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흉성(5)
* * *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천이 해인사에서 나오자마자 이지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내용은 꽤나 심각했다.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인천으로 진입해 킬리언양이 그들을 상대하러 갔습니다. 혹시나 최악의 사태는 대비해야 할 거 같기에 급하게 연락드렸어요.]
“최악의 사태라니...거기에 하연양과 관문지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어쩌고...?”
이상했다. 관문지기들은 약하지 않다. 거기에 양하연은 랭커. 그들과 킬리언이 힘을 합치면 어지간한 전력이라도 막을 수 있다.
상상 이상의 강자, 예를 들면 하이랭커와 같은 자가 쳐들어왔다면 모를까? 그런 일이 일어난 거 같지는 않았다.
[그게...사실...]
그녀는 한 차례 머뭇거리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유천이 상상도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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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그들이 전부 서울에 있다는 거네요...?”
“네...죄송합니다...”
양하연과 관문지기들 그리고 자신이 떠난 사이에 깨어난 유르힘까지 이지연은 그들이 지금 인천을 떠나 서울에 갔다고 했다.
‘이게 뭔...’
가만히 눈을 감고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사고가속 재능으로 빠르게 머리가 회전한다.
1. 이지연과 일부 날개의 수뇌부가 황금새와 베렌듀크의 잔당이 공멸하는 작전을 짰다.
2. 킬리언을 제외한 날개 최고 전력들이 떠난 이유는 황금새 외부의 피해를 막고 남은 자들의 제거.
3. 협회에는 알리지 않았다. 괜히 눈치를 채게 하여서 도시에 퍼져 난동을 피우게 두는 것보다 한곳에 몰아넣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난리가 나겠군...’
황금새가 한국 3대 길드인 만큼 그들의 본관 빌딩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을 베렌듀크의 잔당이 습격한다면 도시 한가운데서 내전에 가까운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승패를 가늠해봤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유르힘의 부하들이 이길 것이다. 3대 길드라 봤자 고작해야 한국 내에서의 순위.
망령에 불과하더라도 중앙세계에서도 거대가문에 속했던 베렌듀크를 이길 수 없다.
아마 전투가 아닌 학살이 일어나겠지. 각성자 일반인 가리지 않고 말이다.
과격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효율적이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서로 죽이려는 적을 굳이 따로따로 상대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후우...
머리가 아파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것이 날개를 위한 작전이라는 걸.
유천이 협회와 짜고 살생부를 만든 이유는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이 다수 죽어간다면 사회가 흔들리고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참 웃기지도 않는 짓이었다. 공공의 안정을 지키는 역할은 협회의 것이지 날개의 것이 아니다. 거기에 3대 길드를 정리하는 건 협회가 원하고 있던 것 아닌가?
그런데 유천은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손해를 감수하려고 했다.
‘아직도 어정쩡했구나...’
그러니 자신을 대신해서 이지연을 필두로 한 수뇌부들이 대신 선택을 한 것일 거다.
아직 제대로 마음을 정하지 못해 어정쩡한 자신을 대신해서 벌인 일일 거다.
민간인의 학살? 황금새의 본관에서 일하는 자들 전부가 안건수의 협력자이자 방관자다.
방관자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거 아니냐고? 침묵의 대가로 봉급 이상의 보너스를 챙기는 이상 그들도 결국 협력자다.
그들이 몽땅 죽으면 잠시 사회가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지금은 괴수와 빌런이 판을 치는 혼돈의 시대. 충격은 금방 묻힐 거다.
그 이후의 협회와의 갈등 또한 냉정하게 보면 큰 문제 없다.
이만성이 말하지 않았나? 날개와 협회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결국 유천 덕분이라고, 달리 말하면 지금까지 우유부단했다는 말이다.
결국 이지연의 이번 작전은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협회와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다. 오히려 좋은 일.
‘멍청한 새끼...’
그러니 지금 유천의 가슴속에 스며드는 혐오와 분노는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리라.
예전 지구의 ‘고유천’을 잊지 못해 엉터리 같은 짓을 해버렸다. 그 결과 자신이 내렸어야 했던 결단을 이지연이 내리고 말았다. 책임을 떠넘긴 격이다.
[죄송합니다...]
저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를 청하고 있는 여자는 본인이 어떤 선택을 내린 것인지 알고 있을까?
아니 알고 있겠지. 힘만 센 자신과는 달리 훨씬 유능한 여자니까.
묻고 싶었다. 아버지인 이도경, 그리고 오랜 세월 보아온 가족 같은 이만성. 그들을 배신하면서까지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아까부터 가슴속을 치미는 불길함. 킬리언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니 지금은 모든 의문을 묻어둔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어요.”
[네...?]
당연한 질책이 들려오지 않자 이지연은 당황한 음색을 냈다.
“저는 일단 킬리언에게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시죠.”
[잠시...]
뚝
이지연의 다급한 음성을 뒤로하고 통신을 끊은 유천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
‘뛰어갈 수는 없다.’
그녀가 멀쩡할 수도 있지만, 1분 1초가 늦어서 죽임당할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그러니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구구구궁...
유천의 하체로부터 전달된 힘의 압력에 땅이 울린다. 무릎을 편다. 방향은 인천.
콰아아앙!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인간이 사라지고 수십 년 동안 조성된 숲이 본래의 폐허로 돌아갔다.
소리의 벽을 넘어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올라간 유천은 허공을 박찼다.
투웅...
허공답보와 같은 무(?)의 묘리가 담기지 않은 무식한 힘의 폭발. 그 추진력으로 유천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허공을 날았다.
예상 도착시각은 5분. 킬리언이 토이박스를 들고 갔다고 했다. 그 안에 결계를 깨고 들어갈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우연하게 그 수단이 방금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화르륵...
불이 유천의 몸을 토양 삼아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안 된다. 권능이 아니라 그 사용자인 자신이 아직 부족하다.
유천은 차원 사이에 위치한 결계를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주인이 인지하지 못한 것을 태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나 수단은 아직 한 가지가 더 있다. 공간과 차원조차 침식하는 힘이 그에게 존재했다.
[공허(??)]
검은 파멸이 몸 안에서 돌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삼키고 무(無)로 돌리는 공허라고 하더라도 권능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허나 영향은 받은 것인지, 둘이 뒤섞이며 밝은 빛에 가깝던 권능이 진득하고 짙은 황금색으로 변모한다.
공간을 잠식하는 공허가 길을 내고 금화(?火) 그것을 따라 유천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다 왔군...’
그 사이 유천의 눈에 익숙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저거?!
태양...?
도망쳐!
이글거리는 화염을 휘감은 유천의 모습은 지상으로 추락한 태양과 같았다. 그것을 목격한 시민들이 혼란에 빠져 사방으로 도망친다.
이목의 집중을 끌었지만 유천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후에 발생할 혼돈보다 킬리언의 목숨이 더욱 중요했다.
슈욱!
유천은 수직으로 도시를 향해 추락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곳에 펼쳐져 있을 결계를 향해 떨어졌다.
콰드득...!
떨어지는 중간, 그를 중심으로 흐르는 공허의 불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찢었다. 아마 저것이 토이박스의 결계일터.
‘제대로 도착했군.’
균열 안으로 회색 도시가 보인다. 마치 전쟁터와 같은 광경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겠지.
‘킬리는 어디...’
유천이 주변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의 발밑 아래 주저앉아 피를 흘리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는 칼을 든 수인족 여인이 있었다.
하얀 머리에 노란 눈 어디선가 본 외형이었다. 뭔지는 나중에 생각한다. 다시 킬리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행이야...’
상체가 위아래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걸로 봐서는 살아 있는 걸로 보였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저 칼날에 목숨을 잃었을 거다.
쿠웅...
바닥을 부수며 착륙한 유천을 중심으로 황금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것이 킬리언과 카렌을 덮었지만 괜찮다. 저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면 불사르지 않으니까.
가만히 주저앉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뜬 킬리언이 유천을 올려다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검게 물든 눈과 한 차례 마주친 후 유천은 그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속에서 치솟는 분노와 안도의 감정은 꾹 눌렀다.
잘못 흥분했다가 부상을 입은 그녀가 더욱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가까워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음...킬리.”
피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 창백해진 모습을 보자 안도감은 가라앉고 분노가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예쁜 이목구비를 보니 그것 또한 가라앉는다. 그러고 남은 애매한 감정이 쓴웃음으로 나왔다.
“너한테 할 말은 많지만...”
왜 무모하게 힘을 아껴가며 싸웠느냐고? 내가 못 미더웠냐고? 떠오른 말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저 살아있어 줘서 고마울 뿐이었다. 그녀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상기된 양쪽 볼은 창백한 안색과 대비되어 더욱 붉어 보였다.
“일단 좀 쉬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 테니.”
흥분했던 감정이 가라앉자 저 질질 짜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카렌 오스텐.
오스텐 가문의 장녀이자 미래의 하이랭커. 게임에서 그녀와 관련된 스토리도 진행해본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시기라면 흉성인가...’
대강 상황이 파악되었다. 백귀야행은 4성 마빈의 특수마법. 아마 각시탈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을 찾으러 맴버들을 보낸 것일 테다.
그녀는 그 명령에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일 거고.
게임 속에서 카렌이 가장 후회했던 과거는 흉성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 때문에 오스텐이 망하고 그녀의 존재가 붕 뜨게 되니까.
그래서 유천이 나중에 중앙세계로 갔을 때 영입을 고려한 대상이기도 했다. 이런 형태로 마주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히,히익...!”
카렌의 유천과 눈이 마주치자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주르르륵...
그리고 가랑이 사이가 젖기 시작했다.
하...
그 모습에 유천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 전사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자유로운 여자가 눈물 콧물 거기에 오줌까지 지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뭐 그런다고 살려줄 생각은 없지만.’
죽이기에 아깝기는 했다. 카렌은 하이랭커의 자질을 지녔고, 꽤 비중 있는 서브스토리의 당사자다.
하지만 나중이 어떻든 지금의 그녀는 5대빌런단체의 일원으로 와 킬리언을 죽이려고 했다. 살려둘 수는 없다.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타오르는 화염은 마음 속 뇌관만 당기면 저 여자를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없애리라.
‘태워 죽...’
유천 잠깐만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전에 죽이려고 할 때 킬리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