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토사구팽
* * *
유천이 해인사로 떠난 사이 과도한 마력사용과 부상으로 실신한 유르힘이 깨어났다. 티보치나는 깨어난 그에게 그가 기절한 사이의 일을 들려줬다.
“그렇군...”
유르힘은 무너질 대로 무너진 베렌듀크의 현 상황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수천 년의 역사와 최초의 용사가문이자 중앙세계 최고의 가문이라는 영광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하지만 받아들여야겠지...”
자신의 주군이 살아가는 것을 택하셨다. 그러니 죽을 수는 없다. 이제 자신도 유천의 노예 신세가 될 것이다.
허망했지만 그렇다고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저 받아야 할 벌을 받은 느낌이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된 거였어...’
모든 게 무너진 지금에서야 눈이 밝아졌다. 반대했어야 했다.
베렌듀크의 영광과 재림이라는 이유로 그런 불명예스러운 짓을 행하려고 하는 걸 막아야 했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두고 남은 자들은 그 삶을 살았어야 했다.
오히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이 악물고 버텼다면 다시 한 번 베렌듀크의 영광을 되찾을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티보치나...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지.”
그녀도 직접 겪었으니까 알았던 거겠지. 그가 우리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카이안을 살리기 위해 그녀 나름 발버둥을 친 것이다.
“감사는 제가 아닌 주인님에게 표하세요...”
티보치나는 그가 자신이 지금부터 할 얘기를 끝까지 들어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유르힘은 그녀의 각오 서린 눈을 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 잠깐 남은 부하들은 어떻게 했나? 그대라면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유르힘은 각 부하 백 명씩을 이끄는 부관급 기사 다섯만을 데리고 왔다. 즉 나머지 300명의 수하들은 자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그대로 대기 중에 있다는 것이다.
대기 명령 후 시일이 꽤 지난 상황 일이 틀어진 것을 깨닫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다.
유르힘의 부하들은 각성자 등급으로는 최소 A등급이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이 나라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날개와 협회의 동맹이 틀어질 수도 있다.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가는...”
“알고 있어요.”
그러나 티보치나의 주홍색 눈은 여전히 태연했다. 이미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주인을 잃은 충견은 침입자를 물어뜯을 거다...그것이 날개가 내린 결론이에요.”
“뭐? 아니 잠깐! 설마...! 황금새를 이 기회에 정리할 생각인가?”
유천과 싸우기 전 여명을 관리해 온 그는 저 침입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의 부하들은 유능하고 충성스럽다. 카이안의 남은 세력인 여명을 지키기 위해 그 적의 수장인 안건수의 목을 치려고 할 것이다.
“그건 협회와도 얘기된 사안인가?”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희생을 야기할 것은 분명했다. 길드는 각성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안건수가 있는 황금새의 본청을 습격하면 거기에 있는 일반인들도 쓸려나갈 것인데도 협회가 찬성했다는 말인가?
적어도 유르힘 그가 본 이만성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에...
“그 전에 그가 찬성한 것인가?”
유르힘이 본 유천 그는 빌런을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일반인들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작전을 찬성했다는 말인가?
티보치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번 작전에 대해 주인님은 아직 모릅니다...”
날개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이지연과 양하연 그리고 티보치나다.
그런 그들이 유천 몰래 무언가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협회와 함께 짠 살생부의 명단은 거짓,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죠.”
협회에게 준 명단에는 오로지 황금새의 각성자들만 적혀있지만, 날개에서 가지고 있는 진짜에는 일반인들도 포함되어있다.
안건수의 더러운 일을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하고 있는 자들 날개는 그런 생계형 범죄자도 전부 죽여야 할 자들로 명단에 올려놨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안건수가 있는 본청에 모여 있죠.”
“......”
“당신의 부하들이 안건수를 포함해 황금새 본청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였을 때쯤. 그들은 양하연과 관문지기들을 마주할 겁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중앙세계의 빌런단체가 황금새를 습격했다고 알려지겠지요.”
“내 부하들을...토사구팽 하겠다는 건가...?”
티보치나는 자신을 노려보는 그를 향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준비는 모두 마쳤어요.”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였다. 사냥을 끝낸 사냥개를 솥에 넣을 준비를...
유르힘은 이를 갈았지만, 이것 또한 패배한 악당의 결말이라는 생각에 한숨만 내쉬었다.
“후우...그래...그건 어쩔 수 없다고 친다 해도 문제가 하나 남지 않았나?”
“......”
“어째서 그에게 말하지 않았지? 이건 일종의 반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전부 죽고 싶어 그러나?”
최고 결정자를 속이고 이 정도의 일을 벌인다? 유르힘의 상식으로는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반역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 말에 티보치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을 해도 믿을지 모르겠지만, 주인님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려요.”
전투 상황에서 나오는 그 폭력성에 묻혀서 그렇지 그녀가 한 달간 곁에서 지켜본바, 평상시 유천의 성정은 물렀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예요. 당신도 알잖아요? 이런 일은 일거에 하나도 남김없이 멱을 따야 한다는 걸. 그리고 거기에 회색분자가 남아있을 자리는 없다는 것 또한 말이죠.”
“......”
저 말이 맞다. 전쟁에는 적 아니면 아군뿐이다. 그 사이 애매한 방관자들은 적보다 짜증 나는 놈들이다.
“그런데 그분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유천은 협회와 함께 그런 회색분자들도 살리고자 했다. 각성자들의 일에 일반인을 배제하려는 협회의 질서를 굳이 따르려 했다는 거다.
이지연을 비롯한 몇몇, 심지어 킬리언마저 못마땅해했다. 내버려두면 아군의 소모 없이 지들끼리 알아서 싸우다 죽을 자들이다.
날개는 거기에 남은 것들만 주워서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굳이 어렵고 귀찮고 더러운 과정을 밟을 이유가 없단 말이다.
“주인님도 이번 일로 아셔야 해요. 지배자는 연민할 수는 있어도 동정해서는 안 된다는 걸요.”
방관을 한 회색분자들을 동정해서 살려주면 안 좋은 선례가 남는다. 날개를 더욱 키워나가야 하는 처지에서 좋은 일은 아니다.
“거기에 이 작전으로 협회와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도 제대로 정립해야죠.”
협회는 유천이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절대 날개의 위에 설 수 없다. 굳이 그들의 질서에 순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협회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의 부하들을 제압했다는 동아줄 정도는 쥐여줄 거니까요.”
협회는 괜찮은 방파제다. 빌런단체를 막지 못했다는 오명 때문에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이제 궁금한 것은 없나요?”
“아니... 하나 더”
유르힘은 한 가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이지연...정말 그녀가 이번 일의 기획자 중 하나라는 말인가?”
이번 일은 분명 협회에 정면으로 반하는 작전. 아니 협회의 존재 근간을 흔들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아버지인 이도경도 마찬가지,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여론의 먹잇감으로 몰아넣을 생각이란 말인가?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미쳐있어요.”
유르힘의 물음의 의도를 캐치한 티보치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이지연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인 이도경이 아니다.
빌런들을 죽이고 유천의 세력인 날개를 최대한 키우겠다는 마음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협회는 귀찮게 하는 아군에 불과했다. 거기에 비록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죽은 시점에서 그녀에게 남은 아버지는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저 원망의 대상이에요.”
유르힘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렇다 해도...”
띠리링~
“잠시만요.”
그때 티보치나의 스마트폰이 울렸고 메시지를 본 그녀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마침 타이밍이 좋네요.”
“뭐가 말인가?”
“당신 부하들이 슬슬 움직이려고 한다고 하네요.”
그 메시지는 유르힘의 부하들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유르힘... 당신에게 하나 부탁이 있어요.”
“뭘 말인가?”
티보치나가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하는 부탁에 유르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지금 병력으로는 약간 불안한 감이 있어요.”
하지만 유르힘이 나선다면 확실하게 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겠지.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챈 그가 눈을 부릅떴다.
“미친...설마?”
“제가 이런 정보를 주절주절 설명해준 이유가 심심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그 은발 여자가 있을 텐데?”
“그녀는 나설 수 없어요.”
킬리언은 유천이 없는 지금 날개의 최대 무력. 주요 전력들이 빠져나간 날개를 지켜야 했다.
“거기에 당신으로서도 주인님에게 가진 것을 스스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신뢰를 사는 데에 나쁘지 않을 텐데요?”
“너...”
“거기에 그게 카이안님에게도 차라리 도움이 될 거고요.”
애매한 전력을 밑에 데리고 있어봤자 눈총만 살 뿐이라고 티보치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잔인한 부탁이었다. 그녀는 카이안의 세력이자 직접 키운 수하들을 자신의 손으로 제거하라고 말한 거니까.
유르힘은 그녀를 핏발 선 눈으로 노려봤다.
“주군은...이걸 아시는가?”
“아니요. 그분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너는 정말로 주인을 바꿨군...”
그는 저 말로 확실히 알았다. 그녀의 주군은 이제 카이안이 아니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카이안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의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이라는 것 또한 말이다.
그녀는 그의 환멸에 찬 눈동자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네...맞아요. 카이안님에 대한 은혜는 이번 일로 갚았고, 이제 제가 있을 곳은 날개니까요.”
베렌듀크와 유천과의 싸움 후 티보치나도 생각을 정리했다. 뭐가 어쨌든 배신자 낙인이 찍힌 이상 카이안의 곁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더 이상 저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미 그가 자신을 부정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묶여있지 않고 나아가기를 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도 잔재들을 버리고 새로 나아갈 준비가 되면 나가서 아무에게나 물어 지휘소로 오세요.”
티보치나는 유르힘에게서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내뱉은 후 등을 돌려 빠져나갔다.
“......”
공간을 울리는 구두 소리마저 사라진 고요해진 병실에서 유르힘은 티보치나가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촤악!
채채챙!!
크아악
“뭐야...이것들 뭐냐고?!”
경산에 존재하는 물류센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황금새의 살수팀 총괄팀장인 여강문은 믿기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여명의 비자금과 중요문서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 황금새의 살수팀 전원을 데리고 급습했다.
전원을 동원한 것도 이만한 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도망치는 자들을 막기 위해서 데려온 것이었다.
당연히 압도적인 전력이라고 판단. 여강문은 순식간에 이곳을 제압한 후 문서와 비자금을 챙겨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튀어나온 60명가량의 정체불명의 인물들 때문에 상황은 반전되었다.
그들은 5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살수팀 이백 명 중 절반 가까이 되는 팀원들을 도륙했다.
서걱!
커억...
그들은 발걸음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했고.
채챙!
크악!
두 합 이상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강했으며.
사, 살려...!
푹! 푹! 푹!
단전, 심장 목을 찔러 확인 사살까지 마칠 정도로 잔혹했다.
챙!
“이런 씨발...!”
여강문은 목덜미를 스치는 살기에 검을 들어 올렸다. 목에서 한 치,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동맥이 잘려나갈 뻔했다는 사실에 식은땀을 흘렸다.
복면을 뒤집어쓴 이들을 이끌고 있는 걸로 보였던 남자였다. 여강문은 이를 갈았다.
“너희 뭐하는 놈들이냐?! 우리가 누군 줄...!”
“황금새 아닌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식의 담담한 어조였다.
“이런 미친놈들이! 그걸 알고도 이런 짓을 커억!”
푹! 푹! 푹! 푹!
‘도, 도대체 언제...’
팔, 다리 복부, 심장, 목.
여강문이 복면남과 칼을 맞대는 사이 황금새의 모든 살수들을 죽이고 돌아온 그들은 그를 난도질했다.
“너희가 먼저 시작한 일이지. 이만 죽어라.”
죽어가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냉혹히 선고했다.
대략 삼십 분 황금새의 살수들의 시체를 처리한 그들, 베렌듀크의 잔당들은 그를 중심으로 한곳에 모였다.
“안전가옥은?”
“...없어졌습니다. 주군도, 유르힘님도 그리고 대장님들도. 이제 부대장님이 우리를 이끄셔야 합니다. 부디 명령을 내리시죠.”
“......돌아오실 곳을 지켜야겠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단 하나 주군이 살아계실 거라고 믿고 돌아올 집을 지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침입자의 목을 물어뜯어야 한다.
하지만 60명 정도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다른 부대장들에게 연락해서 대전으로 모이라고 전달해라.”
각지 이곳을 포함해 다섯 곳으로 나뉜 동료들을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로 치고 올라가 신속하게 침입자들의 우두머리의 목을 딸 것이다.
“안건수를 죽인다.”
잔당들은 그들의 예상을 한참 초월한 함정이 있을 거라는 걸 모른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