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힘이 마법이다-40화 (40/116)

〈 40화 〉 이지연의 과거(2)

* * *

기절한 티보치나와 울다 잠이 든 이지연을 데리고 숲 안쪽으로 들어왔다. 눕혀 놓기 좋은 평평한 바위와 걸터앉기 좋은 그루터기가 있는 곳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고 나서야 이도경은 입을 열었다.

“중앙세계 중부 대사막 에르칸에는 아곤이라는 왕국이 있습니다. 25년 전 저는 그곳의 대도시 히반에서 용병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뢰 달성률이 높은 젊은 용병으로 나름 이름을 날렸었죠.”

후우­

록타르(loktari) 산 담배. 남부 평원에서 재배하는 독하기로 유명한 궐련을 한 번에 뿌리까지 빨아드린 이도경의 입에서 공장 굴뚝마냥 짙은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밤하늘이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끝없는 별의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이었죠. 얼마나 밝았으면 밤에 불이 들지 않아도 앞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말입니다.”

‘맞아 아름다운 곳이지.’

히반(Hivan) 유천도 알고 있는 유명한 대도시다. 그곳의 하늘은 라스트 레거시의 광고 배경을 차지하고 있기도 할 정도로 말이다.

“저는 그 도시에서 용병 생활을 했습니다. 꽤 잘나갔어요. 금등급 용병이었거든요. 그때 제 나이가 20대중반임을 생각하면 제 또래 놈들 중에 저만큼 하는 녀석들은 드물었습니다.”

용병길드에서 공인하는 금등급 용병은 여러 가지 자격조건이 있어야 했지만 가장 중요한 자격은 홀로 S등급 괴수를 사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구에 그 정도 등급의 괴수를 홀로 처치할 수 있는 자들이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그 나이에 굉장히 뛰어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막 도시였던 만큼 카라반들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도시 내부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과중한 세금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 평민들, 치안력을 위한 군인, 실질적 지배자인 도시 귀족들이다. 그도 아니면 빈민들이거나.

그 외에는 마을을 꾸려 도시에 식료품이나 가죽, 약초 등을 팔며 살아간다. 카라반도 사막의 마을과 같은 개념이었다.

“어느 날 그 카라반을 이끄는 선제(??)들이 돈을 모아 용병길드에 의뢰를 했더군요. 금액이 상당했습니다.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 모은 것처럼 보였어요.”

이도경의 칙칙하게 마른 눈이 태양을 향했다.

“빌런들이 카라반들을 습격해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다... 제발 놈들을 토벌해 달라...뭐...그런 내용의 의뢰였습니다.”

“금액이 상당해서 그 의뢰를 수락했어요. 그러자 거기 있던 선제 중 한명이 허물어지더니 감사하다고 엉엉 울더군요. 지금까지 굉장히 마음고생이 심했겠죠.”

“은등급 이상의 용병들을 제 이름으로 모았어요. 그때까지 제 의뢰 달성률은 100%였거든요. 그래서 금방 스물 정도가 모였습니다.”

‘신뢰받고 있는 사람이었나 보네.’

용병의 99%가 철등급이거나 이름만 새겨진 나무판대기를 들고 다니는 걸 생각하면 철등급보다 두 단계나 높은 은등급 용병 스물을 빠르게 구했다는 건 이도경이 그만한 인망을 지녔던 용병이라는 거겠지.

“조직의 이름은 카놈. 소규모 인신매매 빌런 조직이었습니다. 놈들을 잡는 건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이도경과 용병들이 소규모 카라반을 연기했고 그것에 속은 카놈은 웬 떡이냐 하면서 달려들었고, 전투를 벌였다.

“다른 녀석들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저 그런 송사리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크롬벨이라는 여자가 문제였죠.”

소규모 빌런조직에 안 맞게 그들의 대장인 크롬벨은 랭커에 가까운 무력을 지녔었다. 그 당시에는 랭커가 아니었던 이도경이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하지만 다행히 주변 용병들의 합공으로 기회를 노린 그의 화살은 그녀의 눈에 박혔다.

“하지만 그년은 살아서 도망쳤습니다...저는 그걸 가만 두고 보면 안 됐었습니다.”

온갖 증오에 찬 저주를 내뱉고 도망치는 그년을 추적했어야 했다. 끝까지 따라가서 물어뜯어 버렸어야했다. 그때의 기억에 이도경은 가슴속으로 후회로 가득한 회한을 내뱉었다.

“그때의 저는 생각이...모자랐습니다...카라반을 털어 납치한 놈들이 당연히 누군가에게 그 사람을 팔 거라는 걸 간과해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귀족이나 상류층 인사겠군요...”

불법 노예를 운용할 수 있는 자들은 그만한 배경이 있는 자들뿐이니까.

“네 그렇습니다. 히반의 도시 귀족 중 카놈으로부터 노예를 구매한 놈이 있었습니다. 그 자가 그년에게 제 정보를 넘겨버린 것이었죠.”

하지만 그때의 이도경은 그걸 몰랐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에 한숨을 내쉰 이도경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때의 전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의뢰도 결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못 잊을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주고 싶었거든요.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고요...”

사고를 친 이도경은 아이를 밴 하유민의 배가 불러오기 전에 성대한 결혼식을 치러주고 싶어 그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그 금액이 상당했으니까.

“후우...유천군...복수에 미쳐버린 광기가, 그 악의가 인간에게 어떤 것을 선사해 줄 거 같습니까?”

“......”

이도경의 여상한 말투에서 느껴지는 깊디깊은 증오와 자책에 유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인내(??). 그 광기라는 악마가 그년에게 인내를 주었습니다.”

“그년은 언제나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전이나 결혼 후에도 말이죠.”

이미 이도경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안 크롬벨은 이도경이 혼자 있을 때 습격해 죽일 수 있었고, 아니면 그의 아내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지연이가 태어나고 나서도 말이죠. 그런데 왜 하지 않은 거 같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유천은 이제 그 크롬벨이라는 빌런이 이지연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원흉이라는 걸 충분히 눈치 챘다. 하지만 이상했다.

크롬벨은 언제나 혼자 있는 그를 습격해 죽이거나, 가족을 죽여 절망하고 분노케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손대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인내...”

“네 맞습니다. 그년은 기다린 겁니다. 제가 가장 고통스러워 할 그 순간을 말이죠.”

크롬벨은 지켜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그와 그의 가족을 그러면서 언제 복수를 해야 그가 가장 괴로워할지 말이다.

“10년 전, 그러니까 그 년이 제게 눈을 잃고 15년이 흘렀을 때입니다. 그때의 전 중앙세계의 일을 모두 접고 이제 지구에서 살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두근거렸죠. 이제 기러기 아빠생활을 청산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이도경은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손등의 핏줄이 격렬히 떨려왔다.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며 집 문을 열었을 때 제가 무엇을 본 것 같습니까...?”

“...됐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죠...”

이제는 예상이 가는 이야기를 유천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그 비극의 당사자에게 말이다. 하지만 이도경은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 입을 열었다.

“아내가 하얀색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주택 내부 인테리어도 흰색을 베이스로 했고요.”

“국장님. 이제 됐습니다. 더 이상...”

“시뻘겋게 물들어 있더군요.”

“......”

흰 대리석 바닥을 끈적하게 흐르는 붉은 피. 그의 손에 떨어져 붉게 적셔진 프로미스. 난도질 된 채 쓰러져 있는 익숙한 중년 여인. 그리고...그 앞 의자에 묶인 채 고개 숙여 실성한 듯 흐느끼고 있는 15살 된 자신의 딸 이지연.

낙인으로 지져진 그 기억에 이도경은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비틀어 물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그년의 복수라는 걸요. 그년이 기다린 건 제가 가장 행복할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린 겁니다. 무려 15년을 말이죠.”

“......”

“그년은 지연이를 의자에 묶고 그 앞에서 제 아내를 고문했습니다. 나중에 땅의 기억을 읽은 현장감식관이 말하더군요.저에게 눈을 잃었다고 지연이가 보는 앞에서...제 아내의눈을 뽑았다고 말이죠.”

‘빌어먹을! 더 이상 못 듣겠다!’

“국장님! 이제 그만!”

“계속 들으세요!”

너무도 잔혹한 이야기에 유천은 이도경을 말리려 했지만, 피에 젖은 듯 열안이 된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더욱 잔인한 게 뭔지 압니까?”

끄윽...끄윽... 우는지 웃는지 모를 실성한 목을 긁는 소리가 그의 목을 삐져나왔다,

“침입한 게 아니라 벨을 누르고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흐흐... 제 동료라며 과거에 은혜를 받은 게 있어 그걸 돌려주려고 한다며 말이죠.”

‘젠장...’

유천은 눈을 감았다. 그 장면이 상상이 갔다. 좋은 날 아버지의 동료라고 찾아온 사람. 분명 사람 좋은 얼굴로 왔겠지. 그리고 들어와서...

“그리고 문을 열어준 지연이에게 나중에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너 때문이야.’

‘니 엄마가 저렇게 고통 받는 건 너 때문이란다 그러게 문을 왜 열었니?’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이도경 때문이기도 하지’

‘네 아빠가 내 눈을 이렇게 만들었거든’

‘참 책임감 없어.’

‘그렇지 않니?’

“그리고...그 이후로 지연이는 꽁꽁 숨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 인형이 되어버렸죠.”

“저는 복수를 하러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지연이가 있었으니까요. 그년이 협박을 하고 갔더라고요...”

­또 찾아올게

묶여 있는 이지연이 보이는 정면 흰 벽면에 아내의 피로 새긴 그 말이 이도경을 묶어 놨다.

“...그게 그년의 마지막 복수였겠죠...”

이도경은 크롬벨의 사지를 찢으러 떠날 수 없었다. 자신이 없는 틈을 타 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었으니. 그렇게 그는 10년간 살의를 억누른 채 딸의 보호에 집착했다.

그 집착을 최근에 와서야 이만성의 말에 내려놓고 이지연을 눈앞의 청년과 함께 인천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일이었던 거 같다. 얼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무슨 눈이...’

무거웠다. 눈빛에 질량이 있지 않을 텐데. 어지간한 질량으로는 느낌도 오지 않을 몸인데도 무거웠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 그리고 그것을 묶고 있는 책임감의 무게였다. 그에 유천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래서 유천군 부탁드립니다.”

“무엇을...”

“제 딸을...지켜주십시오.”

“의미를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단 말인가? 유천은 이 흐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하...

이도경은 웃었다. 모든 게 타고 남은 재처럼.

“마법과 빌런에 대한 증오만으로 살아가는 아이였습니다. 그나마도...빌런 토벌과 관련되 일은 위험하다고 제가 막았죠.”

“......”

“인천에서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봤습니다. 지연이가 그렇게 웃는 걸요... 그리고...그렇게 괴로워하는 것도요...”

잠든 이지연을 봤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끙끙 앓는 모습. 의젓한 모습은 어디가고 나약해진 모습.

하지만 이도경은 그조차 반가웠다. 너덜너덜해진 채 세상에서 숨은 아이가 옷장 밖을 나왔다는 거니까.

‘더 이상은 내 역할이 아니었다는 거군...’

씁쓸히 웃었다. 멈춰있던 이지연의 시간을 흐르게 할 수 있는 역할은 자신에게 없다는 걸 알았기에.

앞을 쳐다봤다. 누가 봐도 한 번쯤은 뒤돌아볼 잘생긴 청년. 파천(??)의 힘을 지녔으면서도 항상 예의발랐던 무언가 비밀이 있는 남자 고유천.

“그리고 그건 유천군 당신과 관련되어있겠죠...”

“저는 뭔가를 한 적이 없습니다만...”

실제로도 그랬다. 유천이 이지연과 관련하여 무언가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경중은 관계없습니다. 당신에게 의미 없는 행동에도 누군가는 거기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

고작 그 자신의 무례한 대련이 그렇게 큰 의미를 지녔단 말인가? 머리가 어질했다.

“거기에...당신은 강하시죠. 저 따위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크롬벨이 무슨 짓을 해도 유천군 당신 옆에 있는 제 딸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도경이 무임승차할 생각은 아니었다.

“제 딸이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지연이는 다방면으로 유능합니다. 인천에 자리를 잡으실 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유천군 부디 제 딸을.”

“그, 그러지 마시죠.”

부스럭 잎을 밟고 일어나서 고개 숙이는 이도경의 모습에 당황한 유천은 그를 말렸다.

‘아니 근데 그렇게 아끼는 딸을 뭔지 모를 남정네한테 맡겨도 되는 거야?’

이도경이 공적인 의미의 파견 개념으로 이지연을 보내는 거였으면 크게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좋았겠지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이도경의 말을 조금만 돌려서 들어보면 사위에게 딸을 맡기는 장인 같이 들리지 않은가?

도저히 이해 안 가는 말에 유천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런데 국장님”

“네?”

“저의 뭘 믿고 지연씨를 맡기시려는 겁니까? 그리고 저와 킬리언의 관계...아시지 않습니까...?”

유천의 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하던 이도경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만...그런 사이가 되어도...네...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네...?”

“아버지로서 속은 쓰리지만...제 딸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저는...지연이가 유천군 당신의...두 번째가 된다고 해도...네...저는 말리지 않을 겁니다...”

“......뭔...”

‘이 양반이 갑자기 뭘 잘못 드셨나...’

딸의 세컨드를 인정하는 이도경의 저 말도 안 되는 발언에 유천의 표정은 아연해졌다.

‘생각해보니 여기 라스트 레거시 세계관이었지...’

그때 깨달았다. 라스트 레거시 세계관에서는 일부다처, 일처다부를 허용한다는 걸. 그리고 지구에서도 암묵적으로 그걸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말이다.

눈을 감고 있는 이지연을 봤다. 끙끙거리며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조차 가히 요정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청순해 보였다. 분명 전생에서 매체를 통해서 본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아름다운 외모. 하지만...

‘아니...시발...하...그래도 이게 맞나...?’

일부일처가 당연한 세계에서 살다 온 유천은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지연이의 행복. 저는 그걸 위해서라면 제 영혼도 건넬 수 있습니다. 하지만...저는 불가능하지요...”

하하...

재가 되어버린 회색빛 웃음이었다. 남은 단 하나의 불씨만을 위한 그런 웃음.

“그러니 부디...부탁드리겠습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유천은 그저 끄덕였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일단 네...알겠습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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