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백색마왕
* * *
티보치나와 관문지기들 그리고 카야와 폴른의 암살자들까지.
듀블랑때는 제대로 보지 못한 유천의 압도적인 힘에 두려움을 느끼며 후회도 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를 건드린 것인지에 대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상황을 떠나 그들은 유천을 경외했다. 강자가 존중받고 존경받는 중앙세계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유천의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은 강자에게 지배받는 약자의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저 사람은 도대체...’
그리고 그건 티보치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티보치나는 아까 공방을 뒤흔든 공격을 떠올렸다. 갑자기 사라진 유천의 왼팔. 동시에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공간이 밀려나고 거기에 휩쓸린 검은선자들이 순살 당했다.
‘마력도 없이 물리력으로만 그런 게 가능하다고...?’
터무니없이 빠르게 뻗어나간 주먹질이 공간 자체를 흔들었다는 것에 경악했다. 말도 안 되는 현상. 마법도 아니고 물리력으로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어째서... 저런 자가 폴른을 노리는 건데...?’
억울했다. 저런 절대자가 굳이 이런 약한 차원에 와서 협회를 도와 자신을 핍박하고 있다는 것이, 느닷없이 재앙이 들이닥친 이 현실이 억울했다.
“후우, 이제 너희만 남았네.”
한숨 한 번 내쉬고 유천은 나머지 빌런들을 쳐다봤다. 티보치나의 뒤에 떨리는 눈으로 이곳을 쳐다보는 폴른의 암살자들과 카야 그리고 망토를 뒤집어 쓴 관문지기들만이 남아있었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숙여진다. 함부로 눈을 보는 것조차 죄를 짓는다는 압박감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생각하자 저 자가 왜 무슨 이유로 이곳을 찾아왔는지 생각해!’
티보치나는 생각해야했다. 유천이 어째서 폴른을 찾아왔는지 그것도 왜 애초에 싸우는 것을 가정하고 찾아온 것인지, 결정적으로 무엇을 바라는지를 저 괴물이 손을 뻗기 전에 떠올려야 했다.
‘저 자들을 저렇게 만들면 안 됐어...’
티보치나는 마대자루에 든 협회 공작원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저들을 보여주지 않았거나 멀쩡히 돌려보냈다면 싸우지 않아도 협상이 가능했을 것이었다.
변명하자면 마대자루에 든 협회 공작원들을 저렇게 만들라고 티보치나 본인이 직접 의뢰한 것은 아니다.
그저 열 받아서 고유천에게 협회를 믿고 자신들을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할 수 있는 꼴로 만들어달라고 음지의 고문 기술관에게 의뢰했는데, 저런 몰골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저렇게 된 것을 앞의 유천에게 보여줬고 자신들은 그를 가지고 도발을 한 후였다. 유천은 이미 대화고 뭐고 여기 있는 전원을 죽이겠다고 굳게 다짐한 상태였다.
“기다려 너 빼고 나머진 다 죽이고...”
‘아!’
그 상황에 좌절하고 있었던 티보치나는 저 말에 조그마한 활로가 생각났다.
‘협상은 무리라도...최소한 살아날 방법은 있을 수도...’
그것조차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것이 아니면 폴른과 관문지기들이 박살난다. 그렇게 된다면 그분의 대계는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일단 대화를 시도해본다.’
“잠깐만요! 당신께서는 저만 살리려는 목적이 뭐예요?”
“뭐? 웃긴 년이네 뭘 갑자기 겸손하게 굴어? 그리고 그걸 네가 알 필요는...”
“정보 그리고 협회의 음지에 대한 영향력 맞죠?”
유천은 지금까지 계속 티보치나 자신은 죽이지 않겠다고 계속 얘기했다.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폴른의 정보력. 하지만 들어오는 정보를 조율하는 자신이 없으면 폴른은 속 빈 강정이 된다. 자신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그것뿐일까? 음지의 모든 것이 폴른을 거친다는 걸 생각하면 음지에 대한 정보를 넘어 간섭할 수 있게, 아니 정확히는 음지를 지배, 통제하기를 바란다.
‘즉 음지를 차지하고 싶은 거야 고유천 저 자와 협회는.’
저 정도의 존재가 어째서 중앙세계가 아닌 지구의 음지를 차지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쯤 되면 희망이 생긴다.
유천이 음지를 부수고 싶은 거라면 그냥 부수면 된다. 저 정도의 강자에게는 그건 숨 쉬는 것만큼 쉬운 거니까. 하지만 만약 지배를 원하는 거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무력만으로 이곳을 차지하려면 결국 손에 들어오는 건 잿더미뿐일 것이다.
협회의 이만성 또한 알 것이다. 무력으로 인천의 음지를 차지하려면 한국 곳곳의 유력인사들까지 들쑤시는 일이 될 테고 개판이 된다는 것을.
‘거기서 내가 필요하겠지. 내가 있다면 음지를 쉽게 지배할 수 있어.’
아마 그것이 티보치나 자신을 살리려는 이유일터. 폴른은 한국의 유력인사들의 약점을 손아귀에 쥐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렇다면 어쩌라고?”
‘다행이야 틀리지 않았어...’
여전히 날 선 목소리였지만 일단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대화의 여지가 아직은 있어...’
“전부 제가 도와드릴게요. 대신 여기 나머지 사람들은 살려주세요.”
“이 미친년이... 나하고 딜을 하려고 하네? 야 나는 너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필요없어.”
유천의 목적은 티보치나가 말한 게 맞았지만 굳이 빌런들을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다. 둘 모두를 이룰 수 있는데 굳이 하나만 이룰 이유가 있는가?
쿵!
“유천 공 살려주시오...”
그때 유천의 말을 들은 데이브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대장님?!’ ‘어째서 무릎을?!’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동요를 무시하고 생각했다.
‘주군에게 이 자에 대해 알려야 한다.’
데이브는 가문이 멀쩡할 때도 유천 정도의 무력을 지닌 자를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자와 자신의 주군은 지금 같은 나라에 있고, 부딪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뻔했다.
‘이 나라를 떠야한다...’
자신의 주군의 일이 더욱 길어지더라도 이 나라를 떠서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고 그는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려면 살아야한다...’
절대적인 무력에 의해 꺾여버린 마음, 주군에 대한 충심으로 데이브는 항상 가지고 있던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내버리고 꿇은 것이다.
“......”
‘이건 또 뭐야?’
유천은 지금 이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오만불손하게 군 점 사과드리오. 당신이 어떤 자인지 몰라서 그랬소. ”
“......”
“그저 한 번만 살려주시오...아직 저와 부하들이 해야 할 일이 남았소...”
데이브는 유천에게 무릎 꿇은 채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목숨을 구걸하는 타입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천이 본 데이브는 전형적인 기사였다.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목숨보다 귀한 그런 기사. 그래서 어이없었다. 빌런주제에 그런 자가 있다는 것이.
데이브의 생각을 모르는 유천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자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에 위화감을 느꼈다.
‘일단...흔들어 본다.’
유천은 일단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진심으로 위협하기로 했다. 실제로도 녀석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기도 했다.
“야...그런다고 내가 너희들 못 죽일 거 같아? 너희는 그런다고 봐주기에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
빠드득
유천이 다시 나머지 빌런들을 죽이기 위해 쥔 주먹에서 가공할 마찰음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을 본 데이브와 관문지기들은 체념하고 각오했고 나머지는 죽음이 다가오는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유천이 무엇 때문에 분노한 건지 알고 있던 티보치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또 뭐야?”
‘여기 있는 자들이 전부 죽어서는 안 돼! 그분의 대계가 어그러져 버려...’
티보치나는 저들을 살리기 위해 내줘야 할 것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저들을 멀쩡히 되돌려 놓을 수 있어요!”
“저 꼴이 난 사람을 멀쩡히 되돌릴 수 있다고...?”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유천이 너무도 두려웠지만 티보치나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모든 걸 털어놓기로 했다.
“네...제 비밀 금고에 그게 가능한 물건이 있어요...”
‘설마!’
그 말에 무릎 꿇고 있던 데이브는 눈을 부릅뜨고 티보치나를 쳐다봤다.
그 살벌한 눈빛을 본 티보치나는 고개를 저었다.
“데이브 냉정하게 생각해요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하지만! 그건...! 크윽!”
‘이것 봐라?’
저 둘이 무언가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유천은 모르는 척 태연히 말을 꺼냈다.
“너희끼리 뭔 말을 하나?”
“말 그대로예요 고유천님 저들을 확실히 치료할 수 있는 것을 제가 들고 있어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천은 저 고유천님이라는 말이 거슬렸고 또한 헛소리를 한다는 생각에 인상을 쓴 채 답했다.
“하! 뭐? 그런 형편 좋은 물건이 있을...”
멈칫...
있다. 단 한 가지 죽지만 않으면 아니 윤회만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인 것 뿐 아니라 영혼마저 되돌려 놓는 최상위 성물이 존재한다는 걸 기억했다.
유천도 라스트 레거시에서 몇 번 본 적 없는 굉장히 귀한 성물이었다.
무언가를 놓아버린 듯 이를 악물고 고개 숙이고 있는 데이브, 그리고 본인이 제안했음에도 동요하는 티보치나의 눈빛. 유천은 설마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너...설마 성령수를 가지고 있나...?”
“...역시 아시는 군요...”
“너희 빌런 따위가 성령수를 들고 있다...아니...잠깐만...”
유천은 무언가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빌런이 가지고 있을 리 없는 성령수...저 자존심만 가득한 기사가 무릎을 꿇은 점...서로 연결고리가 있어 보이는 저 둘...’
유천의 [사고 가속]의 재능이 키워드로 퍼즐을 끼워 맞췄다.
‘저 데이브라는 자와 그 부하들, 주인이 있다. 그리고... 티보치나도 같은 사람을 모신다. 그리고 성령수의 주인이 그자다. 이러면 말이 맞는군...’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유천은 떠보기로 했다.
“그거...너희 물건 아니구나? 너희가 모시는 분이 있나보지?”
““!!!!!!””
‘빙고’
티보치나와 데이브의 떨리는 눈빛에는 경악이 담긴 것을 보고 유천은 확신하고 씨익 웃었다.
티보치나는 떨리는 눈빛을 지우고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래...힌트는 있었어...여기선 도박을 할 수밖에 없어.’
“네...저랑 여기 데이브는 모시는 분이 있으세요.”
“티보치나!!!”
“이미 걸렸어요. 데이브 어쩔 수 없어요.”
“크윽!”
걸리면 안 되는 자에게 주군의 존재가 걸린 것에 데이브는 혀를 씹으며 자책했다.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성령수를 드릴게요. 거기에 인천 음지를 지배하는 일 또한 적극적으로 동참할게요.”
“말 했잖아 그건 내가 나머지 놈들을 죽이지 않을 이유가...”
“뒤에 있는 폴른의 조직원들을 다 죽이면 그 인력은요? 그 자리를 누가 채울 거죠? 저들이 없으면 폴른은 굴러가지 않아요. 그리고 빈 폴른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려고 할 테죠.”
“......”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저들이 전부는 아닐 테지만 분명 정예일터. 저들이 전부 죽었다간 유천이 한 일은 죽 쒀서 개 준 꼴이 될 것이다.
“그래......인정하지 너희 폴른 놈들은 살려...”
“만약 관문지기 저 자들까지 살려주시면 여기 있는 전원에게 노예낙인을 찍겠습니다. 계약 주재자를 통해서 말이죠.”
“......”
‘계약 주재자를 통한 노예낙인이라...’
상상계에 존재하는 계약 주재자를 불러 들여 맺는 계약은 보통 상인간의 계약이나 아니면 티보치나가 말한 것 같은 자발적 노예계약 같이 신뢰가 필요한 경우에 많이 이용된다.
만약 계약 주재자의 공증 아래 계약을 맺은 자들이 그것을 어기게 된다면 그는 그 당사자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 저주의 낙인이 새겨진 후 1~2시간 뒤에 상상계로 끌려가 끔찍한 죽음을 당한다.
‘괜찮은 거 같군...’
저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다면 앞으로의 일들이 더욱 쉬워진다.
“티보치나! 그게 무슨!”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지금 네가 조건을 언급할 처지로 보여?”
“저희를 너무 몰아가지 마세요. 끝까지 몰리면 저도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어요.”
“...아직도 주제파악을 못하네. 니들이 지금 날 협박할 입장이야?”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유천의 몸을 중심으로 아지랑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한 존재의 물리력에 공간이 밀려나오는 것이었다.
“...당신을 무시하지 않아요...더 이상 전... 당신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기로 했어요.”
모든 예측이 사뿐히 부서졌다. 티보치나는 이것이라면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제가 목숨을 걸면 당신이 이곳 음지를 가지지 못하게는 해드릴 수 있어요.”
“하! 해봐 어디 한 번 뭘 할 수 있는지...!”
“상상계에는 백색마왕이라는 존재가 있어요. 저는 그 존재를 며칠 전에 치른 주령의식을 통해 불러들일 준비가 끝나있어요.”
“......!!!”
“...보아하니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드릴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정신 나간 년...”
어떤 미친 빌런이 자신의 사후 천국으로 인도해 줄 무언가를 소망해 미지의 존재에게 도시 하나를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었다. 그때 탄생하게 된 존재가 백색마왕이다. 거기에 그걸 주령의식을 통해 티보치나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불러들이면 온전한 힘을 가지고 현계에 나타나겠지.
그렇게 되면 정말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건 나오면 안 된다. 어떤 피해를 끼칠지 장담할 수가 없어...’
주술사 또한 플레이해본 유천은 그 일그러진 존재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알고 있었던 유천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민에 잠겼다.
“...조건이 뭐냐?”
‘하나도 안 주려다 모두 잃을 바에는 들어보는 게 낫겠지.’
“그분과 대화를 나눠주세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걸 결정하는 건 제가 아니에요. 이제 그분이 당신과 어떤 말을 나누는 가에 달려있겠죠...”
“......”
“당신이 세상 모든 악인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충분히 그분과 합리적인 얘기를 나누실 수 있을 거예요.”
“......”
‘......나쁘지는 않다.’
흑막인지도 모를 자에 대해 알 수 있으며, 티보치나의 말처럼 정말 합리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뭐지...뭐가 이렇게 찝찝하지...?’
다른 무언가가 유천의 감을 건드리고 있었다. 유천은 지금 이곳에 와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 그분이라는 자는 아니야 어디서 이 불길함이...’
“아...”
유천이 고개를 들어 쳐다본 티보치나의 눈동자 아래에 백색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씨발!”
“네...?”
‘생각났다! 젠장! 뭐 때문이었는지!’
“이 멍청한 년이!!”
“갑자기 무슨...”
콰직!
“아...?”
티보치나의 가슴팍에서 백색 일색의 기다란 팔이 튀어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