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협상(2)
* * *
“크흠...그래 가장 중요한 걸 안 물었군. 이름이 어떻게 되나?”
“......고유천입니다.”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만성은 유천의 이름을 물었다.
“그래 시민권을 원한다고?”
“네”
“흐음...”
유천이 시민권을 원한다는 말에 이만성은 눈을 좁히고 노려봤다.
“...한 가지만 묻겠네...자네 빌런인가?”
‘오해할 만하지’
한국은 이 좁은 땅덩어리에 3명의 랭커가 포진해 있었다. 거기에 각성자들의 수준 또한 세계의 기준에서도 우수한 편.
정부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라들과는 달리 한국은 아직 강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이 시민권을 따는 게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권이 없는 한국 사람을 보면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어쩌겠나? 유천은 이 세계의 자신이 시민이었는지 아닌지 조차 모른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정확히는 킬리언의 시민권을 원합니다...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기억이 안 납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건 제 이름이 고유천이라는 것과 그 밖의 몇 가지뿐입니다. 안 믿기신다면 정신계열 각성자들에게 의뢰하셔도 됩니다”
유천은 게임, 만화, 소설의 단골 소재 ‘기억이 안 납니다.’를 쓰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짜로 이곳의 고유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거짓말은 아니니 잡아낼 수 없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애초에 저 같은 빌런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네임드를 완벽히 제압하는 3차 초월을 달성한 빌런이라...진작에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멸망했을 거다.
“그렇군...”
이 말 한마디에 이만성의 눈빛에 서린 의심의 빛이 조금은 거둬졌다.
일단 그 말에 어느 정도는 납득한 걸로 보이는 이만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유천군이라고 했나? 그래, 아직 의문점이 여럿 남아있지만, 그대라면 괜찮다. 사람이니 허나 여전히 저 자가 괴수라는 점에서 생기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네. 저 자가 인간들의 도시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하네.”
“......”
‘킬리언의 사회성을 증명하라...’
저것 또한 맞는 말이다. 믿고 데려왔는데 멋대로 도시를 파괴하면 답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하던 찰나.
나는 너희가 말하는 네임드 괴수와는 다르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킬리언이 말을 꺼냈다.
“어떤 부분이 다르다는 건가?”
너희 이너들에게도 지성체가 있듯이 우리 아우터에게도 나와 같은 지성체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마족이라고 부른다.
킬리언은 동굴에서 나한테 설명한 것보다는 간략하게 외차원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있는지, 괴수가, 마족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했다.
“......그거 놀랍군.”
대화는 사회를 이루는 생물만이 가능한 고차원의 의사소통체계다. 킬리언이 말을 하는 시점에서 예상은 했지만, 외차원에도 자신들과 같은 사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에 마치 바다 속에 도시가 있다는 말을 들은 느낌이라 이만성은 상당히 놀랐다.
“그런데 어떻게 알려지지 않았지? 수십 년간 중앙세계의 랭커로서 용병활동을 할 때 그런 존재들이 있다는 걸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만?”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킬리언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얼핏 들은 적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우리 마족들과 이너들간에 꽤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고.
“그런 기록이 있나요? 어디서 들은 말인가요?”
나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단 한번, 예전에 어떤 음유시인의 노래에 그런 적이 있다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꽤 흥미로워 기억하고 있었지.
킬리언의 말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양하연이 눈을 빛냈다.
‘궁금한 건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려고 하는 건 이때도 똑같네’
유천은 하이랭커인 양하연와의 게임 내 몇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궁금한 것만 생기면 아주 온갖 문제를 만들어 냈는데. 그때 그녀가 일으킨 여러 문제들 때문에 저 충동적인 호기심이 불안했다.
“창조신이 만든 7괴수라...”
최초의 괴수들, 외차원 모든 생명의 조상들이다. 그 중 하나 ‘흐르는 이면의 배반자’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 자가 그것을 기록한 것을 노래로 만든 것이라더군.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아무도 모르죠?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걸? 그리고 왜 우리 이너들은 당신들 마족에 대해서 아는 자는 왜 없죠?”
모른다. 나는 전사이지 학자가 아니다 인간. 거짓말인지 아니면 누가 지웠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
‘지웠다...?’
킬리언이 퉁명스럽게 한 말이 유천의 머리에 박혔다.
“......지웠다고요?”
그리고 그건 양하연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지워진 역사... 정확히는 비어있는 역사가 하나 있었지 설정상... 그걸 아마...’
“멸세의 역사...”
수만 년 전 가장 참혹했다는 시대, 시체가 강이 아닌 바다를 메웠다는,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봐 후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150년 남짓한 공백의 시기, 그걸 멸세의 역사라고 불렀다.
그걸 기억하는 이유는 창조주의 ‘마지막 유산(Last Legacy)’이 그때 사라졌다고 했다.
‘근데... 그럼 앞뒤가 안 맞는데’
“이상해요... 외차원과의 연결을 막아 왔던 창조주의 유산이 소실된 건 멸세의 역사가 끝난 직후, 약,75,000년 전...”
“하연양.”
“그리고 아우터들의 침공이 시작된 건 정확히 54,061년 전. 그런데 그보다 훨씬 20,000년도 전부터 외차원과 교류를 맺었다는 건 말이...”
“하연양!”
“아...”
“그만하시게.”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굉장히 위험한 얘기 같군. 알아서는 안 될.”
“......”
유천 또한 이 역사가 모순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음유시인이 그냥 지어낸 말일 수도 있지만, 유천의 감은 말하고 있었다.
저건 ‘라스트 레거시’ 최후반부에 가까운 메인 에피소드와 관련 있는 떡밥이라는 걸.
“죄송해요......”
여기서 별 생각이 없는 킬리언을 제외한 모두가 이 모순에 상상할 수 없을 거대한 힘이 개입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양하연이 아무리 호기심이 왕성하더라도, 죽을 게 뻔한 일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자신의 호기심이 또 문제를 초래할 뻔했다는 걸 깨달은 양하연의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은 뭔가 풀이 죽은 것 같았다.
싸늘한 분위기. 유천은 이 주제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걸로 킬리언이 대화를 나누고, 사회를 이해하는 인간과 같은 지성체라는 건 판명됐습니까?”
“그럼......기분 나쁠 수 있지만 킬리언...양 하나만 묻겠소. 당신은 어쨌든 원래 괴수였지 않소? 그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소? 솔직히 말씀해 주시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연한 사람이네.’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의 설명에 지성체임을 인정하고 존대를 하는 것에 이만성이 처음 생각보다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마 처음의 그 단호박 같은 태도는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공포심과 격양된 분위기 때문일 거다.
거기에 예의가 아님에도 시민들을 지키는 자로서 해야 할 질문을 하는 책임성까지.
책임감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첫 이미지에 비해 훨씬 뛰어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음... 내가 고유능력인 생체장갑만 꺼내지 않으면 된다. 그때의 나는 이성이 날아가고,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부끄럽게도... 지구에 넘어온 것도 그런 이유였고.
“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 말에 유천은 놀라서 물었다.
생체 장갑이 없으면 이성을 잃는다는 걸 들은 적은 있지만, 그게 지구에 넘어온 계기가 되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음... 사실...
.
.
.
“그러니까... 외차원에서 강한 괴수를 만나 싸우다 발동시켰는데, 이성을 잃고 지금까지 그냥 그대로 다녔다? 그러다가 강자를 찾는 괴수의 본능 때문에 나를 찾아서 보자마자 후려갈기고?
음...맞다. 비록 죽을 뻔했지만, 이성을 되찾게 해준 건 감사하게 생각한다.
”......“
이런 온갖 문제를 만들어 낸 근본적인 이유가 생체장갑을 해체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에 유천은 황당했다.
“일단, 도시 내에서는 절대로 그걸 꺼내지 말아 주시오. 그리고 외부 활동 시 유천군이 항시 그녀와 붙어있을 것 그것이 협회장으로서의 첫 번째 조건이오.”
그러겠다. 어차피 나도 죽을 위기가 아니면 잘 꺼내지 않는다.
외부 활동 시 함께 행동해라는 말은 어디 갈 때마다 유천과 킬리언은 항상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뭐 문제는 없군.’
융통성이 없다는 것을 빼고 보면 그녀는 뛰어난 능력자에 왜인지는 모르지만, 내 말에 충실하게 따라주고 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단 틀은 잡혔으니 나머지는 돌아가서 얘기해보는 걸로...”
“윽!”
그때 기절해 있던 이도경이 깨어났다.
“도경이! 자네 괜찮은가?”
이만성과 지금까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던 양하연이 그에게 다가갔다.
“크으... 어째서 저들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진정하게 다 설명해 주겠네.”
*
“그렇게 된 거군요.”
멸세의 역사와 같은 위험한 이야기 빼고는 이도경은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 모두를 들었다.
“리스크가 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말이 다 사실이라면,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도경은 유천에 대해서는 확실히는 잘 모르지만, 저 둘을 얻는 것만으로도 한국은 최소 수십 수백 명의 랭커 이상의 무력을 얻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대신 이 일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 알아야하겠군요.”
“그렇지. 길드에도 정부에도 알리면 안 된다네.”
마음먹고 날뛰면 두 명이서 세계를 뒤엎을 수 있는 존재가 한국에 있다는 걸 알면, 그것도 하나가 마족이라는 걸 알면, 난리가 날 것이다.
킬리언의 마기를 숨기는 건 양하연이 도움을 주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만 조심히 지내면 된다.
“아!”
“왜 그러십니까? 유천군”
처음 밑도 끝도 없이 화살을 유천의 머리에 꽂은 모습과는 달리 이도경은 젠틀한 사람이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유천은 끝없이 일어난 트러블 때문에 잊고 있던, 심각한 일이 떠올랐고, 이걸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음...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저 죽은 빌런놈들의 본거지입니다.”
“네 그건 이곳에 왔을 때부터 몇몇 알고 있는 수배 빌런들의 모습을 확인해서 예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안 좋은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상당히 힘드네.’
유천은 망설이다 말 안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말을 건넸다.
“...... 이 밑에 여성분이 한명 있다고 합니다.”
““......””
듣자마자 상황을 알아챈, 이도경과 이만성의 얼굴은 보기 미안할 정도로 일그러졌고, 양하연의 약간 시무룩했던 분위기는 그녀의 표정처럼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저는 상황을 보지 못했지만... 킬리언에게 듣기로는... 별로 좋지 못한 상황이라고 합니다...죄송합니다. 그걸 이제야 말씀드려서...”
빠드득...
“개 같은 빌런 놈들...”
“제가 다녀올게요.”
각성자와 괴수들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집단의 수장인 이만성은 분노로 이를 갈았고, 양하연은 재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킬리언 너도 따라가 드려”
음? 나도 가야하나?
“옆에서 도와달라는 거 도와줘”
흠... 알았다.
이만성과 이도경 그리고 유천은 남성이었기에 가면 안됐고, 또 랭커라도 여성 혼자 수습하기에는 힘든 광경이 예상되는 지라 킬리언을 보냈다.
““......””
그렇게 남은 두 명은 죄책감과 분노를 삭이고 있었고, 유천은 그 모습을 씁쓸히 보다 말을 걸었다.
“그럼...해가 곧 지니... 여성분을 수습한 후에 돌아가도록 하시죠.”
이렇게 유천은 본인의 계획대로 된 건 하나도 없지만,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도시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