리언은 너덜너덜해진 팔을 들어 올려 힘없이 저었다. 두 달 전 유천에게 맞았을 때보다 더 심각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너한테 할 말이 많긴 한데...”
그녀는 살짝 얼굴이 굳어진 유천의 기색에 항상 눈치 없는 주둥아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며 난처한 듯 웃었다.
지금은 좀 참아주었으면 하는군. 이제 슬슬 깨어있기도 힘들어서...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참을 수 없는 피로감이 맴돌았다.
긴장감이 풀려 수복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그녀의 육체가 강제에 가까운 수면을 유도하고 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뭐라고 할 수 없었던 유천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그래 좀 자”
그래...이런 자세로 부끄럽지만...그럼...조금만...결국...그대의 선택...내 의견은 중요치...
말을 다 이어가지 못한 채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다 듣지 못했지만 아마 자신의 의견을 그렇게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일 거다.
고요한 숨소리를 내는 킬리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후 유천은 카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야.”
“흐끅...!네,네네...!”
아직 꺼지지 않은 화염에 뒤덮인 채 떨고 있는 그녀는 후다닥 네발로 달려와 엎드렸다.
흔히 도게자라고 부르는 복종자세. 완전한 전사였던 미래의 그녀만을 기억하는 유천은 그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본 게임이 아닌 외전을 체험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네가 결정하게 해주지. 얌전히 날 따라올래? 아니면 여기서 죽을래? 물론 산다고 해도 제대로 된 대우는 받지 못할 거야.”
노예. 돌려서 말했지만, 결론은 그거였다. 노예로 살 텐가 아니면 죽을 텐가.
카렌은 가문에 있던 여성 노예들이 과거나 실력을 떠나 어떤 대우를 받는지 떠올려보았다.
자신은 상위라고 부를 만한 랭커. 아마 낮에는 전투를 위한 노예로 쓰이다 밤에는......
“히익...!”
온몸을 하얀 걸로 물들인 채 배를 까뒤집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그녀는 더욱 몸을 떨었다.
‘그, 그래도 살아야 해...’
가족이 있다. 그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 흉성에 가입한 것은 잠시간의 일탈에 가까웠지 그로 인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 따라갈게요...”
우선순위를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에 결국 고민은 짧았다.
“그래? 알았다. 그럼 일단...”
화르륵!
“어, 어째서?”
분명 살려주겠다고 했으면서 어째서 불길이 더욱 자신의 몸을 덮는단 말인가?
점점 다가오는 불에 몸을 뒤트는 카렌을 보며 유천은 미간을 좁혔다.
“가만히 있어. 추적은 피해야지.”
“추적이요...?”
킬리언도 이들도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흉성의 암막. 마르바렉의 가호인 그것은 정체를 가리기에 암막이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가호, 그 자체가 숨겨져 있어 암막이라고 불린다.
그 역할은 위치추적. 맴버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믿게 하는, 마르바렉이 직접 거두지 않으면 영원히 유지되는 족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미래의 카렌에게 일어난 비극의 원흉이기도 하고 말이다.
당연히 유천은 그런 흉흉한 것을 집에 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격렬한 전투에 얼굴을 가리는 기능은 깨진 것 같지만, 몸 안에 여전히 박혀있을 가호를 여기서 불태워버릴 생각이었다.
‘되려나...’
유천이 판단하기에는 이 권능이란 건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은 몸의 일부와도 같았다.
익숙해지면 정말 손발 움직이듯 할 거 같았지만, 지금은 아니었기에 일일이 의지를 보내야 했다.
집중한다.
하나로 엮인 공허와 권능이 조금이라도 분리되는 순간 카렌은 소멸할 것이다.
사실 공허와 권능이 이렇게 엮인 것은 기적의 산물이었다.
둘 다 유천이 아직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맞물림으로 통제권이 그에게 넘어간 것이다.
‘아니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절묘해.’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오히려 권능이 유천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줬다는 것이 더 합당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법 괜찮은 기회군.’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사람에게는 할 수는 없는 이 극도로 위험한 실험을 위한 최고의 대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죽으면 어쩔 수 없지 라고 넘길 수 있는 그런 대상이 말이다.
분화하라.
완전한 하나의 구조체로 타오르던 불꽃이 미세한 섬유 다발로 나뉘었다.
사고가속의 재능이 공허와 권능의 구성 농도를 일정하게 맞추도록 도왔다.
파고들어라.
무수히 분화된 화염이 카렌의 머리부터 발끝 전부 모든 신체 부위에 뿌리내렸다.
으읍...
카렌은 전신 곳곳을 파고드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지만, 최대한 참았다. 이것은 수술이었다. 집도의의 집중을 방해했다가는 죽는 것은 그 환자가 될 것이다.
‘권능을 다룬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신체, 뼈, 장기, 신경, 마력회로 등 그 모든 곳에 뿌리내리는 이 감각은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희롱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이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 전능감에서 나오는 희열을 억지로 눌렀다.
분류한다.
적과 그렇지 않은 자를. 이 카렌이라는 여자는 적에서 배제하고 그 이외의 이물은 전부 적으로 간주한다.
“으으으...”
유천의 의지에 얌전했던 화염에 적의가 깃든 것을 느낀 카렌의 입에서 공포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콰직...
‘이거군.’
카렌의 심장 어림에서 자신의 불에 무언가가 소멸했음을 느꼈다. 아마 이것이 남은 가호일 거다.
“허억...허억...”
암막을 부순 후 미세한 불줄기가 몸 안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카렌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일단 성공했군.’
생각보다는 쉬웠다. 권능이 통제권을 자신에게 넘겼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부로 침잠해 불의 구조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건...지금으로는 불가능하겠어...”
공허와 불이 서로 엮이고 엮여 수백 수천 개의 층을 이루며 공명하고 있었다. 그 농도 비율과 구성 식을 맞추는 데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컨트롤이었다.
지금의 자신에게 이것을 하라는 건, 홀로 서지도 못하는 새에게 하늘에서 공중돌기를 시연하라는 것보다 말이 안 되었다.
‘어째서 마법이나 초능력을 익히라고 했는지 알겠네.’
권능이나 공허나 세상을 이루는 마나의 일종이다. 결국, 마력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힘일 뿐이라는 거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쌓여온 천재들의 지식을 배우고 모방한다면 언젠가 자신 또한 이렇게 완전한 형태의 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실험체가 더 필요하겠어.’
그러려면 우선 이것을 완전하게 뇌리에 박아 놔야 했다. 방향을 잊지 않게 할, 등대로 삼을 좀 더 많은 데이터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봐.”
“흐읏...! 네 네?!”
“다른 녀석들은 어디 있나?”
그리고 다행히 아직 이곳에 유천이 쓸 만한 실험체들이 남아있었다.
*
탁...탁...
인천 지하, 날개의 지휘부. 유천이 킬리언을 구하러 간 사이 이지연은 온갖 서류들이 널브러져 있는 책상을 초조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깔끔한 성격상 용납하지 못하는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곤란해...’
본래 황금새와 관련된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난 후 유천에게 지금까지 숨긴 것을 고백하고 사죄를 청하려 했다.
하지만 날개에 킬리언을 제외한 강자들이 전부 서울로 가 있는 사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강자들의 존재로 일이 틀어졌다.
비록 킬리언이 그들을 막으러 갔다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기에 그녀는 모든 사실을 유천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유르힘과 관문지기 그리고 양하연이 인천에 없는 이유까지 속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곤란해...’
차라리 분노를 표했으면 싶었다. 그녀는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마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유천의 두 마디는 이지연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어요.
예전에 아버지 이도경이 큰 실수를 저지른 후 사죄를 하는 부하 직원에게 저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직원은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지연에게는 유천의 저 말은 마치 그날을 떠올리게 하였다.
탁탁탁...
증폭된 불안함만큼이나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안 돼...’
그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력적으로 킬리언이나 양하연의 반의반만큼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날개라는 조직의 중추를 맡기 위해 행정업무를 파고든 것이 아닌가?
‘이래서는 안 돼...’
10년 전 그날 이후 목적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자신에게 마법 대신 유천이라는 존재가 그 빈틈을 파고들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정신병이겠지...’
이런 사고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닌, 어딘가 엇나가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한 달 전에 아직 자신에게 그날의 악몽이 형틀처럼 목을 죄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상 이 강박은 어쩔 수 없었다.
“괜찮을까요...?”
이지연의 옆에 서 있던 티보치나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지연과 달리 그녀는 노예. 필요 없다고 낙인찍히면 해고가 아닌 폐기처분 될 수도 있는 처지였다.
“당신이 그걸 왜 신경 쓰는 거죠?”
그 말에 이지연은 약간의 질투가 섞인 말을 차갑게 내뱉었다.
한 달 이상을 같이 하면 싫어도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된다. 그녀가 알기로는 티보치나가 저런 걱정을 할 이유는 없었다.
“명계의 법률만 아니었다면 자살을 했을 당신에게는 오히려 다행 아닌가요?”
영혼을 관리하는 명계의 입장에서 자살은 최악의 업. 설령 자객이라도 자결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지연은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이안에게서 벗어나 목적을 잃은 당신이 살아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사이가 좋고 나쁨을 떠나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에서 둘은 서로 닮아있었다.
자신을 버린 가문에 대한 복수, 그리고 카이안 이 두 가지에 생을 걸었지 않았나?
그래서 더욱 이지연은 그녀를 질투했다.
이것저것 얽히고설켜, 여전히 불안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깔끔하게 떨어진 그녀는 죽음을 택할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시는지 알겠네요...”
그리고 그 속마음을 읽은 티보치나는 쓰게 웃었다.
“벗어나 보니 알겠더군요...”
“...뭘 말입니까?”
“전 제가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렇지 않았더라고요...”
가문에서 버려져 카이안에게 구함을 받은 후, 복수심에 그의 사랑을 갈구하고 베렌듀크의 부흥에 모든 걸 쏟았지만, 유천에 의해 거세게 깨지고 보니 알았다.
“그냥...살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어요...”
그것이 전부 허상이었음을. 그녀는 그저 살고 싶은 이유를 찾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당신도 알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살아가는데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는 걸...”
“...역시 더러운 빌런 출신이라 개소리를 잘하시네요. 그딴 헛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크롬벨.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말 그대로 도륙 낸 악마 같은 년이 어딘가에서 멀쩡히 숨을 쉬고 살아있었다.
그년을 똑같이 도륙 내지 않는 이상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나 얘기하지요.”
“네...그러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전은 어떻게...”
더 이상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티보치나는 이지연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기로 했다.
“진행할 겁니다. 이미 서울까지 들어와 있는 놈들을 지금에 와서 협회와 힘을 합쳐 제압하려면 일을 시작한 것만 못하죠.”
단말기를 통한 유천과의 통화 후 들어온 정보로는 그들은 서울 각지로 숨어들어와 황금새 본관 건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그만두기에는 이미 기호지세인 상황이었다.
“유르힘을 이용한다면 그들을 제어할 수 있을 텐데요...?”
분명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지금이라도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잔당들은 행동을 멈출 것이다.
그러나 이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들은 그곳에서 죽어야 합니다. 굳이 카이안의 세력을 키워줄 필요는 없죠. 당신이 계약 당사자라서 더 잘 알 텐데요. 정말 죽을 각오를 한다면 계약주재자와의 계약을 어길 수 있다는 걸.”
그 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자신의 주인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아직도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네, 저는, 절대로, 빌런을 믿지 않습니다.”
티보치나를 보는 이지연의 눈에는 명백한 혐오가 깃들어 있었다.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유천에게 우두머리인 그녀에게 참혹한 죽음을 주는 방안을 건의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돌아오실 때까지 관련 서류를 정리해 두세요. 설명은 제가 직접 드릴 겁니다.”
“네...알겠어요.”
강자인 킬리언이 위험하다고 할 만한 적들이었지만 둘은 유천이 멀쩡하게 돌아올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은 채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