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여명(7)
* * *
공터를 벗어난 숲 안쪽 예리한 칼날 음과 강렬한 폭발음이 서로 맞물리고 있었다.
쇄애애액!
콰아앙!
흐릿한 두 개의 잔상이 부딪친 후 사라지고 난 곳에는 베이고 부서진 흔적만이 그곳에 남았다.
눈으로 쉽사리 포착하기 힘든 고속의 전투를 벌이는 둘이었지만 결코 그들은 티보치나가 세운 결계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킬리언은 유천을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유르힘은 주군을 지키기 위해.
콰아앙!
‘돌아가야 한다!’
유르힘은 중력을 거슬러 튀어 오르는 돌무더기와 나무파편 사이로 중앙 공터가 있는 곳으로 눈을 향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파괴의 파동이 자신이 있는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으니까.
저곳이 신경 쓰이나 비실이?
킬리언은 아까부터 싸우는 중간마다 공터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집중을 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거슬렸다.
일단 나부터 쓰러뜨리고 생각해라. 피하느라 급급한 놈이 어딜 감히 내 앞에서 한눈을 파는 거냐?
“하! 그 말은 네년 꼴을 보고 말하거라.”
킬리언의 몸에는 깊지는 않지만, 피가 몽글몽글 새어나오는 실선들이 양팔에 수십 개씩 그어져 있었다.
그녀는 유르힘보다 빠르고 강했다. 하지만 유르힘의 검술과 직감은 그 틈새를 차근차근 베었다.
“결국 목이 잘리는 것은 네년이 될 거다!”
작지만 계속해서 손해를 축적하면 그녀의 목을 유르힘은 결국 잘라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킬리언은 코웃음을 치며 둔기로 유르힘의 팔을 가리켰다.
그말 그대로 돌려주지 네놈의 팔이나 봐라.
“.......”
그 말에 유르힘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인상을 썼다.
‘이런 젠장...’
미세하지만 숨길 수 없는 떨림이 양팔에서 느껴졌다. 유천의 공격을 흘리고, 킬리언의 저 무식한 둔기를 상대하느라 유르힘도 모르는 사이 육체에 피로가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르힘은 얼굴에 드러났던 동요는 지웠지만 초조함에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때 너무 힘을 많이 소모했다...’
뛰어난 마력운용과 포션으로 출혈은 막았지만, 유천의 그 파멸적인 힘을 흘리는 데에 너무 많은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과연 네놈이 나를 죽이는 게 먼저일까? 힘이 빠진 너를 박살내는 게 먼저일까? 응?
지금도 자신보다 부족한 힘과 속도를 저 자는 초절(?)한 검술과 예지에 가까운 직감으로 대응해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뛰어난 기술은 결국 섬세하다는 것. 그리고 섬세한 것은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긋나면 쉽게 고장 난다.
힘이 빠져 아주 잠시라도 균형이 흐트러진다면 킬리언은 그 빈틈을 노려 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자신이 있었다.
“...힘이 빠지기 전에 죽여주마. 짐승 같은 년아...!”
쾅!
유르힘은 이를 갈며 푸른색 검기를 양손에 쥔 브로드 소드의 날에 실은 채를 땅을 박찼다.
뭉개주지! 이 약한 것아!
킬리언 또한 사납게 웃으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유르힘을 향해 달려갔다.
[클라디우스 2식(?) 월영(月?)]
스윽...
킬리언의 전방에서 유르힘의 모습이 좌우로 잔영을 그리며 흔들리더니 가라앉듯 사라졌다.
‘어디...?!’
오싹!
킬리언은 자신의 뒤통수로 향하는 날카롭게 제련된 살기를 느끼고 재빨리 몸을 돌려 둔기를 휘둘렀다.
카가가각!
유르힘의 거칠게 다듬어진 검기의 날이 전기톱처럼 회전하며 킬리언의 둔기와 충돌했다.
회피 위주의 전투를 벌이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질 것이 뻔한데도 덤벼드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
‘검이 하나?!’
킬리언은 자신의 둔기를 막고 있는 것이 왼손에 쥔 검 하나라는 걸 발견했다.
‘지금!’
[클라디우스 2식 연계기 개(?) 이검(二?) 안개 가리기]
좌수 검은 눈을 가리기 위한 함정. 진짜는 우수 검이었다.
유르힘은 눈을 부릅뜨고 왼팔과 상체에 절묘하게 가려진 오른손에 쥔 검을 빛살같이 뻗었다.
‘물러나면 안 된다!’
안구를 향해 다가오는 푸르스름한 칼끝을 향해 킬리언은 오히려 상체를 들이밀었다.
본능, 야생의 괴수로 살아왔던 킬리언의 감각이 그리하라 했다.
촤아악!
“뭣!”
푸른빛의 착탄지점이 어긋나 그녀의 눈이 아닌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갔다. 최대한 압축해 예리하게 다듬은 검기가 원인이었다.
조금만 더 검기의 범위가 넓었다면 안구와 함께 두개골을 베어버렸을 것이었다.
콰앙!
“큭!”
하지만 반성하기에는 늦은 상황. 달라붙은 채 상체가 엉켜버린 상태로 킬리언이 어깨로 그를 들이받았다.
슈욱! 쾅! 쾅! 쾅! 쾅!
부딪친 충격으로 유르힘은 나무와 바위들을 부수며 날아갔다.
“커억!”
킬리언의 어깨가 가슴에 닿기 전 충격을 줄이기 위해 순식간에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채 뒤로 뛰었지만, 가슴뼈는 아릿했으며 내장은 진탕되었다.
“젠장...성급했나...?”
자신의 주군인 카이안을 돕기 위해 킬리언을 최대한 빨리 죽이려고 한 선택이 패착으로 돌아왔다.
둔기를 막아낸 왼팔의 핏줄들은 터져나갔고, 몸은 덜덜 떨려왔다.
최악의 상황.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유르힘의 눈에...
“주, 주군!”
저 멀리 폐허가 되어버린 공터와 유천에게 목이 붙잡힌 카이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
피어오르는 먼지와 뜨거운 수증기가 섞인 황톳빛 안개. 이곳에는 더는 잘 다듬어진 정원도 아름다운 저택도 없었다.
커억!
유천은 카이안의 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쥐고 들어 올렸다.
베렌듀크의 후계자답게 카이안은 강했지만 유천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전투는 용병들을 상대할 때보다 더 쉽게 끝났다. 용병들이 더 강해서가 아니라, 놈들이 카이안을 지키기 위해 한 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흩어진 쓰레기보다 한 데 모인 쓰레기가 더 치우기 쉬운 그저 그런 간단한 이치다. 고작 여섯 번의 칼질로 끝나버렸으니...
‘그 중 두 번을 이놈들이 막았지...’
유천은 자신의 공격에도 박살나지 않고 남아있는 시체 둘을 내려다봤다.
카이안의 뒤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던 놈들이었다.
존재감 없이 마치 인형처럼 카이안의 뒤에 기립해 있던 둘은 입고 있는 품이 큰 코트부터 키와 얼굴까지 완벽히 똑같았다.
그리고 유천은 이 둘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베렌듀크의 호위대...’
베렌듀크의 8검이 가주의 명에 따라 가문을 수호하는 존재다. 허나 호위대는 다르다.
그들은 가주의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 오로지 베렌듀크의 주인과 제1 계승권자를 지키기 위해 연금과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진 생체 인형.
오로지 존재 목적이 수호인 그들은 전력이 아니라고 해도 무려 유천의 공격을 막아냈다.
‘뭐 이런 놈들인 걸 알아서 다짜고짜 공격했던 것도 있지만.’
처음 참격을 날린 것도 이놈들 때문에 카이안이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허나 그럼에도 상상이상의 방어력이었다.
일개 공학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커으윽...이, 이거 놓아라!”
카이안과는 검도 맞대지 않았다. 잘못해서 놈을 죽이면 일이 귀찮아지니 그냥 놈의 황금빛 검기를 얻어맞고 비어있는 왼손으로 목을 잡아 제압한 것이다.
‘내가...! 베렌듀크의 후계자인 이 몸이 이런 취급을...!’
카이안은 굴욕감과 모든 수하를 잃었다는 좌절감에 점철된 표정으로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유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단 네놈에게 물어볼 것이 많아.”
유천은 놈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왜 지구로 온 것인지, 하필 그것도 한국으로.
동시에 이 땅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르벨라와 관련된 이야기도 말이다.
“일단 무릎 아래를 잘라 놓으면 도망갈 수 없겠지.”
“뭐, 뭣?!!”
부자는 망해도 3대가 먹고 산다고 하지만, 이놈은 그냥 부자가 아닌 위원회 10석에 있던 거대 가문의 후계자다.
생각하지도 못한 어떤 기상천외한 수단을 이용해 빠져나갈지 몰라 유천은 양다리부터 잘라내고자 했다.
“좀 아플 거다.”
“아, 안 된다! 이 몸은 베렌듀크의...!!”
“아 시끄럽고 이 악물어.”
유천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아르페로 카이안의 다리를 자르기 위해서 오른손을 들어 올렸지만...놈의 다리를 자르지 못했다.
“주군!”
카이안의 위기를 보고 달려온 유르힘은 유천의 옆구리로 검을 내질렀다.
크윽!
가슴에서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마력회로에서는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유르힘은 어떻게 해서든 눈앞의 괴물에게서 주군을 구해야 했다.
‘먼저 명계로 떠난 선배님들을 뵐 면목이 없다!’
베렌듀크의 마지막 핏줄을 지키기 위해 죽은 선배 기사들의 희생을 이대로 허무하게 만들 수 없었던 유르힘은 혼을 담아 최속 최강의 일격을 감행했다.
[클라디우스 3식(?) 월천아(月??)]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술을 추구하는 클라디우스 검식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파괴력만을 위한 공격이었다.
달과 같은 창백한 빛을 발하는 거대한 검기의 송곳니가 유천의 양 옆구리에 닿았다.
‘이거라면! 아무리 놈이라도...!’
카가가가각...!!!
“이, 이게...”
아무리 유천이 괴물 같은 몸뚱이를 지녔다 해도, 일점에 집중된 파괴력만큼은 검강에 버금가는 기술이니만큼 타격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아...이 새끼 또 기습하네?”
하지만 찢긴 SRB 마테리얼 슈트의 옆구리 부분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심지어 거대한 검기의 충돌로 충격파가 터져나갔음에도 유천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
털썩...
이제 마력도 육체도 정신도 무너져 유르힘은 주저앉았다.
‘어째서...이런 자가...’
유천을 적으로서 겪어본 자들 모두가 저런 생각을 했다.
무엇을 해도 손상되기를 거부하는 절대적인 육체.
거기서 나오는 재앙 같은 힘.
그것들에 스스로 인간이 아닌 버러지가 된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며 절망하다 죽어갔다.
“킬리 왜 이놈이 여기 있는 거야?”
으음...미안하다...방향을 생각하지 않고 놈을 날려버렸군...
아까까지 싸우던 괴물 같은 여인이 왔음에도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그는 일어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주군... 미안합니다 선배님들...’
음...이놈... 망가져 버렸군.
킬리언은 육체도 정신도 망가져 쓰러진 유르힘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상체를 세운 후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가 유천에게 물었다.
“응? 네가 죽일 생각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다만...이제는 관심이 없다.
이미 모든 게 무너진 상대다. 킬리언은 더 이상 싸울 가치도 없어져 버린 유르힘의 처분을 유천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대가 죽이라고 한다면 죽이겠다만...내 생각에는 이놈은 유천 그대에게 도움이 될 법도 하군.
킬리언이 유천에게 떠넘긴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 자가 유천에게 꽤 쓸모 있는 말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야?”
유천 그대는 지구에서 세력을 기를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어차피 지구에서는...아하...”
지구에서는 세력을 기를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중앙세계로 넘어가 명성을 쌓으며 동료나 부하들을 모을 생각이었다.
인천도 그냥 은신처 개념이었지 자신의 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강자들이라면 꽤나 힘이 될 거라 생각한다만... 내 생각이 틀렸는가?
“맞아...아니... 오히려 더 좋은가?”
동료나 부하는 받아들여도 말을 안 들을 수 있지만, 이놈은 다르다. 티보치나에게 시켜서 카이안과 똑같은 노예계약을 맺으면 되니까. 아마 킬리도 그걸 떠올리고 말한 거겠지.
“으음... 바보 같이 생각에 얽매여있었구나...”
‘몸이 너무 좋아져서 그런가...머리를 안 쓰네...’
세력은 중앙세계에서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카이안 빼고 모조리 다 죽이겠다는 생각을 한 자신의 멍청함에 한탄했다.
“그래 킬리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다.”
유천은 일단 카이안을 멀쩡히 살려놓은 상태에서 저 넋이 나가 있는 유르힘까지 노예로 만드는 것으로 계획을 틀었다.
음...그전에...
킬리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천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일단...놈을 살려놔야 얘기가 되지 않겠나?
“응? 앗! 씨발!”
끄르르...륵...
유천의 손에 목이 잡힌 카이안은 눈을 뒤집은 채 거품을 물고 있었다. 시퍼렇게 변한 얼굴을 보니 곧 명계로 떠날 모양새였다.
유르힘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손에 힘을 더한 것을 까먹은 탓에 이렇게 된 것이다.
‘살려야 한다!’
카이안이 죽으면 손해가 막심해진다는 생각에 유천은 재빨리 놈을 내려놓고 뺨과 가슴을 두드렸다.
“야! 야! 숨 쉬어 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