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흉성
* * *
“아...”
눈을 뜨고 양손을 들었다. 황금의 불이 손의 윤곽을 타고 넘실거리고 있었다.
거기서 늑대 신수의 불과 같은 끝없는 강대함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격의 압도적인 분위기는 존재했다.
유천은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불을 관찰했다.
“밸런스가 중요하네.”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기분 나쁜 나른함이 느껴진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힘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권능이 워낙 오버스팩이라서도 있겠지만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리라. 가정집에 슈퍼컴퓨터를 들인 셈이다.
“거기다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군.”
불을 노려보며 손바닥으로 뭉치라고 의지를 보냈지만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귀찮다는 듯 거부하는 것 같았다.
뭐 이딴 게...
유천은 인상을 구겼다. 자신에게 뿌리내린 주제에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계속해서 소모되는 힘이 생각보다 많았는지 점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불필요한 힘의 소모를 막기 위해 의지를 보냈다.
‘돌아가라’
화륵...
사지백체(四???)에 퍼져있던 금빛 실선들이 복부의 마력기관으로 환원되었다.
다행이었다. 이것마저도 듣지 않았으면 곤란해질 뻔했다. 힘을 모조리 소모하면 또 꼴사납게 픽하고 기절할 수도 있지 않겠나.
쿠궁!
유천의 머리에 묵중한 음이 들렸다. 몸에서 권능의 빛이 사라지자 온몸에 다시 힘이 차오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마법을 쓰면 일부 마력이 페이백되는 것과 같이 권능 또한 바친 힘을 일부 되돌려주는 것 같았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유천은 대강 정리해보았다.
1) 이 금화(금색 불꽃이라 임시로 그렇게 명명했다.)는 물리력을 태워 피워 오른다.
2)상당히 비효율적이며 어째선지 마력처럼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3)그래도 힘의 영구적인 소모는 없었다.
단점이 더 많았다. 결국,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배우고 훈련하고 숙달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유천은 늑대 신수를 쳐다봤다.
지금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그뿐이었다. 하지만...
치지직!
「음...내가 가르쳐 주고 싶지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늑대를 포함한 모든 신수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오래된 텔레비전의 노이즈만이 가득했다.
「거기에 나는 스승이 되기 적합하지 않네.」
“...그건 또 무슨...”
그건 또 무슨 황당무계한 소립니까? 라고 말할 뻔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힘을 준 존재가 아니면 누가 자신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더 이상 상대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기에 머리와 입에 맴돌았던 의문을 삼키고 다른 질문을 건넸다.
“......그럼 저는 누구한테 배울 수 있습니까?”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 건 너무도 사양하고 싶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다루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는가?
「수십만 년의 권능의 모방 물들 그것들 전부가 너의 스승이 되어 줄 게다.」
권능의 모방물...유천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까?”
「마법, 초능력 불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좋다.」
마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건가? 한숨이 나왔다. 유천은 날개에 있는 마법서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재능만 보면 대마법사가 될 수 있었으니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법서에 그려져 있는 그 복잡한 마력 구조체를 읽다 며칠 만에 덮고야 말았다.
마법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려면 너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효율적이었다. 그 시간 동안 힘을 갈고 닦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런데 권능 때문이라도 배워야 하게 생겼다. 할 일이 끝없이 늘어나는데 한숨이 안 나오게 생겼는가?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제 슬슬 하체부터 사라지고 있는 저 늑대는 왜 저렇게 태연하단 말인가? 정말 살 만큼 살아서 세상이 망하든 상관이 없어서 저런단 말인가?
“무슨 말씀입니까?”
제대로 된 설명이 없어. 유천은 자연스럽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나왔다.
「나중에 직접 확인하면 알 거다.」
“아니 좀 더...”
「그보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두 가지 충고만 하겠다.」
“......”
정말로 시간이 없는 듯 이제 머릿속의 목소리도 지지직... 거리고 있었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라진 아버지의 유산을 찾아라. 그것이 있어야 근본적으로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
“......”
‘창조주의 유산...’
신수가 말한 것은 라스트 레거시의 근본 목적이었다. 하지만 유천은 그것이 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은 그저 고대 인류의 실수로 인해 소실되었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 하지만 부서졌지... 가증스러운 거짓된 존재에 의해서 말이다.」
구구구궁...
대기가 울렸고 늑대의 눈이 거멓게 타올랐다. 분노. 저 절대자가 처음으로 분노를 표하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것이 어떤 키워드라도 되는지 다른 신수들의 주변 공간들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의 사라진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육체는 짓눌렸을 것이다.
그에 유천은 다시 한 번 눈앞의 신수들이 어떤 존재인지 절실히 실감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그 거짓된 신의 잔재들과 추종자들을 불태워라. 그 버러지들의 죽음이 너를 유산으로 이끌 것이다.」
띠링!
늑대의 말과 동시에 시스템이 한차례 울렸다.
「내가 보낸 것이 있으니 나중에 확인해 보아라.」
“네...”
아마 저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관련이 된 것일 거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이제 눈만 남은 늑대는 아직 할 말이 더 있어 보였다.
「너의 불은 상당히 위험하다.」
신수의 불은 거대하고 강력하지만 오로지 명계를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명계의 토지인 동시에 윤회를 관장하는, 세상을 기계의 일종이라고 쳤을 때 가장 거대한 톱니바퀴 중 하나일 것이다.
허나 유천의 불은 달랐다. 이건 오로지 유천이 적이라고 규정한 대상을 불태운다. 금화(?火)에게 세상은 유천이라는 거다.
그가 세상의 적이라고 판단한 자를, 삶에 방해가 된 자를 처단하는 심판자. 그것은 마치 오만한 광신도를 닮아있었다.
아직은 고작 새싹에 불과한 힘이었지만 완전히 자란다면 유천이 원할 때 하나의 차원도 불살라버릴 것이다.
「그러니 신중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태울지. 스스로 멸망을 불러오지 않으려면 말이다. 인과(??)의 사슬은 우리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정말로 떠날 것 같아 보이는 늑대 신수에게 유천은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고통스럽기도 했고 의문도 많이 남은 시간이었지만 상대는 많은 것을 베풀어준 존재였다.
명계에 갈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으면 좋은 술이라도 하나 사가리라.
「술을 사올 거라면 반고의 영석(??)주를 들고 오너라.」
유천이 머릿속을 울리는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신수들은 사라져있었다.
“영석주라...”
반고에서는 소주 같은 술이었다. 위대한 존재인 것과는 달리 입맛은 참 소탈하다 생각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도록 하죠.”
유천은 언젠가 반고에 들려 하나 사 명계로 가겠다는 마음을 한구석에 박아 넣고 이제 쓸쓸해진 장경판전을 빠져나왔다.
*
“이곳이 인천인가?”
“네 이 도시에서 각시탈이란 놈들이 사라졌네요.”
“후진 동네군.”
“뭐...보니까 이 나라에서도 그다지 대접이 좋지 않은 도시라고 하니까요.”
흉성의 삼인방은 반쯤 부서진 고층 빌딩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낡았다. 딱 그 말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잘 관리되지 않은 벽 사이에는 꿉꿉한 곰팡이들이 피어있었고, 벽이 부서진 사이로 보이는 철근에는 녹이 슬어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것은 폭이 수백 미터나 되는 크레이터였다.
폐허. 이쯤 되면 여기서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럼 카렌”
“네 한번 찾아볼게요.”
카렌은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땅을 짚었다. 그녀의 나른했던 동공이 부릅떠지며 세로로 갈라졌다.
[천감(??)]
그녀의 야수로서의 감각이 땅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확장되었다.
육감이 옥상, 빌딩을 넘어 점차 도시 전체로 확장되었다. 이것이 그녀가 오게 된 이유였다.
레인저로서 일류 종족인 견족과 묘족. 그중 견족 최고의 가문인 오스텐의 직계. 그것이 카렌이었다.
그들은 카렌의 감이 이 도시에서 가장 강한 자를 찾으면 그에게 향할 것을 우선했다.
최고의 강자라면 당연히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빠삭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잰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큰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래 봬도 5대빌런 단체 흉성의 맴버였다.
이런 차원에서 자신들과 비견될 강자는 거의 없었다. 물론 합천에서 본 그 괴물은 예외다. 그런 것은 중앙세계에서도 드물었으니까.
“으음...”
그러나 수색을 마친 카렌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였다.
“왜 그러나 카렌?”
“선배님......아무래도 일이 쉽지는 않겠어요.”
“또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 말에 오크 기사 엘테론이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마르바렉님의 지령을 완수하지 못해 신경이 거슬렸던 참에 또 무슨 변수가 발생했단 말인가?
“제 천감이 걸렸어요...”
!!!
엘테론과 멜데이아는 눈을 크게 떴다. 카렌의 천감은 자신들이라도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예상이 빗나갔다. 카렌의 말은 그 괴물을 제외하고도 그런 강자가 지구 거기서도 이런 조그마한 나라에 더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피하기에는 늦었어요. 정확히 저희를 파악하고 있어요. 곧 이곳으로....”
“그래...나도 느껴진다네...”
멜데이아의 역린도 짜르르 울렸다. 짐승의 흉포함과 광폭함이 담긴 기세가 빠르게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짙은 혈향(血?)을 풍기는 기운은 분명히 강자이자 전사의 그것이었다.
하아...
“되는 게 하나도 없군... 정말”
스르릉...
한숨을 쉰 엘테론이 등에 찬 글레이브를 뽑았다. 감지가 특기가 아닌 오크의 피부에도 느껴졌다. 그리고...상대는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등 뒤!
순식간에 하체를 뒤틀어 시뻘건 검기를 담은 글레이브를 등 뒤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충격에 고층 건물 전체가 울렸다.
까드득!!
무슨 힘이!
태생적으로 강인하고 질긴 오크의 뼈와 근육이 손상됐다. 만약 충격을 발밑으로 분산시키는 것이 늦었다면 손상되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손해를 봤군...
느껴진다. 이 무식한 둔기를 든 은발 여자는 명백히 자신보다 강자.
그런데 거기에 전투 시작부터 신체능력에 손실을 보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크의 눈은 여전히 냉정했다. '소드 마스터'라는 자리는 딱지치기로 따지 않았다.
“혼자 그렇게 무작정 달려들면 되나?”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고, 우리는 신성한 대결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역할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렇게 해야지.
오크는 그대로 글레이브를 놓고 팔로 묵직한 둔기를 휘감았다.
지금의 자신은 소드 마스터가 아닌 탱커이자 야수의 목에 목줄을 채워야 하는 조련사. 움직임을 묶는다.
쉬익!
그리고 예상대로 은발 여자의 왼쪽 대각선 뒤에서 카렌이 양손의 곡도를 팔다리 인대를 자르기 위해 빛살 같이 휘둘렀다.
파앙!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멜데이아의 주먹이 바람을 뿌리치고 정확히 턱을 부수기 위해 나아갔다.
둘 다 확실히 제압을 위한 공격이었다. 이 정도 강자라면 분명 각시탈에 대해 알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엘테론에게 움직임을 봉쇄당했을 거라 생각했던 여자는 무심히 무기를 놓았다. 그리고...
샤아아...
[신기루]
사라졌다. 잔상과 무기만을 남기고.
“뭐?!”
카렌은 자신이 잔상을 베었다는 것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건 주먹을 내질렀던 멜데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아차!’
흩어지는 잔상을 보며 흐트러졌던 정신과 감을 날카롭게 하고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재빠르게 돌아 검을 겨눴다.
‘멍청한 년...’
식은땀이 났다. 이런 신속한 상대를 앞에 두고 일순간이지만 집중을 잃었음을 자책했다.
고속 전투에서 집중을 잃었다는 건 죽여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너흰 누구냐?”
그러나 무기를 놓고 물러난 은발 여자, 킬리언은 청바지에 손을 꼽은 채 물끄러미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