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이지연의 과거
* * *
옛 군사분계선.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음산한 곳과 마기로 범벅이 된 숲을 넘어 이지연은 이도경과 함께 유천을 찾으러 왔다.
그녀는 10년 만에 이도경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낯부끄러운 말을 내뱉고, 킬리언의 의심에 찬 눈을 외면하면서까지 합리를 가장한 억지를 부렸다.
불안했고 걱정스런 마음이 든 까닭이다.
북쪽에서 이변이 생겼고 그것이 유천과 관련되어있다는 이도경의 말에 이지연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잘못 되었으면 어쩌나 안 좋은 상상을 하게 되었다. 손바닥에서 다한증에 걸린 듯 땀이 나왔다.
좋아한다고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이유 모를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위험에 쳐했을 수도 있다는 말에 그저 가슴이 말하는 대로 따라 나선 것이다.
“유천씨!”
그래서 한 번도 온 적이 없던, 이 위험한 땅을 헤집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성천이라는 먼 곳까지 기어코 와서 멀쩡해 보이는 그를 발견했을 때 안도했다.
옆에서 아버지인 이도경이 그 모습에 당황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유천씨...? 정말 괜찮은 맞아요? 파, 팔은 또 왜?!”
괜찮다는 유천의 말에 멀쩡한 줄 알았던 그의 팔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검게 쩍쩍 갈라져 있는,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
놀란 이지연이 손을 뻗어 전공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마법을 구현하려고 할 때.
“안 됩니다! 지연씨!”
유천은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손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쳐냈다.
“......유천씨...?”
지잉...하고 울리는 팔. 그녀의 팔목이 붉게 물들 정도로 강하게 쳐낸 유천의 반응에 이지연의 청록색 눈이 파르르 떨렸다.
걱정되어서 여기까지 왔는데...굳이...이렇게까지 거세게 거부할 필요가 있나요?
제가 싫으신가요?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아...혹시...그때 제가 주제도 모르고 당신을 의심해서 그런가요...?
그녀의 나약한 감정선이 흔들린 결과 온갖 부정적인 상념들이 그녀의 머리에서 꼬리물기식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자신이 그때 유천의 힘을 의심한 것이 잘못이라는 헛된 망상으로 결론지었다.
엘리트 각성자로 성장한 그녀 또한 주변의 영향을 받아 중앙세계의 강자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무력은 오만함을 주장할 자격이 되고, 유천의 하늘조차 부술 힘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그것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을 감히 랭커도 못 되는 자신이 의문을 가졌다는 것이다. 거기에 자존심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그를 타박하기까지 해버렸다. 그러니그가 사과했지만 실제론 불쾌했을 것이 중앙세계의 상식으로는 당연한 이야기.
그러나 세상을 오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일개 여인에게조차 겸손하고 예의바른, 그러면서도 한 번씩 보여주는 인간적인 어리숙함에 호감을 느꼈었다.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느꼈었다.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됐다. 지금껏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꽁꽁 숨겨둔 것을 꺼내면 안 됐다. 봐라 그의 예의를 다정함으로 오해해 이렇게 상처를 받았지 않은가?
“혹시...제가...실수...한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그 사정이...”
거짓말... 그렇게 단호하게 쳐 냈으면서...
붉게 물든 제 팔을 보세요.
이래 놓고도 아니라고요?
다정함은 그저 제 착각이었나요...?
저 당황한 말투 또한 자신에 대한 혐오와 같잖음이 들통나버려서 그런 것 일거라고 멋대로 폭주한 사고에 이지연의 눈이 거세게 요동쳤다.
‘역시 나는 안 돼...또 속았...’
아...
속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10년 전 어느 날의 악몽이 떠오른다.
‘난... 또 속았어...’
이제는 괜찮다고 이미 낡은 기억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핏빛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또...또야...그때...문을 열었으면 안 됐어...”
이지연의 눈에 10년 전 안대를 쓴 다정함을 가장한 여자와 눈앞의 유천이 겹쳐져 보였다.
“...지연씨...?”
갑자기 이해 못 할 말을 하며 간질이 난 듯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한 이지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지연씨!”
‘도대체 뭐가 또 잘못 된 거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갑자기 이 뭔지 모를 심각한 일이 발생할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킬리언 또한 그의 다급한 해명으로 금방 오해를 풀지 않았던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 유천은 이것이 마치 트라우마가 터진...
‘트라우마?’
“엄마...미안해...나 또...그때처럼 속아서...흑...바보 같이...미안해...”
‘트라우마구나...’
유천 또한 고아원에서 많이 본 상황이었다. 평상시에는 멀쩡하다가 무언가 트리거가 터지면 다른 인격이 들어온 듯 망가지는 저 모습은 분명 과거의 깊은 쇄기가 박힌 자들의 그것이었다.
‘젠장... 그걸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아직 공허의 침식이 가라앉지 않은 유천이 어떻게 쓰다듬어 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이도경이 걸어오고 있었다.
*
유천에게 기쁜 얼굴로 달려간 자신의 딸을 보고 놀랐던 이도경은 그녀가 갑자기 몸을 떨다 우는 모습을 보고 안색을 굳힌 채 빠르게 유천에게로 다가갔다.
괴로워하는 이지연의 모습. 어딘가 익숙한그것을 본 이도경은 자연스럽게 과거를 회상했다.
10년 전. 그 날은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것도 화이트 크리스마스. 동시에 이도경의 가족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도경은 많아봐야 1년에 대여섯 번, 다른 국가도 아닌 다른 차원에서 일을 했던 그였기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이제는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늘은 중앙세계의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지구에 정착하기로 한 날.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이제 그의 아내 하유민 혼자 외로이 딸을 보살필 필요가 없었다. 새로 신설되는 마나관리기구 국장의 자리 또한 바쁠 테지만 이제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이도경은 오른손에 쥔 꽃을 쳐다봤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순수함을 담고 있는 이 하얀 꽃의 이름은 ‘프로미스’ 중앙세계 북부 깊은 설산에서만 피기에 꽤나 구하기 힘들었다.
꽃말은 ‘고결한 맹약’ 그곳의 귀족들은 청혼을 하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때 상대방에게 이 꽃을 바치는 관습이 있다.
그는 상상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부인과 어린 딸에게 양손으로 이 프로미스를 조심히 들어 올려 이제 죽을 때까지 영원히 함께하겠노라고 맹세하는 것을.
“으음...부끄럽긴 해...”
무뚝뚝한 이도경은 그것을 상상하면 낯이 뜨거워지고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지금껏 홀로 고생한 아내와 외로웠을 딸을 떠올리며 진정시켰다.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고급단독주택. 랭커인 만큼 이 정도의 집 정도는 구하는 건 그에게 가뿐한 일이었다. 이제 이 문 뒤에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 아내는 김치찜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요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도경과 지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인 만큼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닌 같이 보내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니까.
이제 중학교 2학년에 오른 딸 이지연은 볼을 불린 채 부루퉁하게 투덜대고 있을 것이다.
이도경 하유민 부부가 딸을 깜짝 놀래주기 위해 오늘 그가 온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사춘기가 온 탓에 자신을 놀렸다고 성질을 좀 부리겠지만 속으로는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그의 표정은 내리는 함박눈 같이 포근해졌다.
두근...두근...
“후우...들어가자...”
강력한 괴수를 상대할 때보다 강렬히 그리고 깊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현관문을 달칵 여는 장면.
그곳에서 이도경은 회상을 억지로 멈췄다. 더 이상 깊게 들어갔다가는 이성을 잃고 눈앞의 유천에게 덤벼들었을 것 같기에.
‘침착하자...이 자는 적이 아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그 짧은 사이에 유천이 자신의 딸에게 무슨 아픔을 줬겠나? 그렇기에 일단 눈앞의 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이게...무슨 일입니까? 유천군...?”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진정시키지 못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히끅! 엄마...미안해...내가...잘못했어...아빠...흐으...왜 이제야 온 거야...흐윽...”
그날 어느 때보다 행복해야 할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상복을 입어야 했던 자신의 딸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이도경은 어느새 무릎을 모은 채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자신의 딸을 떨리는 눈으로 내려 보다 유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유천 자신도 도저히 현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그게...하아...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일단 백색마왕 얘기부터 해 주십시오. 지연이 얘기는...그다음에 듣겠습니다.”
지금 딸의 심각한 모습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당장의 생존 문제가 더욱 중요했다.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감에도 일의 경중을 냉정히 파악한 이도경은 자신의 딸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었지만 그보다 다급한 물음을 유천에게 먼저 던졌다.
“...네 그럼 시작은 폴른의 본거지에 킬리언과 들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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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고생하셨습니다...그리고 죄송합니다...”
유천이 중요한 이야기만을 빠르게 끝내고 방금 이지연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전부 말하고 나서도 이도경은 한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덜덜 떨고 있는 이지연을 묵묵히 토닥이다 사죄의 말을 읊었다.
“아닙니다...일단 제가 잘못...”
“아니요. 유천군이 잘못한 건 없습니다. 이건...제 잘못입니다...”
이도경은 유천의 말을 막고 씁쓸하게 웃었다.
온몸으로 울음을 토하다 기절한 듯 잠이 든 이지연을 가만히 토닥이던, 그는 유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천군”
“네?”
“만성 형님께는 방금 백색마왕이 해결이 되었다 연락을 드렸습니다...그러니 하연양이 오기 전까지...저랑 얘기 좀 나누시겠습니까?”
“어떤 얘기를...?”
“...지연이와 저의 과거...그러니까 이 아이가 이렇게 된 그날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걸...제게 들려주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분명 이지연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니 만큼 심각한 내용일 것이다. 유천은 그걸 자신에게 들려주겠다는 그의 말이 잘 이해가 안 갔다.
유천을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이 중후한 중년인을 가만히 쳐다봤다.
툭...툭... 손으로 이지연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며 가만히 고민하던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냥...왠지...유천군은 알아도 될 거라 아니, 아셔야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무슨 말...”
“그래서 들어보시겠습니까?”
어떤 단호한 의지가 깃든 이도경의 표정. 그것을 본 유천은 깍지를 꼈다.
‘...이들은 그리 짧게 볼 사람들이 아니다...’
한국에서 활동할 계획인 유천에게는 이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으며, 협력자들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후, 손을 움켜쥐었다.
“...네 그럼...국장님이 괜찮으시다면...”
“...감사합니다. 그럼 우선...”
그렇게 풀벌레 하나 울지 않는 적막한 숲에서는 화창한 하늘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가족의 비극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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