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흉성(3)
* * *
쿠구구궁...
‘저건...이길 수 없어...’
킬리언의 보랏빛 마기가 뒤섞인 투기(?)가 치솟는 것을 본 카렌의 수인으로서의 본능이 말한다.
저 은발 여자는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이상해...’
그녀는 킬리언에게서 마치 격이 다른 괴수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마치 옛날 멀리서 봤던 네임드의 느낌과 같이 말이다.
‘그럴ㄹ.’
“카렌.”
“예?”
카렌이 그렇게 눈을 찌푸리고 있을 때 멜데이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기본전술에 대해 배운 적 있나?”
저만한 적이 자신의 사지를 뜯겠다고 했는데도 멜데이아의 눈빛은 여전했다. 과연 오랜 세월 용병 생활을 해온 용인족이었다.
장생종인 그들 기준에서 오래되었다는 건 정말 한 인간의 평생 이상에 해당하는 시간을 싸워왔다는 거니까.
“네 배웠어요...”
“그럼 SS3 진형으로 간다.”
“네...?”
“엘테론... 그래도 되겠나?”
“합리적이군...그러도록.”
“자, 잠시만요! 그 진형은...”
SS3, 정식명칭은 따로 있지만, 용병들은 끈끈이 허수아비(Sticky Scarecrow)라고 부른다.
그 3인 대형은 간단히 말해, 오로지 한 명이 자처하여 동료들을 믿고 희생하는 진형이었다.
한 명이 강대한 적을 물고 늘어지면 두 명이 숨어 기습하는 그 지독한 작전을 멜데이아는 제안했고, 엘테론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더는 시간이 없다. 가라”
엘테론이 카렌의 말을 단호하게 막았다. 킬리언에게서 느껴진 살기 섞인 투기가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좋은 신호는 아니다. 그것을 갈무리했다는 의미, 즉 죽일 준비가 끝났다는 거다.
“미안하다네...”
엘테론은 흉성에서 꽤 오래 같이 활동했던 맴버. 그런 이를 제물로 삼는 것이 멜데이아도 속이 좋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건 동료를 희생시키는 작전은 처음인 카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별말을 다 하는군. 어서 사라져라.”
하지만 오크 기사는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는지 태연하게 꺼지라는 듯 손짓했다.
“그럼...”
그 말과 함께 엘테론은 등 뒤에서 두 개의 기척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둘 생각이 없던 킬리언이 둘을 쫓아가려 했으나...
콰아앙!
땅을 가르는 강력한 검광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킬리언은 먼지를 치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크르르...
더 이상 둘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안광이 검광의 주인에게 향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의 묵묵한 표정이 아닌 능글맞게 웃고 있는 오크가 보였다.
“어딜 가시나 레이디 그대는 나와 춤을 추셔야지.”
......네놈 혼자서 나를 상대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킬리언의 말에 엘테론은 커다란 어금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흐...이보시게 레이디. 충고 하나 하지. 소드마스터를 얕보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소드마스터(Sword Master).
그들은 단순히 랭커가 아니다. 과거에는 검의 망령의 인정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었던, 지금은 마헬제국 검궁(??)의 시험을 받고 통과해야 얻을 수 있는 자격이자 상징이다.
그리고 오크 기사 엘테론이 받은 시험은 절대방위선에서 네임드 하나를 죽이고 오라는 것.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 근위기사의 자리를 내려놓고 파견 온 절대방위선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그의 파견부대인 위원회 제16 기사단의 주요 임무는 ‘어스 브레이커’가 파놓은 땅굴을 통해 올라오는 정예 상위 괴수 토벌.
그곳에서 매일 같이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괴수들을 썰어야 했다.
검만을 집착했던 고귀했던 기사는 그 지옥에서 1년의 세월이 걸려서야 검은 오로지 죽이기 위한 물건이라는 걸.
그리고 더 잘 죽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손에서 놓고 스스로가 검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그것이 검궁에서 이런 악몽에 가까운 시험을 내리는 이유.
그 후 다시 5년, 결국 기어코 살아서 네임드 ‘해피페이스’를 죽였다.
그때 엘테론이 괴수의 목숨을 끊은 것은 손에 든 검이 아닌 그의 송곳니였다.
그렇게 엘테론은 검궁의 시험을 마치고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참...그때가 떠오르는군...’
그리고 눈앞의 여자는 그 괴수와 닮았다. 동료들을 찢어 죽이던 예리하게 다듬어진 살기와 내차원과는 다른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마력.
아마 저것이 멜데이아가 말한 마족이란 것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허나 지금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운다.
‘더 빨라지고 강해졌겠지...’
저렇게 변한 이유가 없을 리 없다. 어디로 오든 대처하기 위해 중단 자세로 검을 겨눈다. 킬리언의 무릎이 살짝 구부려지는 것을 보고 엘테론은 힐트를 더욱 강하게 쥐었다.
콰직!
“크으윽...!”
인영이 사라졌다. 팔뚝이 도려내 지고 나서야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느끼고 상체를 뒤틀지 않았다면 도려내진 건 팔뚝이 아닌 목이었으리라.
쉬이익!
전후좌우 비정형적으로 움직이는 킬리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움직이고 한참 후에야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해피페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압도적인 적. 거기다 그때와는 달리 도울 동료도 없는 최악의 상황.
그리고 그의 경험상 이길 수 없는 적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상대할 수 없다.
후우우...
두 눈을 감는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다.
두 귀를 닫는다. 들렸을 때는 이미 죽어있을 거다.
오감(五?) 전부와 사고(??)조차 버린다. 그는 소드마스터.
검에 혼을 바친 검귀(??). 지금 필요한 것은 오로지 쌓아온 검의 기량과 전장의 육감.
콰앙!
땅이 부서졌다.
정수리.
검면으로 흘리고 나서야 이 괴물이 어디를 노렸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채채채채채챙!!
“흐읍!”
박자도 규칙도 보이지 않는 짐승의 움직임이었다.
심장, 목, 척추, 복부, 눈...
일관성 없이 비효율적으로 쏟아지는 공격이었지만 저 정도로 빠르다면 무엇보다 치명적이다.
끝없이 예리하고도 차가운 폭력. 그것을 오로지 기량과 예지에 가까운 육감만으로 막아낸다.
콰가각!
정면을 피하고 비틀고 흘리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았음에도 육체가 비명을 지른다.
촤악!
“으음!”
결국 또 한 번의 일격을 허용했다. 빠르게 찾아온 육체의 한계로 근육의 떨려 반응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대퇴부의 근육과 핏줄이 갈라졌다. 쫙 갈라진 허벅지로부터 피가 쏟아진다. 기동성에 큰 문제가 생겼다.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의 자신은 탱커. 정면에서 모든 공격을 받아내는 자. 몸이 찢어져도 날뛰는 멧돼지를 물고 늘어지는 사냥개다.
상대가 짐승이 되기로 했으니 자신 또한 그리해야 한다. 그때처럼.
다행히 이성을 반쯤 상실한 이 여자는 이곳에서 사라진 다른 두 동료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엘테론 자신만을 노리고 있다.
‘빈틈을 만든다.’
틈을 만들면 숨을 끊는 것은 어딘가 숨어있는 두 동료들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다가왔다.
“커억!”
왼팔과 옆구리 사이로 내질러진 주먹질. 팔을 벌려 피했지만 거기서 나온 예리한 풍압에 상완근과 전거근이 뜯겨나감을 느낀다.
‘지금!’
이를 뿌득 물며 참은 엘테론은 그대로 검을 놓고 사이로 들어온 팔을 붙잡는다.
빠드득...
칼을 버린 오른팔마저 동원하여 킬리언의 보랏빛 생체갑주를 비틀어 쥐었다.
부러진 뼈가 튀어나오고 근육은 가닥가닥 끊어졌다. 거기에 다량의 출혈로 정신마저 희미해져 가는 상황.
몇 주는 누워있어야 하는 중상이었지만, 엘테론은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해 억지로 버티고 섰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아마 마지막. 놓치면 더는 기회가 없으리라.
끄드득...
“끄읍...!”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제대로 포착한 킬리언의 팔을 전력으로 붙잡은 그의 상체에서 마력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아마 이제 팔이 봉쇄된 이 괴물의 후방을 동료들이...
아...
아니다. 착각했다. 엘테론이 고개를 들어 마주친 은발 여자의 검게 물든 눈은 가라앉아있었다.
'내가 아니었다...'
이 여자는 이성을 잃은 짐승이 아니라 사냥감을 유인하는 사냥꾼이었다.
이것은 기회가 아닌 함정. 빈틈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드러내 준 것이다. 일망타진하기 위해...
쉬이익!
그녀의 뒤로 보인다. 빠른 속도로 킬리언의 후방을 노리는 두 동료가...
“오, 오지 마라!”
기사는 소리쳤지만 이미 그때는 뒤까지 다가온 상태.
그녀의 등을 노리는 카렌과 멜데이아의 단검과 주먹에는 전력이 실려 있었다. 저만한 관성을 비틀 수는 없다.
“크윽...!”
어쩔 수 없다. 이곳이 분기점. 부딪쳐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저 더욱 강하게 그녀의 팔을 내려 눌렀다.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방해가 되도록 말이다.
“죽어!”
슈욱!
킬리언의 후방에서 예리한 검기와 둔중한 권기가 날아온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목표는 눈앞의 오크가 아니라 숨어서 자신이 틈을 드러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둘.
축적시켜 놓은 거대한 마기를 붙잡힌 킬리언의 오른팔에 담는다.
그녀가 생체갑주를 꺼낸 이유는 몸을 지키기 위해서도, 단순히 더 빠르고 강해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때도 막으려면 갑주를 꺼내지 않고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셋을 박살내기에는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확실한 힘을 써야한다. 그리고 그 기술은 지금의 몸과는 비교도 안 되는 높은 내구도가 필요했다.
그녀는 떠올렸다. 과거 유천에게 죽을 뻔했던 그 순간을. 압축시킨 마기를 팔 내부로 순환한다.
우우웅...
‘지금...!’
압축시켜 고속으로 순환시킨 마기를 팔꿈치를 통해 방출시켜 그녀 후방의 공간을 터트린다.
투웅...
묵중한 소리와 함께 원형의 보랏빛 파동이 퍼져 나갔다.
“아...!”
검기가 실린 카렌의 단검이 부스러져간다. 카렌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모든 걸 분해하며 다가오는 파동을 지켜봤다. 저건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재앙.
카렌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나 싶었을 때, 그녀 옆에 있던 얼굴을 일그러뜨린 멜데이아가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크윽!”
그리고 마력에 담긴 꿰뚫기 위한 형(?)을 억지로 비틀어 보랏빛 파형에 맞춰 신속하게 마력을 터뜨렸다.
인식하고 명령하는 뇌를 넘어 오랜 시간 몸에 새겨진 생존본능이 그 과정을 찰나에 수행했다.
[용각공진(????)]
뭣?!
두 개의 보라색과 흰색의 원형 파동이 겹쳐져 상쇄된다.
콰과과광!!
방향을 잃은 힘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 건물의 잔해를 파괴했다.
킬리언의 오른팔을 붙잡고 있던 엘테론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기절한 채 날아갔다.
“쿨럭! 내가기공은 이 몸의 전공일세.”
멜데이아는 터지고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인 오른팔을 부여잡으며 다량의 피를 토했다.
마력회로는 과열되었고, 몸 안을 돌아다니는 파괴적인 진동이 이 순간에도 몸을 찢고 있었다.
“허나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그게 무...쿨럭...!
킬리언이 피를 토했다.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아픔보다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이게 무슨...
“흐흐...말했지 않았는가? 내가기공이 전공이라고 말이야.”
멜데이아는 창백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그는 공진으로 그녀의 파동을 파훼할 때 그 일부를 킬리언에게 때려 박은 것이었다.
까득!
그래봤자다!
킬리언 자신은 아직 움직일 수 있다. 자신을 막던 오크는 방향을 잃은 파동에 날아가 기절했고 남은 거라고는 지금 반쯤 시체가 된 이 자...
그 여자는 어디?!
멜데이아 옆에서 시체가 되어있어야 할 카렌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너뿐이다. 카렌 네 역할을 해내라...”
그 말을 끝으로 멜데이아는 풀썩 쓰러졌다.
쉬익!
동시에 옆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에 킬리언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머리 위로 검기가 실린 칼날이 그녀의 은발을 스쳤다.
감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양손 단검 중 하나만을 역수로 쥔 채 자신을 노려보는 카렌이 있었다.
그녀가 멀쩡히 살아있는 이유는 멜데이아가 그녀에게 향해야 할 파동을 본인이 전부 부담했기 때문이다.
카렌은 반쯤 시체가 되어버린 엘테론과 멜데이아를 한차례 쳐다봤다.
‘선배님들...’
엘테론과 멜데이아의 인성이 어떤지는 둘째 치고, 존경할 만한 전사였다.
저 괴물 같은 은발 여자의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몸은 떨렸다.
몸에 돋아난 완전했던 갑주가 갈라지고 틈새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정상적인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그에 비해 카렌이 잃은 것은 고작 단검 하나.
둘은 자신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강자와 맞붙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자신만 잘하면 된다.
후우...
“덤벼 괴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