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여명(2)
* * *
유천이 인상을 쓴 이유는 물론 이지연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날개’의 행정에서 굉장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녀가 없으면 길드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그가 인상을 쓴 이유는 그녀가 아니라...
“흐음... 그 참하고 예쁜 아이도 이제 슬슬 자신을 보듬어줄 남자가 필요할 텐데 말이지......”
저 진지하게 걱정하는 눈빛과는 달리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한 저 빌어먹을 팔푼이 영감탱이와 어딘가에 있는 관측기구에 있는 딸바보 아저씨 때문이었다.
‘젠장 왜 나한테 그러냐고?’
걱정되면 본인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는데 항상 자신에게 연락해서 지연이는 잘 있냐고? 너무 힘들게 하지 말라고 거의 매일 연락하는 저 둘 때문에 유천은 최근 뒷골이 스멀스멀 아파왔다.
“......지금 밖에 있는데 나가서 직접 물어보시죠...”
유천이 서울로 이만성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이지연은 그를 수행한다며 따라왔다.
“어허 그 아이가 힘든 점을 자기 입으로 말하겠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묻는 게 낫지. 안 그런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게는 킬리언이 있습니다...”
이제 라스트 레거시 세상에 익숙해진 유천이 일부일처를 굳이 고집하는 건 아니었다.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세상에서 합의만 된다면 한 명만 바라보든 여럿과 사귀든 무슨 문제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가족 그것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은근슬쩍 그것을 권하는 건 좀 부담스러웠다.
“흐음 그렇게 말하기에는 지연이와 생각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는 걸로 안다만?”
“그건...”
한 달 전 이지연이 깨어난 후 유천은 킬리언에게 했던 변명을 똑같이 했다. 힘 조절이 안 됐다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예전으로 돌아간 듯 딱딱한 표정. 그에 유천과 이도경은 그녀가 다시금 마음을 닫은 것인지, 늦어버린 것인지 탄식했다.
어쩔 수 없이 유천은 양하연 그리고 빌런들만 데리고 인천으로 떠나려는데.
‘저도 갈래요.’
이지연이 따라 나와 그렇게 말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로 말이다.
그에 유천은 굳이 힘들면 억지로 올 필요 없다고 했지만.
‘협회와 선이 있는, 행정 업무 전반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 말에 유천은 그냥 입을 다물고 그녀를 데려왔다. 이도경은 오히려 좋아했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으면 ‘날개’는 지금처럼 한 달 만에 그럴 듯한 조직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조직 관리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유천은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반년은 더 걸렸겠지.
여기까지만 보면 엄청 일 잘하는 사람을 데려 온 거 아닌가? 오히려 좋은 일인데 무슨 불만이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는데...’
업무를 마친 그녀는 유천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이 문제다.
사실상 폴른 자료실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것 말고는 중요한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지연씨...? 여기서 저를 도울 일도 없을 거 같은데...들어가서 쉬시죠?’
유천은 안 그래도 과중한 일을 맡고 있는 그녀가 쉴 수 있을 때 쉬었으면 하는 바람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지만.
‘싫어요.’
‘아...네...’
싫으시단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곧 한 길드의 장이 되실 분이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스케줄을 관리해줄 비서가 필요하다는데...
글쎄... 나중은 모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날부터 이지연은 그냥... 할 일을 끝마치면 일상 같이 유천의 주변에 조용히 있었다.
‘그렇다고 막 가까이 다가오는 건 아니지.’
근데 또 웃긴 건 그녀는 유천의 손이 닿는 범위 내로는 다가오지 않는다는 거다.
유천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그렇다고 눈을 벗어나는 정도의 범위를 벗어나면 또 쫄래쫄래 따라온다. 그 차가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 모습을 요약하자면.
난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아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말아요.
이런 느낌이었다
이 이해 못할 도도함. 완전 고양이 아닌가?
그로 인해 참 여러 가지 스토리가 많이 생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저 영감탱이를 무시하고 이곳을 나가는 것이다.
“다음에 그건 직접 만나서 물어보시고 일단 전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흐음~ 그렇게 넘어가는 건가?”
“아니면 오늘 저랑 찐~하게 대련 한판 하실래요?”
“허허...늙은이가 또 괜한 참견을 했나보군...잘 가시게나...”
더 이상 이지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진심을 깨달은 이만성은 땀을 삐질 흘렸다.
“1주일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난 유천은 뒷문을 통해 비밀리에 설치된 승강기를 타고 협회 근처의 이만성의 개인 명의로 등록된 건물을 통해 빠져나왔다.
“이야기는 모두 끝내셨나요.”
“네...생각보다 훨씬 쉽게 승낙하시더군요.”
그 텅 빈 건물 밖, 흰 와이셔츠에 검은 치마, 검정 스타킹. 거기에 허리까지 오는 밤하늘을 닮은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포니테일까지. 완벽한 오피스 레이디의 모습을 한 이지연이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잘 지내냐라...’
그녀의 모습을 보니 이만성의 말이 떠올랐다. 솔직히 저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 그녀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기 지연씨?”
“네?”
“지연씨는...지금 인천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솔직히 그녀의 업무량은 유천 본인보고 하라고 했다면 자신은 진작에 때려치우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지연의 업무 효율성이 뛰어난 게 아니었다면 24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안하지만 현재의 날개에는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 다행히도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그 부분을 어떻게 잘...
‘나도 참 역겨워졌군...’
순간 이지연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이용해 먹으려는 자신의 모습에 유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좀 더 신경을 써줘야겠어.’
“......혹시 원하시는 게 있으면 제게 말해주세요. 날개에는 지연씨가 없으면 안 되니까 말입니다.”
“......”
“지금 당장 없으시면 생각날 때 말씀해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유천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하는 이지연을 보지 못하고 밖에 세워져 있는 차로 향했다.
"그럼 인천으로 가죠. 가서 재정비를 한 후...내일 여명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런데...여명의 뒤에 있다는 그 카이안이라는 자는 어떻게...”
이지연의 물음에 유천은 그 자, 티보치나에게 들은 본명 ‘카이안 베렌듀크’에 관한 정보를 떠올렸다.
베렌듀크가(家) 과거 초대용사라 불린 마르투가 베렌듀크가 세운 가문이다.
머나먼 과거 세계최강이라고 불린 자의 후손답게 적통 중에 무조건 한 명이상의 하이랭커를 배출한 13위원회 10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가문이었다.
‘베렌듀크가 멸망했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지...’
문제는 그 가문이 멸문한 상태라는 말에 유천은 기절초풍할 뻔했다. 그들은 유천이 라스트 레거시를 플레이할 때 여전히 13위원회의 일각이었으니까.
‘거기에 그들을 멸문시킨 것이 아르벨라라니...’
아르벨라 반 엑시르 현 위원회 제 1 기사단장이자 베렌듀크를 멸문시키고 10석을 차지한 흑경(??)의 주인. 그리고 예전 자신의 본캐...
‘아직도 모르겠군...’
본 스토리를 벗어나도 한참이나 벗어난 생각도 못한 전개에 유천의 머리는 아득해졌었다. 어째서 본캐가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강해지고, 그만한 거대세력을 일궜는지. 정말 그 본인이 맞는지 말이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한다.’
아주 중요하고 일이었지만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위원회 10석의 주인을 쉽게 만날 수 잇겠나?
일단 지금 당장은 저 카이안이라는 놈을 어떻게 할지다. 그리고...
“어떻게라...하나뿐이죠...”
그 방법은 이미 유천의 머리에 정해져있었다.
놈이 한국에서 무슨 짓거리를 해 왔는지 알게 된 유천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시리게 빛났다.
“바짝 엎드리지 않는다면 무릎을 으깨버려야죠.”
티보치나의 살려달라는 조건, 그리고 들어야 할 정보들 때문에 무릎 꿇고 얌전히 노예가 되겠다면 멀쩡히 부릴 것이다.
티보치나가 건넨 정보가 확실하다면 그들은 쓸 만한 전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다면 친히 뭉개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유천은 후자를 바라고 있었다.
*
시퍼런 달빛이 서리는 암울함마저 감도는 방 안. 한 명의 남자는 안주도 없이 독한 술을 들이부으며 그 옆에 기립해 있는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래 티보치나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예......”
“큭큭...그래... 뒈진 줄 알았던 년이 한 달 만에 나타나 뭐라 지껄이던가?”
꿀꺽... 꿀꺽...
여명의 그분, 카이안 베렌듀크는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아공간에 있던 독한 양주를 잔에 따르지도 앉고 병째로 목에 들이 부었다.
‘주군...’
한 달 사이, 과거 베렌듀크의 유일한 후계자다운 지배자의 면모는 어디가고 한껏 흐트러진 모습. 최근 두 번 큰 실패를 겪은 카이안은 냉철한 모습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실패를 겪은 것은 처음이시지...’
가문의 가장 큰 보물 중 하나인 성령수를 잃었다. 숨겨두고 있던 병력들도 대거 잃었다. 거기에 듀블랑까지. 하나 같이 지구에서 충당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거기에 점점 격해지는 황금새와의 대립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파멸적인 실패들.
그로인해 모든 대계가 수십 년은 뒤로 미뤄지게 될 것에 자신의 주군은 점점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년이 뭐라고 했냐고 묻지 않았나?! 유르힘!!”
쨍그랑!
저렇게 가문이 아르벨라에 의해 멸문한 후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격한 흥분을 드러내는 점이나,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부른 적 없는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유르힘은 고개를 숙였다. 지금 말씀드릴 내용을 생각하면 도저히 카이안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보치나가 말한 그대로 들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전부 말해!”
“네...그럼...”
유르힘은 자신과 그녀가 한 대화를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카이안에게 전했다.
“크크큭...그러니까 나보고 새로운 자기 주인님에게 항복하라는 건가?”
정확히는 그렇게 해야 살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분노와 굴욕에 이성을 잃은 카이안에게는 그저 기르던 개가 다른 주인에게 아양을 떨며 자신을 물어뜯는 그런 불쾌한 일에 불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쓰레기 같은 년이!!!”
분을 참지 못해 주변 모든 것들을 때려 부수던 카이안은 씩씩 거리며 충혈된 눈으로 유르힘을 노려봤다.
“후우, 그래서 그 암캐년 주인놈이 언제 온다고?”
“내일 자정까지 찾아올 거랍니다...”
“찾아온다라...그래...노예 계약을 했다고 하더니 아주 모든 걸 바쳤구나. 배신자년...”
까드득...
자신이 현재 어디서 머무는 지까지 전부 불어버렸다는 사실에 그의 몸에서 가다듬지 못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유르힘 너를 중심으로 하이스트(highst) 멤버로 준비해라. 그렇게 대단하시다는데 제대로 맞이해드려야지.”
“...괜찮으시겠습니까...?”
“또 뭐가 말이냐?”
“관문지기들도 그 자의 노예로 자발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분명히...”
“흥! 그래봤자 베렌듀크의 문을 지키던 개새끼들. 그저 목숨이 아까웠겠지!”
카이안은 그들이 더욱 괘씸했다. 관문지기는 가문이 살아있을 때 그 녹을 먹고 살아온 놈들이었으니까.
그런 자들이 티보치나와 함께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그는 이를 갈았다
분노하며 이를 가는 자신의 주군을 보던 유르힘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눈이 마주쳤다가는 가슴속에 치미는 의구심을 걸릴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목숨이 아까워 그들이 노예가 됐다니...그 관문지기들이...?’
지금 한껏 흥분하고 있는 주군의 말과는 달리 베렌듀크의 정문을 지키는 그들은 다른 기사단에 비해 약했을 지라도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자들이었다.
‘거기에 티보치나 또한 이상했다.’
유르힘은 아까전의 통신부적을 통한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한 달이 지나서 한 연락이 그딴 말이라니... 네년 감히... 주군을 배신한 것이냐...?”
“배신...배신이라...아뇨...오히려 다르죠...”
한껏 가라앉아있는 그 목소리는 죄책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체념과 같았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오히려 헌신이죠...”
“제대로 말하라...”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어요...금제가 걸려있으니까요...”
하하...
티보치나는 모든 걸 포기해 오히려 속이 시원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저는 지금도 그분...카이안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에요.”
“......”
“항복하세요. 제 주인님은...괴물...재액(災?)이에요...다가오면 그저...굽히고 지나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미친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당신이라도...그때 그곳에 있었으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유르힘의 경멸과 혐오에 찬 눈빛을 보고도 통신부적 너머의 그녀는 어떠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유천...’
주군에게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던 티보치나, 그리고 그 충성스러운 관문지기들을 굴복시킨 자. 그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유르힘에게 불길하게 다가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