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그곳에 무언가 있다
* * *
양하연은 유천이 날아간 궤적을 멍하니 쳐다봤다.
“내가 미쳤지...”
양하연 또한 오랜 시간 중앙세계에서 활동한 만큼 그곳의 정신이 배여 있었다. 강자존(者?).
강자가 무거운 의무를 지니는 만큼 그들이 경외 받고 존경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천은 지금까지 양하연이 보아온 강자 중에서도 정점이었다. 거기에 그와 걸맞지 않는 배려심까지. 그 상반됨에 가슴이 주체하지 못하고 뛰었다.
“이 나이에 늦바람이 들었나...”
높은 경지와 하프 엘프라는 특성으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지만 그녀의 나이는 서른다섯.
남들이 아줌마라고 부를 나이가 되어서 마음에 춘풍이 불어오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아까부터 알짱거리기만 하던 놈들이 왜 이곳으로 오고 난리인지...”
양하연이 폐교 주위를 통제하고 있을 때부터 느낀 불역한 세 개의 인기척이 모든 일이 다 끝나서야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음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주변 환경과 동화된, 존재감을 인위적으로 낮춘 자연스러움, 그리고 기분 나쁜 집요함이 느껴지는 마력...’
파박!
애매하게 양하연의 감지 범위를 들락날락 거린 이들이 이제는 발을 박차는 소리도 숨기지도 않고 다가왔다.
벽을 타고 올라 자신의 등 뒤에서 멈춘 기척을 느끼고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두 명의 동양인과 한 명의 서양인.
겉모습은 평범한 샐러리맨에 불과해 보였다. 그렇기에 첩자질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게 했던 분들이군요. 어디서 오신 분들이죠?”
양하연은 국가 정보단체나 도적길드. 그들과 유사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을 보며 날카롭게 묻자 그녀 기준 왼쪽에 있는 자부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천황국 외무부 소속 5급 공무원 시리타 류노스케라고 합니다. 위명이 자자한 양하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중화연맹 비서실 소속 차오 웡이오.”
“세계 연합 DCD(재앙 관리부) 소속 2급 요원 제이슨입니다.”
실제로는 어디 정보부 소속이겠지만 표면의 명함 또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부서들. 쉬이 볼 수 없는 자들이었다.
“안녕할 만한 자리도 아니고, 제가 반갑게 인사할 분들도 아니군요.”
하지만 랭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저들은 결계에서 느껴지는정령 특유의 자연력, 거기에 담긴 힘의 크기를 알았을 것이다.
그럼 당연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또한 알 수 있음에도 저렇게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땅히 불쾌할 만한 상황.
“음 일단 저희가 양하연님을 불쾌하게 해 드린 것에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용건만 말하세요. 더 이상 제 심기를 거스르지 마시고요.”
진심이라고는 한치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를 무시하고 양하연은 남은 결계의 힘으로 옥상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감정에 동조한 정령들이 발산한 힘에 공기가 떨려왔다.
“제게 그렇게 건방을 떨고도 살아남고 싶다면 그 입에서 제가 납득할 만한 말들이 튀어나와야 할 거예요.”
최근 그녀 기준으로 괜찮은 사람들과 함께 해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데인 것이 많았던 양하연은 타인에게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결계를 이리저리 돌며 걸리지 않는 선에서 찌르며 예민한 그녀의 신경을 건드려 놓고도 자신의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이보시오! 양하연양! 우리는 각 집단을 대표하여...!!”
“상관없어요. 당신들 정식절차를 밟고 이 나라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양하연은 차오 웡의 항변을 묵살했다.
만약 정상적으로 입국을 한 자들이었으면 서울에서 대접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유가 있어 인천에 있던 거라도 그랬으면 협회장이 언급해주었을 것인데, 양하연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당신들이 이 자리에서 죽어도 누구도 외교문서를 통해 항의할 수 없는 거 내가 모를 거 같아요?”
지구에서 얌전한 모습을 해서 그녀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그녀는 용병출신 랭커다.그 말인 즉,양하연은 죽여야 한다고 판단하면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 일류 전쟁꾼이다.
“...대신 청와대 직통으로 전화는 갈 수 있을 겁니다.”
DCD소속 제이슨의 말에 양하연은 코웃음 쳤다.
“날 병신으로 보시네. 청와대가 토핑 빠진 피자 쪼가리가 된 걸 모르는 자들이 있을까.”
한국의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상실하고, 정치세력들 또한 기업과 길드의 하수인이 된 지 오래다.
거기에 각성자에 대한 통제권도 이만성이 손에 쥐고 있는 상황. 그들은 그저 얼굴 마담에 불과했다.
요원들은 괴수와 빌런들을 잡는 것을 빼고는 외부생활을 하지 않는 그녀를 만만하게 봤지만, 양하연은 중앙세계에서 구르고 굴렀던 베테랑. 최소한의 정치적 감이 없었으면 진작에 어디서 나가 죽었을 것이다.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 자신들의 조직에서 만든 양하연의 예상 데이터와 큰 차이가 보이는 모습에 그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보니까 당신이 제일 끗발이 딸려서 대표로 나선 거 같은데 말해 봐요. 내가 당신들을 살려줄 이유가 있는지.”
‘뭐 대강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간다마는.’
지목당한 류노스케는 이 중에 가장 힘이 딸리는 조국을 속으로 씹고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하하...네...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야기는 오 분정도가 걸렸다. 본론은 간단히 얘기하면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네임드. 이만성이 세계연합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네임드가 있었는데, 왜 사라졌는가? 한국에서 죽였는가? 죽였다면 어떻게? 그게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던 건가?
두 번째는 지금 인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방금 본 백색 괴물은 무엇이고, 그와 싸우는 자는 누군가? 이 자리에 있던 당신은 전말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 알려 달라.
류노스케는 이걸 좀 공손히 돌려 말한 것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것은 세계연합과 중화연맹 그리고 천황국의 공통된 의사입니다.”
“......”
양하연은 손땀을 닦고 있는 류노스케를 지그시 쳐다봤다.
‘건방지기 짝이 없네요.’
류노스케가 굳이 세계연합을 가장 앞세워 말한 이유는 살기 위한 치장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양하연이 열 받은 건 뻔뻔하게 국가 기밀급 정보를 요구하는 저들의 태도였다. 그것도 어떠한 절차도 밟지 않고 말이다.
‘아직도 40년 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중앙세계와 연결되기 전에 이 나라 저 나라에 치이고 살던 한국이었다면, 그럴 수 있다. 약하니까. 약육강식의 이치를 중앙세계에서 배운 그녀도 납득했을 이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법적 요소가 없는 병기들의 가치가 쓰레기가 된 시점에 각성자들은 국력을 좌우하는 요소다.
세 명의 랭커 거기에 준수한 수준의 각성자들까지 존재하는 한국은 더 이상 그때와 다르다.
류청이나 그 사냥개인 레이 둘 중 하나만 없으면 47개로 다시 쪼개져 춘추전국을 열 중화연맹.
혼슈 그것도 오사카 아래로는 수복도 하지 못한 땅에서 야마토 한 명만 믿고 아등바등 버티며 살아가는 천황국.
토대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유사 국가 따위들이 40년 전을 못 잊고 이래라 저래라 설치는 꼴이 볼썽사나웠다.
‘저 놈들은 무시하면 되는데... 저 자는 좀 곤란해.’
하지만 세계연합의 DCD에서 왔다는 저 흑발 안경을 쓴 저 서양인도 같이 협박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곤란했다.
현대 병기가 잃고도 미국이 세계의 종주국이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미국을세계 연합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만든 여자.
엘리스 파셀. 미국의 4대 랭커이자 DCD의 수장인 그 여자 때문이다.
미국의 4대 랭커. 대단하지만 특별하지는 않다.
그녀의 특별함은 화이트 일족의 장로 아델리아의 직계제자라는 배경에 있었다.
13위원회 5석 드라고니아. 그곳을 지배하는 다섯 일족 중 하나인 화이트. 그들의 장로가 일족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지.
드라고니아의 용인족에게 직계제자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 양하연은 기세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는 저 제이슨이라는 자 만큼은 자신의 선에서 죽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저도 모르는 일이네요. 그 두 가지 사항은.”
그리고 저 자를 제거하지 못하는 이상 나머지 둘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상황. 양하연은 이 상황을 모르쇠 넘기기로 했다.
“...네임드 토벌 작전에 양하연님이 직접 참전하신 걸로 압니다만...”
“네 그런데 가니까 없더라고요. 어디 다른 곳으로 갔나보지요.”
“그럼 지금 인천에서 일어난 일은...?”
“저도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협회장님의 부탁으로 파견 나온 것 뿐.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
류노스케는 그녀의 모르쇠를 따지고 들자면 수십 가지의 이유로 트집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황상 확실한 증거도 없고, 대답을 한 것만으로 양하연이 한 발 양보한 상황.
목도한 그녀의 성격상 여기서 몰아붙이면 자신들의 목을 자를 것이다.
‘젠장...분석실 놈들 모조리 갈아엎으라고 해야겠어. 누가 저 여자 보고 유약하다고 한 거야?!’
류노스케는 예상치 못한 목숨이 간당한 상황에 이를 갈고 양하연에 대한 정보를 작성한 분석관을 조지겠다고 마음먹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정식채널로 협회와 접촉해서 알아보세요. 저는 아는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죠?”
고작 그것만 물어보는 것이었으면 차라리 이만성을 압박해서 정보를 얻는 것이 더 쉽고 빠르고 정확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타국까지 들어와 잠행한 요원들이 정체를 드러내면서 양하연의 앞에 선 것은 그들이 분석한 그녀의 유약함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사실 이들은 양하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계획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음지에서 한국을 관찰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
이번에도 인천에서 벌어진 상황을 전달하는 것으로 다시 음지로 숨었어야 했다. 각 수장들로부터 직접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녀가 가진 힘에 비해 만만하다고 판단해 정보를 캐내려는 수작도 있었지만 각각 그것 말고도 접촉한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저부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말하세요.”
제이슨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양하연님이 한국에서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짧게, 본론만 말하세요.”
“......양하연님을 영입하고 싶습니다.”
“그건 연합의 일원으로서, 인가요? 아니면 미국의 입장인가요?”
DCD는 연합에서 가장 미국의 입김을 많이 받는 집단. 제이슨이 연합과 미국 중 어느 곳의 입장을 대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다.
“...엘리스님의 말씀입니다.”
“참 애매한 답이네요.”
미국인이며 DCD의 수장. 명확한 답은 아니었다.
“영입은 거절할 게요.”
“...그러면 이것을 받아주시길...”
“...이건 뭔가요?”
양하연은 제이슨이 건넨 편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거절에 대한 응답이 바로 나오는 것을 보니까 이것이 본 목적으로 보였다.
“저도 모릅니다. MST를 통해 그분이 직접 건네주셨습니다. 양하연님이 제안을 거절했을 경우, 이걸 드리라고 말이죠.”
“과연...엘리스 파셀이 대단하긴 하군요.”
MST, 중앙세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간이 이동장치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과연 화이트 일족의 제자다웠다.
“일단 이건 돌아가서 읽지요. 그럼 나머지 분들은?”
“......”
‘시발...이걸 어떻게 전하라는 거지...?’
류노스케는 야마토에게 직접 전달 받은 전언을 떠올리며 진땀을 흘렸다.
‘양하연, 그녀에게 천황국의 태후의 자리를 주겠다고 전하라. 천황국 1대 황제 야마토 노시히라’
분석실에서 말한 대로 그녀가 만만했다면 이였다면 말이라도 꺼내볼 직했지만, 직접 본 그녀의 성격은 아니었다.
만약 이대로 야마토의 전언을 전한다면 자신의 목이 잘릴 것이라 판단. 류노스케는 눈치 빠르게 자신의 임무가 더욱 우선이라며 침묵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크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중화 연맹 의장 류청님께서 양하연양과 혼약을 맺고자 하오.”
차오 웡이 류노스케가 야마토에게 들은 전언과 똑같은 말을 당당히 지껄였다.
“...뭐라고요?”
어이가 없어진 양하연. 하지만 차오 웡은 그 넋이 나간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당당히 입을 열었다.
“이런 소국에 양하연양과 같은 여인은 어울리지 않소. 그 상황이 안타까워 우리 중화연맹의 수장이신 류청님께서 당신께...”
랭커로서의 그녀는 분명 중화연맹이나 천황국의 불안정한 상황에 크나큰 힘이 될 것이다. 거기에 경국지색(?國之色)의 아름다운 외모까지.
분명 최고의 선택이기는 했다. 그녀의 눈에 살기가 들어차기 시작한 것을 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하아... 그런 눈치로 무슨 정보원을 한다고. 아니 그냥 이 나라를 무시하는 걸까요?”
“무슨 말...”
촤악!
결국 계속 입을 놀리던 차오 웡의 목을 양하연의 감정을 읽은 윈드네스가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로 일거에 날려버렸다.
‘저럴 줄 알았어...’
류노스케는 목 없이 피를 뿜어대고 있는 시신을 보다 눈을 감았다.
권력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자신 뜻대로 될 거라고 말이다.
류청, 야마토 그 둘에게는 여전히 한국은 소국이었고, 자신만의 우물에서 절대적인 권력과 무력을 휘두르는 그 둘에게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냉정한 직언을 날릴 충신은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지구는 아직 중앙세계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하지 않은 뒷배경을 믿고 강자에게 함부로 입을 여는 건 중앙세계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양하연의 엄동설한 같은 살기에 류노스케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는 듯했다. 양하연의 눈이남은 둘을 봤다.
“두 분이 증인이에요. 이 유사국가 소속 놈이 저를 모욕한 거를요.”
“......”
중화연맹을 비하하는 발언이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럼 천황국에서 오신 분. 그쪽은 무슨 할 말 있어요?”
“...없습니다.”
어찌 말할까? 그 결과를 눈앞에서 지켜봤는데, 경질되었으면 되었지 류노스케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좋아요. 그러면.”
띠리링, 그때 양하연의 스마트 폰에서 울리는 전화. 상대는 마나 관측기구 국장 이도경이었다.
“네 국장님.”
“하연양! 지금 어디! 아니 유천군은 지금 어디 있나?!”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목소리만큼은 여유로웠던 이도경의 다급한 음성에 그녀는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을 직감하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한반도 북부의 두 개 도(?)가 소멸했네!”
다만 그것이 양하연의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