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여명(4)
* * *
‘감회가 새롭네’
유천은 카이안을 올려다봤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외모에 회색머리.
경사진 길의 위에 서서 유천을 내려다보는 저 샛노란 눈동자와 꾹 다문 입술은 귀족의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네놈이 감히 이 몸을 방해한 그 버러지가 맞냐고 물었다.”
‘저 오만한 말투...직접 들으니 더 좆같네.’
유천은 이대로 달려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갈라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물을 것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그 버러지인지 아닌지는 알 바 없고 하나만 물어보자.”
“하! 웃기는 놈이군 감히 베렌듀크의 후계자인 이 몸에게 너 따위가...”
“지랄하네. 아르벨라한테 갈기갈기 찢겨버린 가문 따위의 후손이 무슨 의미가 있나?”
“뭣! 이 하찮은 것이 감히!”
“닥치고 너 음지를 만든 목적이 뭐야?”
티보치나에게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카이안 저 놈이 이 나라에 뿌린 불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첫째 폴른의 설립.
협회를 피해 활동할 수 있는 머리가 되어주었다.
양지에서는 받을 수 없는 온갖 지저분한 의뢰로 놈들의 욕망 실현과 먹고 살 자금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로 인해 폴른은 흩어져 귀찮은 해충에 불과했던 한국의 빌런들의 세력화를 초래한 원흉이 되었다.
그것뿐일까 두 번째로 놈은 음지를 불가침 영역으로 만들기 위해 경악스러운 짓을 저질렀다.
바로 삼대 길드 전대 길드장들을 암살이 그것이다.
여러 이권들이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던 그 사건으로 음지는 더 이상 나라가 손 댈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한국을 사분오열시킬 더러운 진실이 음지의 주머니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에 인천은 암묵적으로 누구도 건들 수 없는 빌런들의 성지가 되어버렸다.
그 후 시간이 지나 마켓과 투기장까지 생겨나면서, 음지는 이제 완전히 한국에 정착된 거대 범죄 카르텔로 완성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조직화된 악(?)은 폭행, 고문, 살인, 강간 등 셀 수 없이 많은 불행을 낳았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하지만 의문인 부분도 있었다.
“어째서 황금새랑 해원에게 음지의 큰 부분을 떼어준 거지?”
놈은 충분히 음지를 자신만의 세력으로 만들 수 있었다. 투기장과 마켓 또한 원래 폴른에 귀속된 일개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그러나 놈은 그 두 개를 툭 떼어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황금새와 해원에게 건네줘 음지에 대한 독점을 스스로 포기했다.
여명이 한국의 삼대 길드가 아니라 유일 최강의 길드가 될 수도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린 모양새였다.
그리고 결과 황금새는 놈의 양지 세력인 여명을 압박하고 있었고 그 사이 해원은 천황국과 암암리에 손을 잡아 세력을 부풀리고 있었다.
놈은 압도적인 세력을 포기하고 길드 간의 절묘한 힘의 균형을 맞춰 그들의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긴 셈이다.
‘놈의 목적은 이익이 아니라 그 의도된 혼돈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석한 결과.
카이안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이것이 놈이 원하는 그림이라는 것이 유천과 이 정보를 공유한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가 네놈한테 무슨 이득이 있냐?”
하지만 그 의도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측근이라고 여겨지는 티보치나조차도 말이다.
한국에 똬리를 튼 채 기반을 마련한 놈이 어째서 그 나라를 흔들려고 한다는 말인가?
“......옆의 배신자년이 많은 것을 말했나 보군...”
유천의 질문에 담긴 내용이 하나같이 자신의 측근들만이 아는 내용이라는 걸 깨달은 카이안은 얼굴을 굳힌 채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있는 티보치나를 찢어죽일 듯 노려봤다.
“쓰레기 같은 것...지 목숨이 아까워 모든 걸 털어놨구나...그래놓고 뭐 항복해라? 하하하!! 이 역겨운 것 같으니라고...”
“카, 카이안님! 부디 제 말을...!”
카이안의 가차 없는 매도에 티보치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려 입을 열려고 하였으나.
“들을 가치도 없다. 그래도 쓸만한 년이라 안주인 역할놀이 하는 것도 별말 없이 받아줬더니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구나. 네년이 이런 걸레 년인 줄 알았더라면 부하들의 욕정받이라도 시킬 것을 쯧...!”
“그, 그런...”
자신의 희생을 짓밟고 무시하는 카이안의 모욕에 티보치나의 안색이 시퍼래졌지만 그는 그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유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땅을 기는 개미새끼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는 법. 너 따위가 이 몸의 대의를 읽을 수 있을 리가...”
“대의 같은 소리하네. 그딴 걸 몰라도 너 같은 놈의 의도는 쉽게 알 수 있어 병신아.”
“뭐라...?”
안 들어도 뻔하다는 듯 유천은 귀를 후볐다.
멸문한 가문의 후계자가 암중에서 힘을 기른다...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할지는 몰라도 최종목표는 너무도 뻔한 스토리였기 때문이다.
유천은 눈꼬리를 사납게 끌어올리며 비웃듯 입을 열었다.
“망해버린 가문을 다시 일으킨다...뭐 그런 시답잖은 짓거리를 하는 거겠지. 이 망령아.”
유천이 보기에 놈은 망령이었다. 아르벨라에 의해 가문이 작살나면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놈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삶을 갈아 넣고 있었다.
“그딴 걸 대의라고 지껄이지 마라 이 쓰레기 새끼야.”
“......네놈은... 그냥 죽이지 않겠다...”
고오오...
유천에게 정곡을 찔린 것인지 카이안의 몸에서는 통제되지 못한 거대한 금색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과연 베렌듀크의 후계자다운 힘이었다. 저 강인한 핏줄은 놈을 자연스럽게 하이랭커 자리로 이끌었을 거다.
‘내가 없었다면 말이야.’
스르릉...
카이안의 분노에 맞춰 스무 명의 랭커급 강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천도 등의 대검을 부드럽게 뽑았다.
‘무릎 아래를 잘라내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겠지.’
“유르힘! 저 놈을 살려서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친히 내 손으로 놈의 목을 자를 것이다!”
자신의 숭고한 대의를 무시한 유천에 분노한 카이안은 살기를 뿌리며 유르힘에게 외쳤다.
“예 주군.”
카이안의 명령에 유르힘은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고용한 용병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로먼 계약대로 네놈의 용병들을 이끌고 저 자를 봉쇄하라.”
“허허...저런 애송이를 상대로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을 시키시는 거요?”
‘아니 왜 나는 어딜 가도 애송이 취급을 당하는 거지?’
유천은 저 로먼이라는 놈이 자신의 뭘 안다고 저리 지껄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돈이면 뭐든 다 하는 것이 너희 마사크레 놈들 아닌가? 그만한 돈을 받았으면닥치고 명령에 따라라.”
그리고 저 유르힘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본래의 신중함에서 나오는 것이었지, 숙적을 마주친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분명 아르페가 듀블랑의 것임을 알 텐데?’
듀블랑의 검을 들고 있는 데도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무언가 어긋남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마사크레라...’
유천은 티보치나의 정보에 없던 로먼과 아홉명의 랭커급 강자들의 정체가 바로 중앙세계의 용병기업 ‘마사크레’ 소속 용병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합당한 돈만 준다면 빌런이라도 고객으로 여기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
하지만 워낙 덩치가 큰 공룡급 기업이기도 하고 위원회가 정한 선은 또 안 넘는지라 빌런 단체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중앙세계에는 5대가 아닌 6대 빌런단체가 있었겠지.’
“끄응...그 말도 맞군...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돈값은 해야겠지요...”
그런 거대기업의 팀장급 인사인 로먼 맥컬린은 한숨을 내쉬고 곰 수인다운 거구를 일으켰다.
“그래 고객님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소? 마사크레는 단골손님에게는 서비스도 제공하오만?”
프로 용병답게 프라이드를 내려놓은 로먼은 유르힘을 향해 누런 이빨을 훤히 보이며 웃었다.
“...방심이나 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제대로 해라.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할 테니.”
“흐음...그렇게 하지. 대신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소?”
“뭐냐?”
“우리가 프로라도 이런 잡일을 맡으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소?”
“뭘 말하고 싶은 거냐?”
“저 여자 둘은 필요 없으면 우리 주시겠소? 자존심 상한 만큼 애들 보너스라도 쥐어줘야지요.”
“......맘대로 해라.”
“오오...! 고귀하신 기사님의 아량에 감사드리오! 흐흐...”
‘천박한 것들...’
유르힘은 긍지도 명예도 없이 욕망과 성욕만 가득한,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챙기려는 용병놈들이 역겨웠다.
‘역시 그냥 내 착각이었던가...?’
유르힘은 자세나 태도에서 강자로서의 면모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유천을 보며 인상을 썼다.
용병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면 그 범위를 벗어나거나 아니면 어떤 대비라도 해야함에도 가만히 있지 않는가?
분명 전투에 익숙치 않은 모습이었다.
‘듀블랑님...이번엔 장난이 지나치셨소...’
유천의 정보 통제에 티보치나로부터 제한적인 정보만을 들은 결과가 낳은 오해였지만, 그로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검을 저따위로 쥐는 놈이 무슨...’
아무리 봐도 하찮은 것에 불과한 놈이 모든 것을 박살내고 노예로 삼았다기보다는 이 모든 것이 그의 과격한 장난질이라는 것이 더 이치에 맞았다.
왜냐하면 평소에도 그 쓰레기는 과격한 장난으로 한 번씩 주군의 진땀을 빼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번은 선을 넘었다.
‘이 되먹지 못한 장난질이 끝나면 주군을 대신하여 직접 찾아가겠소이다.’
유르힘은 마사크레의 용병들이 슬금슬금 유천을 둘러싸는 걸 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이미 먼지로 돌아가 찾을 수도 없지만 말이다.
*
“그래 다 들으셨겠지? 어떤가? 그쪽이 지금 얌전히 무릎을 꿇으면 봐주겠다만? 우리는 프로라 고객님이 죽이라고 했다면 모를까 막으라고 한 이상 자네가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건드릴 생각이 없네.”
로먼은 거대한 전투도끼를 가볍게 휙휙 휘두르며 천천히 다가왔다.
‘하아...스트레스...’
입은 유천을 향하고 있지만, 성욕에 찬 눈깔이 자신의 뒤에 있는 킬리언에게로 향하고 있음에 짜증이 났다.
유천은 고개를 돌려 킬리언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욕정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저 무심한 듯 피곤해 보이는 아름다운 보랏빛 눈이 보였다.
“왜 어딜 가나 ntr충들이 이렇게 많은 걸까?”
응? 무슨 말인가?
“아니야...”
‘왜 나만 짜증나는 거야?’
그녀의 연인 비스무리한 자신만 짜증나는 것에 유천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하아...
유천은 한숨을 쉬고 슬슬 로먼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변을 일정 간격으로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용병들을 가만히 보다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야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너희 왜 그렇게 여유롭냐?”
이해가 안 갔다. 놈들은 분명 자신이 어떤 놈들을 쓰러뜨리고 온 것인지 저들이 말했을 것임이 틀림없음에도 놈들은 느긋했다. 실제로 그 증거가오른손에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도 저 용병놈들의 행동이 느긋해 보이는 이유가 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하! 네놈이 어떤 속임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우리한테 통할 거라 생각하는가?”
“뭔 속임ㅅ”
“강자들에게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유천의 말을 무시하고 로먼은 입을 열었다.
“암살자들에게는 음침함이, 검사들에게는 날카로움이, 레인저들에게서는 썩은 나무냄새가 나지. 허나 네놈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군.”
뚜벅뚜벅...
로먼은 전투도끼를 쥔 채 유천의 앞까지 걸어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간혹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 그런 느낌을 주지만...”
놈은 썩은 고기냄새가 나는 이빨을 보이며 씨익 비웃으며 말했다.
“10살 애새끼도 쥐지 않을 파지법으로 검을 쥐는 병신이 그럴 리가 있는가?! 하하하!!”
로먼의 아가리에서 나는 썩은 내에 유천은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그냥 식칼 잡듯 잡으면 되는 거 아니야...? 잠깐만 그러면 이놈들 설마...’
당연히 잡아본 칼이라고는 식칼밖에 없던 유천은 그제서야 이들이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방심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 했지.”
“그건 또 뭔...”
팍!
유천의 앞까지 왔던 로먼이 재빨리 뒤로 뛰었다.
[그림자 사슬]
그리고 유천의 발 밑 그림자에서 사슬들이 올라와 유천의 팔다리를 묶는다.
[에너지 드레인] [데스 코일] [마훤(??)]
검붉은 기운이 사슬을 타고 올라와 체력을 빼앗고 저주의 균체들이 몸을 뒤덮는다.
[봉박의 술(?)]
그 위로 복잡한 문자가 새겨진 붕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칭칭 감고.
화르륵...
[집화(?火)의 벽]
마지막으로 압축된 고열의 불의 막이 유천의 사방을 봉인했다.
완벽한 봉인. 오로지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에 특화된 주술, 마법, 초능력들이 순식간에 유천을 휘감았다.
"머저리 같은 놈적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경계조차 안 하면 되나?”
용병들은 유천의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안 하고 느긋하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유르힘의 명령을 들은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그에 맞는 세팅이을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였다.
로먼이 무방비하게 다가간 것 또한 스킬들의 발동 순간에 흔들릴 마나의 유동을 가리기 위한 잔재주였을 뿐이다.
“팀장님 과했던 것 같습니다만?”
“으음...”
불의 벽을 세운 부팀장이자 붉은 머리를 한 파이로키네시스 패릭슨이 다가와 한 말에 로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유천을 둘러싼 높은 불의 상자를 쳐다봤다.
그가 생각해도 과잉 전력이었던 것 같지만...
“뭐...근데돈을 받은 만큼은 완벽히 해야 하지 않나?”
“뭐 그건 그렇습니다.”
돈을 받은 만큼은 완벽하게 수행한다. 그것이 그들의 철칙이었기에 이 정도는 해야 얼추 값어치가 맞았다.
“그럼 대장 저 년들은 이제...”
파이로키네시스는 카이안에게 버려져 초췌해진 티보치나와 붉은 막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킬리언을 음흉하게 가리켰다.
“응? 흐흐... 그래 저 붉은 머리년은 데려가라 저 은발은 내 취향이니 내가 먼저다”
“크흐...이래서 제가 팀장님을 좋아...”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너무 방심한 거 같군.”
“뭐...?”
꽈드득!
보이지 않는 불의 벽 안쪽에서 찢고 뜯기는 소리와 함께 유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먼의 눈에서 끈적거리는 음흉함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백전용장의 냉철함이 들어찼다.
“...패릭슨 뒤로 물러난다. 팀 전원에게 경계등급을 최대로 올리겠다고 전해라.”
“네...”
놈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체력은 빼앗기고 산소가 부족한 상태여야 한다. 그럼에도 저토록 평온한 목소리.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 번도 보지 못한 현상이 결코 길조는 아님을, 그때마다 빈 술잔이 생겨났음을 알고 있는 로먼은 재빨리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팀원들 또한 마사크레의 노련한 용병들답게 느슨해져 있던 정신을 당기고 순식간에 최고 경계 수준의 포메이션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앙!!
불의 막이 종잇장 찢기듯 발겨지고 그 안에서 한 인영이 거대한 검을 어깨에 지고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저게 무슨...”
그을림 하나 없는 완전히 멀쩡한 모습에 용병들 모두가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킬리언으로부터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천... 그대가 강하다고 하지만 너무 경계심이 없군. 그런 습관이 나중에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미안...”
하지만 유천도 변명할 사유가 있었다. 어째서 그가 그때 로먼을 죽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겠나? 카이안 빼고는 나머지가 필요 없는데도 말이다.
유천은 멍하니 있는 티보치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티보치나 준비는 끝났냐?”
“아...아직...아...방금 카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부적들을 모두 붙였다고 해요...”
“그래 그럼 이제 작동시켜.”
“네...알겠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그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집중해...’
티보치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집중한 상태로 빠르게 주술을 발동했다.
웅...웅...
[방벽형 간이 주술식 – 파굉(??) 결계]
그때 저택을 포함 한 산 전체에 녋은 반구형의 투명한 막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유천이 티보치나가 앞으로 있을 전투에 쓸모가 없음에도 데려온 이유였다.
요란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전투를 가리기 위한 결계를 설치하는 데에 그녀만큼 도움이 되는 사람이 그의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다.
“헉...헉...완성했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주의해야 할 건?”
꽤나 고위 주문이었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헉헉...거리던 티보치나가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으로 유천을 올려다봤다.
“이 결계는...주인님의 힘을 최대한 넓게 팔방으로 퍼뜨려 중화시켜줄 거예요.”
“......완전히 막는 게 아니라?”
“......이 나라에는 유능제강(????)이라는 말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 뭔 말인지 알겠어.”
한마디로 완전히 막으려다가 결계가 박살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뒤로 가...”
“저...주인님...부디...카이안님을 죽이지 말아주세요...”
“...너도 참 징하다...”
그런 말을 들어놓고도 여전히 그 놈을 생각하는 모습이 악당년이었음에도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해도 제 은인이시니까요...”
“...말했잖아 어차피 살려줄 거라고. 그러니 뒤로 가 있어.”
“네...감사합니다...”
유천은 뒤로 물러나는 티보치나를 본 후 적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단하긴 하네.’
감정적으로 미숙한 모습을 보여줬던 마녀도.
뒷골목 양아치 같던 마사크레의 용병들도.
모든 걸 내려다보는 오만한 카이안도.
그 곁에 있던 신중한 유르힘과 그 수하들도.
그들 모두가 결계가 쳐지는 그 짧은 순간에 냉정한 눈빛으로 완전한 임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 저게 진짜 중앙세계 출신 놈들이지.’
지구에서 아등바등하는 각성자들이나 지구의 만만한 놈들을 상대하느라 긴장이 풀릴 대로 풀린 듀블랑이나 검은선자들과는 다르다.
중앙세계에서 태어나 살고, 치열하게 싸워온 자들은 저렇게 이해 못할 상황이 닥치면 상대가 무엇이든 간에 방심하지 않는 진정한 투사들이다.
이제야 제대로 된 전사들과 싸워보겠군.
유천과 싸운 이후 항상 김빠지는 상대만 만나온 킬리언은 진정한 강자들, 그것도 적으로 나타난 그들과 투쟁을 벌일 생각에 신이 난 듯 사납게 웃었다.
유천, 카이안이라는 자 말고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뭘 그런 걸 물어?”
유천은 빠드득... 목을 푼 후 자신의 키만, 그렇지만 깃털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대검을 들어 놈들을 가리켰다.
“전부 죽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