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아티팩트
* * *
유천은 인천으로 돌아온 후 기절해 있던 카이안이 깨어났다는 말에 곧바로 놈이 구속되어있는 지하 은신처로 향했다.
끼익...
도망을 방지하기 위한 30cm 강철 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아마 티보치나의 호의가 들어간 거겠지.
그 공간 가운데 놈은 침상에 팔다리가 묶인 채 오른팔에는 마력 융해제가 담긴 주사가 꽂혀있었다.
“꽤 편해 보이네.”
“......”
비아냥이 아니라 실제로 유천은 그렇게 느꼈다. 놈이 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빛 하나 들지 않는 감옥에 결박시켜 놓고 싶었으니까.
“...나를 왜 살려놓은 건가?”
“이게 살려놔도 지랄이네?”
끼이익...
옆의 의자를 가져와 앉은 유천은 놈의 눈을 고요하게 쳐다봤다.
“너 내 밑으로 들어와야겠다.”
물론 노예계약이다. 이놈을 부릴 수 있다면 문제도 많이 생기겠지만, 그 이상의 이점도 많았다.
“...싫다면?”
“그럼 넌 죽는 거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베렌듀크는 사라지는 거야.”
“......”
노예 계약은 자발성이 필요한 이상 놈이 끝까지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천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네놈은 가문보다 프라이드가 중요한가 보지? 웃기지도 않아 그 프라이드가 가문 덕분에 존재하는 것일 텐데 말이야.”
유천의 도발에 카이안의 눈이 흔들린다. 유천은 놈의 소망을 안다. 멸망한 베렌듀크의 재건.
수천 년 이어져 온 가문을 다시 세우는 일을 고작 귀족의 자존심 때문에 포기할 수 있을까? 자신을 살리기 위해 가문의 식솔들이 죄다 죽어나갔을 건데?
‘그럴 수 없겠지.’
라스트 레거시에서도 놈은 오만하고 싸가지가 없지만 적어도 가문 내에서만큼은 뛰어나고 존경받는 가주로 불렸다. 베렌듀크라는 이름에 큰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
“밑으로 들어오라는 건...노예계약을 말하는 거겠지...?”
“어 맞아”
“......그렇게 하겠다면 그대는 뭘 해줄 수 있나?”
‘반쯤 넘어왔나...?’
놈의 고뇌는 생각보다 금방 끝이 났다. 애초에 서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카이안이 자존심을 챙기기에는 짊어진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에.
하지만 완전히 넘어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천은 적당한 당근을 주기로 했다.
“네가 내 아래에서 가문을 재건하는 걸 적당히 도와주지.”
“......”
“네가 어떤 방법으로 재건하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내가 돕는 것보다 낫지는 않을 거 같은데?”
카이안이 다시 베렌듀크를 세우기 위해서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무력이었다.
지금 중앙세계에서 베렌듀크는 과거 그 용사의 상징이 아니라 가장 뜯어먹을 게 많은 이름에 불과했고 카이안은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힘이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천이라는 존재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생각은 차근차근하시고, 일단 물어볼 것들이 좀 있어 너한테.”
“......뭐지?”
유천은 고민하고 있는 카이안의 생각을 말렸다. 어차피 그건 티보치나도 와야 하는 일.
일단은 폴른의 정보로도 알 수 없었던 것들부터 묻기로 하였다.
“아르벨라...그녀의 정체는 뭐냐?”
자신의 본캐라고 거의 확실시 되는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존재하고, 이 시점에서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베렌듀크를 멸문시킨 것인지, 어느 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현재 13 위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쉬울 수는 없지’
그래서 유천은 그녀를 직접 겪은 당사자에게 물었다. 자신보다는 아는 것이 많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첫 물음부터 가슴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군...”
유천이 자신의 가문을 찢어발긴 자에 관한 이야기를 묻자 카이안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아직 육체와 정신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충격적인 과거를 떠올린 듯 보였다.
“하아...어떤 걸 알고 싶나?”
“생각보다 반응이 약하네?”
유천은 당연히 카이안이 버럭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다. 자신에게는 본캐라도 그에게는 가문의 식솔과 가족들을 도륙한 원수가 아닌가?
그에 카이안은 힘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 또한 중앙세계 출신이니까......”
카이안은 중앙세계의 대 가문 출신답게 승자와 패자의 역할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의 질문이 무례할지라도 패자는 답을 해야 했다. 아니면 가혹한 고문이나 죽음을 택하거나.
그리고 카이안은 후자를 택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미 모든 것을 잃은바, 그렇다면 차라리 훗일을 도모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아르벨라는 20살에 갑자기 중앙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적인 아르벨라에 대한 정보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길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녀에 대한 건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괴물이네...”
그 짧은 내용을 들은 유천은 상당히 어이가 없었다.
유천은 눈을 감고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아르벨라는 20살에 전 위원회 제1 기사단장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뛰어난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조직을 장악하고 절대방위선을 수호해왔다.
그러길 몇 년 후 갑자기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베렌듀크의 본가를 습격해 멸문시켰다.
‘미쳤군...’
도저히 그런 말밖에 나오지 않는 행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치밀어 오르는 의문 사항들이 존재했다.
“다른 위원회의 일원들은? 왜 가만히 있었지?”
유천은 같은 위원회에 엮인 그들이 왜 가만히 있었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몇몇 일원들 특히 8석인 마헬 제국과는 제법 친분이 있었을 건데 왜 그들이 돕지 않았던 것일까?
“...부끄럽게도 그때의 나는 어렸다...아직 후계자 수업도 완수하지 못했었던 때였으니...”
“즉, 모른다는 거군?”
“그렇다...”
카이안은 유일하게 남은 핏줄인 자신이 그 원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 치욕스러워했다.
“......허나 과거 유르힘에게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상한 점? 뭔데?”
“그년이...수상할 정도로 우리 가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하더군...”
카이안의 말에 따르면 아르벨라는 기습하기 전 방계를 포섭해 가문의 분위기를 흩트려놓았다.
그리고 여러 사건이 터져 주력 부대가 본가를 떠나있는 동시에 직계들만은 남아있는 그 절묘한 틈을 노려 기습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럼 본가가 망하고 나서는? 베렌듀크가 그 정도로 완전히 망가지기에는 그리 역사가 짧지 않을 건데?”
수천 년을 이어온 대 가문이 저리 쉽게 무너졌다는 게 유천은 상상이 안 갔다.
“말했지 않나... 방계를 끌어들였다고...그년이 방계들에게 포섭할 때 큰 도움을 준 것이 아니다...그저 너희가 직계가 될 수도 있다는 환상. 그걸 머리에 심어줬지...”
본가의 핏줄은 카이안을 제외하고 모조리 사망한 상태. 거기에 카이안은 그때 어렸고 그를 데리고 있던 유르힘은 그를 지키기 위해 숨어버렸다.
그들이 힘을 하나로 모았다면 그때까지는 세력이 부족했던 아르벨라에게 저항할 수 있었지만, 이미 욕망에 집어 삼켜진 방계들은 비어버린 베렌듀크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외부가 아닌 내부로 칼날을 돌려버렸다
그렇게 중앙세계 최대의 가문은 수천 년 역사가 무심하게 내부의 분열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아르벨라는 먹기 좋게 잘게 찢긴 가문을 잔존 세력들을 제거하거나 포섭해 흑경(??)을 위원회 10석에 앉혔다.
“어떤한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일련의 흐름들이 말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유천에게 카이안이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가?”
“이것들이 정말 머리가 좋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말이 안 된다!”
“......”
‘좀 이상하기는 해...’
직계와 방계의 사이가 미묘하다는 건 그렇다 쳐도 본가의 주력부대나 직계의 상황에 관한 정보를 아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분명히 베렌듀크 내부의 가장 기밀로 다루는 정보 중 하나일 것임에도 아르벨라는 마치 그것들을 꿰뚫어 보듯 행동하지 않았나?
“그 악마 같은 년은 분명...!!”
“그만”
‘이쯤에서 진정시켜야겠군...’
지금까지의 침착함은 어디에 버렸는지 유천은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카이안을 말렸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끝도 없이 말할 거 같았기에.
“이봐 난 네 친구가 아니야. 네 하소연이나 들어주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고.”
어차피 이 이상 아르벨라에 대한 건 알 수 없었다. 중앙세계로 넘어가 알아봐야 하는 것들. 유천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입 다물고 너, 이거 말고 내가 거기서 물었던 거 기억하지?”
“......”
“이 나라에서 무슨 짓거리를 해온 건지 말해. 제대로 얘기 안 하면 네 처지가 달라질 거야. 아주 많이.”
“......”
“혹시나 내가 열이 받아 너를 쳐 죽인다거나 하는 걱정이 든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피는 그때 흘린 거로 충분해. 어차피 이미 빌런놈들을 밑에 굴리고 있는데 거기에 한 놈 추가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쓸 만한 전력이면 선인 악인 가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티보치나가 있는 이상 악인이라면 노예로 부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게 안 되면 죽여 버리면 되고 말이다.
“자 이제 선택해 네가 내 밑에서 가문을 세울 기회를 잡을지 아니면 사람 이하 취급을 받다 뒈질지.”
뿌드득...
유천은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카이안을 살기 띤 눈동자로 쳐다봤다. 여기가 암묵적인 분기점이었다.
놈이 이대로 순종하고 모조리 털어놓는다면 유천의 아래로 들어오는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천에 있는 빌런놈들 중 고문 전문가들이 있다고 했지 아마?’
놈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하아...”
고요해진 밀실에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다 카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한국에 왜 정착했는지부터 말하지, 아니 말해 드리겠소...”
‘굴복했나?’
혹시나 죽어도 누구 밑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지랄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놈은 가문을 선택했다. 저 반 존대가 그 증거겠지.
“이 나라에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오...가문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지...정말 우연하게 발견했소...”
‘한국에 그런 게 있었나?’
게임을 하면서도 지구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한국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에 흥미로움을 느꼈다.
“그게 뭔데?”
“그전에 중앙세계와 합류한 차원의 물건 중 일부 특별한 것들은 아티팩트화 되는 것은 아시오?”
“어 알아.”
강렬한 의지나 원한 등이 담긴 물건 중 일부가 마나를 머금고 아티팩트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굉장히 희귀하게 발생하는 일이고, 거의 쓸모가 없는 걸로 아는데?”
“잘 알고 계시는군...맞소. 대부분의 아티팩트들은 별로 쓸데가 없소.”
보통 그런 물건들은 오래된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물은 시간이 흐르면 의념들이 사라져 아티팩트가 되지 못한다.
아주 희박한 가능성으로 아티팩트가 되었다고 해도 내구도가 마나를 견디지 못해 망가져버린다.
“하지만...우연에 우연을 거쳐 간혹 탄생한다고 하오...완벽하게 아티팩트화한 유물이 말이오...”
“설마...”
유천도 안다. 알기만 한다. 완벽한 아티팩트가 존재한다는 걸...
“그런 게 한국에 있다고...?”
그리고 그건 창조주의 산물인 성령수보다 더욱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렇소...말도 안 될 정도로 귀한 물건이지 가문에도 없었던 것이니까 말이오...”
“그래...내가 아는 완전한 아티팩트가 베렌듀크에 있었다면 너희는 멸문하지 않았겠지.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망했으려나?”
1에서 6 사이의 숫자가 적힌 정육면체의 주사위를 굴리면 당연히 그 사이의 숫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일.
하지만 완전한 아티팩트는 거기서 7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할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그냥 존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위원회는 그것을 찾으면 보유한 상대가 누구든, 설령 같은 위원회 소속이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획득해 엄격하게 봉인한다.
그들이 예측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지닌 물건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유천도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어떠한 힘을 지녔는지, 총 몇 개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위원회도 알지 못할 것이다.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발동하는 유물도 존재해, 회수 후 관련자들의 기억을 몽땅 지웠다고 들었으니까.
“무슨 유물인데?”
그런데 카이안이 그런 유물이 이 한반도라는 곳에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당연히 궁금해진 유천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알 것이오. 이 나라에서도 국보로 여겨졌더군. 지금은 다들 살아남기 바빠 반쯤 버려진 거 같아 보였지만 말이오...”
“아니 그래서 뭐냐고?”
계속 뜸을 들이는 모습에 유천이 인상을 쓰자 카이안이 움찔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나라에서 이렇게 부르더군...”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川 ??? 大???)
“팔만대장경이라고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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