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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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마왕과의 전투 이후 한 달이 지났다. 숨 쉴 틈 없이 바쁜 나날. 이만성과 이도경은 사후 뒤처리에 집은커녕 회의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반 노숙생활을 지내야 했다.
인천 폭파사태 그리고 이제 한반도 최대의 해양호수가 된 호두(虎?)호수 발생 사건까지.
위성지도상으로 물이 들어 찬 곳이 호랑이 머리 같다고 그렇게 이름 지었다는데...어떤 바보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다.
아마 할 일 없는 이 나라 윗대가리 늙은이들이 지들끼리 모여 차나 마시며 지은 것이겠지.
어쨌든 다행히 인천 폭파사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빌런들의 미친 짓인 걸로 추정된다는 식으로 말하면 되니까.
물론 그때 목격한 요원들은 어떻게 할 건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결론은 모른 척이었다. 어차피 저들에게 물증은 없다.
거기에 양하연도 모른다고 부정했으니 협회 또한 ‘우린 모른다.’, ‘빌런들의 소행으로 보인다.’, ‘조사하겠다.’ 이런 식으로 발뺌하면 저들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비록 무능하다는 이미지가 씌워질 수는 있겠지만, 상관없다. 고작 저 문제 하나로 휘청거릴 만큼 협회는 얕은 신뢰를 쌓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저 병신 같은 이름의 호두호수만큼은 도저히 숨길 방법이 없었다. 지도 어플만 켜도 누구나 뻔히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저것은 모른다라는 말로 해결이 안 된다. 무능한 이미지가 아니라 정말 무능한 것이 되어버리니까.
원흉을 파악하고 있지만 언급할 수 없는 이도경과 이만성 그리고 정말 원인을 모르는 협회와 관리기구의 엘리트들이 끙끙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저기...그냥 던전이 폭발한 걸로 하면 안 됩니까...?’
아...
생각보다 간단한 해결책에 그 자리의 모두가 이마를 탁 쳤다.
분명한 거짓말. 그렇다고 그런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미지의 존재가 있다고 말했다가는 한국에는 혼돈이 일어날 것이다.
결국 관측기구와 협회는 공식석상에서 던전 폭발로 인한 현상이라며 결론지었다.
물론 수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언론조작과 어거지로 몰아붙이는 도돌이표에 현재의 여론은 반신반의.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맞겠지. 협회랑 관측기구가 지금까지 잘해오지 않았냐?’와 ‘아니 시발 그래도 이상하잖아?’
이 두 의견의 첨예한 대립이 웹상에 난무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대한민국 국민들이 금방 끓고 금방 식는 걸 생각하면 저 대립 또한 어느새 흐지부지 될 것이다.
분명 나쁜 짓에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였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은 다 이 나라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어디 영화의 악역대사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발생할 사태는 도저히 정부가 대처할 수 없으며, 그 피해는 대부분 국민들이 입게 된다. 이럴 때 바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쓸 상황이겠지.
이만성은 그렇게 지난 한 달간의 시간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맞이하는 신성한 시간에 집중했다.
“후욱...후욱...후욱...”
도복바지만 입은 채 구십 먹은 노인답지 않은 우락부락한 상체를 드러낸 그는 사람만한 원판들을 달고 있는 봉을 어깨에 짊어지고 천천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로군...’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루틴을 끝마치고 바벨 스쿼트의 마지막 세트를 수행하는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근육 한 가닥 한 가닥에 집중을 가했다.
“후우!!”
결국 시간은 흘렀고 세트를 마무리 지은 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봉을 집어 던졌다.
쿵!
협회 지하의 체단장을 울리는 진동. 방호진이 새겨진 고무타일 바닥이 아니었으면 운석 맞은 거 마냥 파였을 것이다.
“...이제 끝나셨습니까...?”
이만성이 이거 한 세트만 마무리하면 된다는 말에 뒤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우...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딱 한 세트만 안 하고 넘어가면 도저히 운동을 한 거 같지 않아서 말이네.”
유천은 그가 집어던진 봉을 바라봤다. 사람 상체만한 100kg 라고 적혀 있는 바벨이 양 옆으로 15개씩 총 30개가 고정되어있었다.
로X 콜먼도 쳐다보지 않을 경악스런 무게를 보며 다시 한 번 이곳이 예전 지구가 아니라는 걸 유천은 새삼 느꼈다.
“3000kg이라 대단하네요...”
“어허!! 삼천이라니! 그 말 취소하시게!”
그 말에 유천은 저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아니...협회장님 바보입니까...? 100kg 삼십 개면 3000이지 그럼...”
“봉 무게! 백오십! 그건 어디 조상님이 들어주시는가?!”
엄격, 근엄, 진지. 이만성의 얼굴에 그 세단어가 적혀있는 것 같았다. 그 신념이 담겨있는 표정에 유천은 ‘이게 그렇게 잘못 된 건가...?’라는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3대 8000을 달성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란 말일세!”
“......”
이만성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던 유천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평상시에는 능글맞으면서도 뻔뻔한 노인네가 이런 이상한 부분에서 철없어 보이는 이런 모습 자체는 싫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 인간성이 있어 보이지 않나?
“그래서 웬일로 자네가 직접 찾아왔는가? 지연이가 오지 않고? 그것도 뒷문으로 말이야”
여기는 협회 건물 지하 3층. 오로지 협회장 전용으로 만들어진 체력 단련실이었다.
이곳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협회장의 동의가 있던가, 아니면 이도경과 같이 극소수의 인원에게 그가 넘긴 카드키를 통해 뒷문으로 들어오는 방법뿐이었다.
유천 또한 그 카드키를 가지고 있었다.
존재 자체가 비밀인 그에게 이만성이 무언가 의논할 것이 있다면 찾아오라고 쥐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유천 또한 이들 못지않게 머리 아픈 일이 많아 지금껏 오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그가 협회장과 직접 의논을 나눌 필요가 있어 직접 온 것이었다.
“일단 어제부로 바퀴벌레들은 전부 정리가 끝났습니다.”
인천의 유일무이한 정보조직 ‘폴른’의 본거지가 박살 난 후, 수많은 빌런, 길드, 기업들이 그 자리를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유천은 인천으로 돌아온 후 한 달간 계약 주재자로 노예 계약을 맺은 폴른의 조직원들과 관문지기들을 부려 그들을 정리하게 했다.
“오호...그렇다면 이제 인천의 정보길드 ‘날개’의 비상이 시작되는 건가?”
인천 음지의 거대한 영역을 차지한 유천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날아오르겠다는 의미로 ‘날개’ 라는 이름의 정보길드을 세웠다.
“네, 뭐, 제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겠지만요.”
“그건 당연하지 그대에 관한 정보는 협회에서도 나와 도경이 밖에 모르니 안심하게.”
“그러셔야죠. 이번에도 장난질 치면 진짜 저랑 대련하시는 겁니다.”
“아, 알겠네...”
날개 길드의 형식적 길드장은 티보치나가 맡기로 했다.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는 유천은 불가. 신상이 알려진 이지연도 불가. 킬리언과 양하연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노예계약을 맺은 이상 그녀가 유천에게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백색마왕이 죽은 이후 뭐 때문인지 고분고분 말을 잘 듣기도 하고 일도 잘하니 그냥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이제 내부 처리는......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걸로 깔끔해지면...이제 외부의 것들도 하나하나 지워나가야겠지요.”
이것이 이만성을 찾아온 유천의 본 목적이었다. 음지의 나머지 거대 세력인 ‘투기장’, 그리고 ‘마켓’을 정리하겠다는 통보와 협조를 위해서 말이다.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 거야 그걸 조용히 무마시켜줄 사람이 필요해.’
한 달간 폴른의 빈자리를 노리는 녀석들을 없애는 것에 유천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노예계약을 맺은 암살자들과 관문지기들에게 맡겼지.
하지만 폴른이 여명을 등에 업었던 것과 같이 나머지 투기장과 마켓의 배후에는 각각 황금새와 해원이 존재한다. 그뿐이랴 서울의 만호그룹과 부산의 동양그룹 또한 신경을 써야한다.
폴른이 갑자기 무너지고 ‘날개’라는 정보 길드가 생긴 것에 긴장한 그들은 분명히 대비를 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유천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인천에 또다시 그라는 재해(災?)가 도래할 것이란 말이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일어날 거대한 소란을 진정시켜줄 인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제격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고 말이다.
“흐음...기껏 조용해지려는데 다시 시끄러워지겠군.”
턱을 쓰다듬는 이만성 또한 유천이 직접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좀 더 조용히는 불가능하겠나...?”
“그 놈들이 백색마왕과 같은 것만 꺼내놓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요.”
“흐음...알겠네. 준비하지 일주일이라고 했나? 남은 하나는 역시...그건가...?”
“네... 여명을 만나봐야겠습니다.”
‘놈으로부터 들어야 할 게 많다.’
폴른이 가지고 있던 정보를 습득하고 티보치나가 말한 그분에 대한 것을 들었을 때 유천은 여명의 그분이라는 녀석과 깊은 얘기를 나눌 필요를 느꼈다.
“거기서는 큰 일이 안 생기겠나?”
“아마...별 문제 없을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티보치나보고 처리하게 하지요.”
“흐음 그럼 그렇게 하시게나.”
“......생각보다 쉽게 허락해주십니다? 삼대길드와 영산그룹의 문제인데 말입니다.”
한국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 인 대구를 지배하는 자들과의 일인데 이만성이 별말을 하지 않은 것에 유천은 의문을 가졌다.
그에 상의 도복을 주워 입던 이만성이 협회장다운 진지한 눈빛으로 유천을 바라봤다.
“나도... 주제라는 걸 안다네.”
“......뭔 말입니까? 그건?”
“그대와 우리는 대등한 관계처럼 보이지만...실제로는 아니지 그대가 그걸 용납해주고 있는 것일 뿐...”
“......”
틀린 말은 아니다. 유천의 힘이라면 지구의 랭커? 각성자? 의미가 없었다. 홀로 전부 찢어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유천은 홀로 모든 걸 부수는 파괴신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인간으로서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어지간하면 세상의 규칙을 따를 생각이었다.
“유천군 자네가 이번 폴른의 처리에 대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안다네. 예를 들면...협회 공작원들을 치료한 방법이나...여명의 비밀 같은 것들 말일세...”
“......”
‘만만치 않은 영감탱이...’
유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최상위 성물인 성령수나, 여명 그리고 영산을 뒤에서 지배하고 있는 ‘그분’이라는 놈에 대한 정보라던가 유천은 그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병의 연륜인 것인지 이만성은 유천이 숨긴 것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성령수 희석액은...그래 그럴 수 있어 그들을 치료할 때 썼으니까.’
그토록 답도 없는 육체적 손실이나 정신적 충격마저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특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유천이 분명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고는 그래...충분히 가능하다.
‘근데 시발 여명은 도대체 어떻게 짐작하고 있는 거야?’
문혜미의 트롤짓을 모르는 유천은 그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그것에 대해 묻지 않을 걸세.”
“...알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알고야 싶지...허나...”
도복의 단추를 모두 채운 그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신뢰를 사고 열심히 자네를 도우면 언젠가 떡고물 하나는 던져주지 않겠나? 허허허!”
“......그걸 입으로 연 시점에서 글러먹었습니다. 영감님.”
“허허... 그런가?”
기막힌 표정을 짓던 유천도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여명...정리 끝내고나서 연락드리죠.”
“그러시게나 아 혹시 하나만 물어도 되겠는가? 별거는 아닐세.”
“......뭡니까?”
‘불길한데...’
유천은 갑자기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이만성을 보고 경계했다.
“지연이는 잘 지내는가?”
“......”
‘내 시발 저럴줄 알았어.’
요즘 매일 같이 일상적으로 들어온 저 질문에 유천은 인상을 팍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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