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그곳에 무언가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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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중 하나인 미국 뉴욕의 맨해튼. 그 각양각색의빌딩 숲 중심에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세계연합 재앙 관리본부.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화이트 드래곤 빌딩.
무려 150층, 너무나 높아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져 있는, 주변을 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하얀 빌딩은 마치 승천하는 용과 같은 정갈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사람들이 고작 외형만 가지고 용이라는 이름을 그 빌딩에 붙인 것이 아니다.
이 빌딩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그것보다 어울리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핏! 핏! 핏!
그 건물의 지하 7층.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연무장에서는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검기의 바람 중심, 한 명의 여인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세상 모든 걸 베어버릴 것 같은 그 칼바람은 그녀의 칼끝에게 만은 순종적이었다.
연무장 밖 외부. 강화된 유리벽 너머로는 양하연이 만났던 DCD 현장요원 제이슨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입국절차를 받지 않고 몰래 들어와 한국협회에서 억류되어 한 달간의 조사를 받은 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부른 DCD의 수장 엘리스 파셀의 부름으로 이곳에 와 있었다.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
사무직이 아닌 이상 볼 일이 없었던 파견요원인 제이슨 화이트 드래곤 빌딩에 올 일이 없었다.
그는 날카로우면서 화려한 검무(??)를 추는 엘리스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풍성한 분홍 머리. 바다를 보는 듯 파란 눈동자. 평균보다는 약간 작은 키.
그러나 탱크탑 위로 삐죽 튀어나온 윗가슴과 래깅스 너머로 보이는 골반 라인은 그에 맞지 않는 폭력적인 몸매를 강조시켰다.
격렬한 움직임에 목덜미를 흐르는 한 줄기의 땀은 내부 구조상 맡아지지 않음에도 수컷을 흥분시키는 여성의 육향(??)이 흘러나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미치겠군...어째서 지금까지 엘리스님의 비서들이 잘려나갔는지 알겠어...’
DCD의 수장 엘리스 파셀을 수행해야 함에도 감히 그녀를 덮치려고 했던 비서들의 수는 무려 6명.
그 중 여자 또한 포함되어있다는 것만 봐도 그녀의 매력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살아서 퇴직금까지 받고 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이거였군.’
본분을 잊고 행동한 그들을 경멸한 제이슨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를 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들은 매일 저 모습을 지켜봤다는 거 아닌가? 아마 행정부서도 그것을 이해해 준 거겠지.
후우...후우...
엘리스는 얇고 첨단이 날카로운 알슈피스(ahlspiess) 형태의 장검을 늘어뜨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커다란 흉부가 들락날락 거리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다가는 자신 또한 어떻게 될 거 같다는 생각에 제이슨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어어기...제이슨 요원님...?”
“예, 옛!”
잠입 요원 특성상 침착이 생명이었지만, 유리벽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상사의 목소리에 제이슨은 자신의 음습한 욕망이 걸린 듯 당황하고 말았다.
“한국에서의 일은......고생 많으셨어요오...”
“아, 아닙니다.”
다행히 걸리지 않은 듯 했다. 저 특유의 나긋하면서도 느린 목소리에는 별 다른 의심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저어어... 땀을 좀... 많이 흘려서...씻고 올 테니... 기다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무장 안에 내장된 샤워실을 향하는 그녀를 보다 제이슨은 주저앉았다.
“후우...힘들군...”
현장 요원이었던 만큼 그는 엘리스 파셀을 볼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직접 본 그녀는 남자를 미치게 하는 그런 것이 존재했다.
단순히 겉이 야하다는 것이 아니다. 땀을 닦아내는 그 무심한 손짓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숨을 내쉴 때의 소리만으로 붉고 보드라운 입술을 상상하게 하는 색기(色?)가 흘러넘친다.
그러면서도 저 눈꼬리가 아래로 깔린 푸른 눈은 초식동물 같은 무해함을 강조하여 이리저리 보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동양에서 부르는 요물(?物)이란 것이 아마 저런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
“긴장해야 돼...”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엘리스 파셀의 저런 남자를 유혹하는 모습은 의도된 것이 아닌 그저 그녀가 가진 태생적인 기질. 그것에 속아 넘어가다가는 용의 이빨에 찢겨져 나갈 것이다.
저런 무방비한 모습들은 영역(??)과 힘을 중요시 여기는 용인족의 특성일 뿐. 즉,그녀에게 자신의 땅에서 약자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다.
뚜벅...뚜벅...
20여분의 시간 후 어느새 다 씻은 엘리스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제이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고서 줘 봐요오......”
“예...? 아! 여기 있습니다.”
늘어지는 목소리로 제이슨에게 보고서를 요구한 그녀는 그걸 받은 후 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아서 한 장한 장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젠장! 알고 있는데도 이러는군!’
품이 큰 원피스임에도 정욕을 품게 만드는 굴곡과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인의 달콤한 장미향이 자신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미친 듯 뛰는 가슴을 제이슨을 식은땀을 흘리면서 눈을 감고 억누르고 있었다.
익숙한 것인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그걸 알고 있을 것임에도 엘리스의 파란 눈은 그저 보고서만 훑을 뿐이었다.
탁!
“흥미로워요오......”
보고서를 전부 읽은 그녀는 탁자에 그걸 던진 후 제이슨에게로 눈을 돌렸다.
“제이슨 현장요원......”
“예...”
제이슨은 심호흡 후 고개를 올려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깊은 바다 같은 눈을 쳐다봤다.
“한마디로 네임드도 그 하얀괴물도 그와 싸우던 무언가도......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했다...... 이거네요오...?”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적어도 한국은, 아니 한국의 랭커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았으니까요오......”
엘리스는 앞의 제이슨을 무시하고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졌다.
‘양하연이 우연히 인천에 있었다고요오...?’
그것도 결계까지 친 상태로? 개소리였다. 명분도 힘도 없었기에 그 자리의 요원들이 아무 말도 못한 것이지. 그녀는 분명 알고 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분명 그 호수와도 관계가 있을 텐데 말이죠오...’
인천에서 일이 생긴 그날 옛 북한 지역에 땅이 사라지고 엄청난 크기의 바다호수가 생겨났다.
그 땅이 소멸한 시간대와 양하연이 다급하게 자리를 뜬 때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마나관측기구 국장 이도경이 사라진 점 등등. 물증만 없을 뿐이지 심증은 너무나 명확했다.
‘네임드 건도 마찬가지고요오...’
몇몇을 제외한 한국의 길드들은 눈치 채지 못 한 듯하지만, DCD의 정보망에 의하면 그 세 명의 랭커들은 몇 시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었다. 그 후에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만성은 각성자들의 소집을 해체시켰다.
분명 이 또한 수상하기 그지없는 움직임. 하지만 이만성 그도 세계연합회의때 직원의 실수로 STM이 순간 오류가 나서 그런 거라며 넘어갔다.
STM이 고장난다? 드라고니아에서 스승과 함께 살아온 엘리스는 안다. 리브레스에서 만든 그 마법과 주술의 합작품이 얼마나 굉장한 물건인지 말이다.
고작 한국의 일개 직원이 잘못 손댔다고 작동이 오류가 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본인이 알 텐데 말이죠오...’
그리고 지구에 현존하는 랭커 중 가장 오랜 시간 중앙세계에서 활동해온 이만성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 반쯤 포기하고 있던 인천에 한국각성자협회의 개입이 증가한 점이나, 그에 따른 한국의 여러 집단들의 움직임 등, 너무도 이상한 움직임들이 많았다.
‘양하연을 직접 만나면 의문이 해소될 수도 있겠죠오...’
“제이슨 요원... 양하연에게 전해주라던 쪽지는 제대로 전달했겠죠오...?”
“네 직접 드렸습니다...헌데 그것이 무엇인지...”
선을 넘어서까지 궁금증을 가진 제이슨의 물음에 엘리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당신이...... 알 필요가 있을까요오......?”
고오오오...
그녀의 몸에서 무형의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피어(fear). 자신보다 격이 낮은 존재를 기세만으로 제압하는 용인족들만의 스킬이 연무장 대기실에 스물스물 서리기 시작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실수했다!’
마치 용의 아가리에 목이 물린 공포감에 제이슨은 부들부들 떨며 용서를 빌었다. 그걸 본 엘리스는 기세를 풀고 바깥으로 손짓했다.
“......제이슨 요원은 이제 돌아가 봐요오......수고하신 게 있으니 이번 일은 넘어가겠어요오...... 아셨나요오......?”
“아! 네!”
“그럼 나가보세요오......”
“네! 그럼!”
후다닥! 승강기를 타고 이곳을 나가는 제이슨을 보고 엘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다시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렸다.
“일단......양하연......그녀를 만나야겠어요오......”
양하연은 절대 자신이 보낸 편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름값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녀가 오래도록 알고 싶은 것. 그것의 실마리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만나서 줄 거는 주고......받을 거는 받으면 되겠죠오......”
그러면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네임드와 그 하얀 괴물 그리고 그와 싸운 존재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반려가 될 만한 사람도...... 찾아봐야 하는데요오......”
자신의 스승 아델리아의 숙제였다.
너무도 뛰어나 화이트 일족 내에서 결혼할 만한 남자를 찾지 못한 엘리스의 존경하는 스승 아델리아.
그녀는 결국 하이랭커 청백(白)의 아델리아라고 불리는 지금에는 일족의 언터처블한 존재가 되어 아예 청혼을 하는 남자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델리아는 자신의 제자인 엘리스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지금이라도 미리 후보라도 찾기를 바랐지만...
‘한심해요오...’
엘리스를 본 대부분의, 아니 거의 모두가 아까 나간 제이슨 요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했다.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침만 꼴딱 삼키며 얼굴을 붉힌 채 눈만 이리저리 돌리는 그런 모습들. 사실 욕정을 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녀도 자신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으니까. 신경을 쓰지 않는 것뿐이지.
진짜 문제는 약한 놈들이 거기에 더 강해질 의지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자신에게 발정한다는 것이었다.
“하아...짜증나네요......어디 제대로 된 남자가 없을까요오......”
아델리아의 말대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남자를 찾고 싶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할 일부터 해야겠죠오......한국에 가봐야 겠어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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