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나비효과(2)
* * *
톨드렛이 과거에 이도경에게 빚을 지긴 했지만, 이지연이 그와 함께 병력을 이끌고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만년필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보호해달라는 게 애초에 내 부탁이었으니까’
애초에 그 만년필은 혹시나 하는 상황에 딸을 위해 쓰려고 한 것이다.
뭐? 네임드를 잡을 병력을 끌고 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리브레스 교수회 소속 교수가 가진 힘은 대단하지만, 네임드를 잡을 병력을 끌고 올 수는 없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 중에서도 한줌에 드는 자들만이 초월을 이루어 랭커에 도달한다.
부와 명예가 보장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괴수들에게도 이런 랭커와 같은 위상을 지닌 존재들이 존재한다.
이너들을 죽이고, 스스로 성장하여, 결국에는 랭커마저 죽이는 괴수들.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서 죽음을 뿌리는 재앙들에게 중앙세계의 ‘13 위원회’는 이름을 붙이는데, 그들을 네임드라고 한다.
34체계로 분류된 등급 중 그 꼭대기에 있는 SS+등급이 랭커와 동등하다고 본다.
즉 그것을 초월한 네임드를 상대하는 건 일반적으로 다수의 랭커가 필요하다.
지구에 존재하는 랭커의 수는 총 15명 비록 그 중 이도경을 포함한 3명이 한국에 존재하지만, 지구에서나 최고지, 중앙세계 기준으로는 하위권에 불과하다.
그 셋으로 네임드를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나라도 자국의 랭커를 네임드 사냥에 투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한국의 길드들, 그들 모두가 썩은 건 아니지만, 길드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3대 대표길드의 현재 우두머리 놈들은 하나 같이 빌런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네임드 토벌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운 상황
‘아마 살아남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거다’
그의 딸과 같이 중앙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도경의 책임성이 그걸 부정했고,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딸이 실망마저 한다면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남아서 싸우기로 했다.
띠리리링!!
만성 형님
“......그래 이 형을 어찌 혼자 두고 떠나겠나?”
이도경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에 뜨는 동료이자 친구인 형의 이름이 떠있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정부를 통해 군부와 각 길드들에게 현 상황에 대한 정보가 넘어 가기 시작하겠지만, 그라면 지금도 느낄 것이다. 저 멀리 북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끔찍하게도 거대한 마력의 잔향을.
자신 또한 느끼고 있었으니까.
툭
“예...”
이도경이... 너도 느꼈겠지?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를 받은 이도경에게 각성자 협회장이자 랭커인 이만성이 인사도 건너뛰고 다짜고짜 말했다.
“예 형님”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이기도 하고 예의를 차릴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어딘가?
“강원도 철원이더군요”
빌어먹을... 이런 촌 동네 차원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처들어 오는 건지 망할 괴수놈들
랭커이자 각성자 협회장의 위치에 있는 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심정에 자신 또한 공감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나는 길드들을 소집하고 군부와 연락해 보겠네 이번 일은 그들의 협조를 받아야해 그러니 도경이 너는...
“하연양은 제가 연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녀의 힘이 꼭 필요해
양하연
한국의 세 번째 랭커인 그녀는 지구에는 거의 없는 하프엘프다.
그녀의 아버지가 괴수 사냥 중 쓰러진 엘프를 구했다가 둘이 사랑에 빠져 결혼해 그 둘 사이에서 나온 아이가 양하연이다.
전도유망한 각성자였던 그녀의 아버지와 정령술의 대가인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그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세계에서도 보기 힘든 삼십이라는 젊은 나이에 랭커에 도달했다.
노화가 오지 않는 엘프의 특성을 물려받은 아름다운 외모, 랭커에 도달한 강력한 정령술.
그녀는 순식간에 전 지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각성자가 되었지만, 그저 괴수들을 사냥할 때만 나타날 뿐 그 이외의 대외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나도 중앙세계에서의 인연 때문에 연락처 정도만 알뿐이고 그 이외에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
그나마 아는 거라고는 그녀의 부모님이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뿐이다.
“근데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이도경 자신은 양하연 그녀만을 설득하면 되고, 대부분의 랭커들이 어딘가 괴팍한 구석이 있는 반면, 그녀는 차갑지만 조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반면에
“길드놈들이 순순히 말을 들을까요?”
이만성, 그가 설득해야하는 길드놈들은 다르다.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을 고수하는 길드의 특성상 네임드와 싸우지 않으려고 할 거다. 강제로 참가하게 한다고 해도, 떨어진 사기로는 네임드의 힘을 마주하는 순간 모두 도망갈 거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안 그래도 힘든 싸움, 녀석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다면 놈을 쓰러뜨릴 수 없다.
‘아주 큰 것을 넘겨줘야겠지’
이도경은 그를 걱정했지만, 이만성은 허허 웃으며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런 걱정하지 말게 저걸 죽이지 못하면 자기들이 죽을 거라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들은 아닐 테니까 말 안 들으면 다 포기하고 나랑 같이 도망이나 가세나
허허허!
“형님...”
그는 도망간다고 말하지만 이도경은 안다.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한 그의 마지막 가족인 손녀가 이곳에 있는 이상 절대로 그는 중앙세계로 도망갈 수 없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그나저나 지연이는 어떻게 할 건가? 참전시킬 건가?
“...아닙니다. 리브레스의 교수회에 인연이 좀 있어서 그리로 보냈습니다.”
이도경은 말을 돌리려고 하는 이만성의 의도에 그냥 따라줬다.
그래 잘 했네.
“죄송합니다 형님...”
아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냐 어차피 경아 그 아이 그 약한 몸으로 중앙세계로 넘어가서 살아남기는 힘들다는 걸
지구와 연결된 중앙세계의 땅은 에르칸 사막, 지구인들을 위한 캠프가 있지만, 그 허약한 아이가 온갖 괴수와 빌런들이 숨어있는 지구만한 크기의 사막을 건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랑 경아보다는 지연이나 걱정하시게 그 아이가 제법 강하더라도 에르칸 사막은 위험한 곳일세.
아!
그나저나 지연이와는 화해는 했고? 10년간 내외했으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이도경과 지연이 사이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이만성이 항상 타박하듯 물어왔던 말이었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에잉...자네는 좀 뻔뻔하게 나가야 할 필요가 있네
다른 사람에게 들었으면 뭘 아냐고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가족과도 같이 지내온 사람이고, 실제로 본인의 일처럼 안타까워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서로 해야할 일이 많은 만큼 이제 슬슬 끊도록 하지
이도경은 서로 바빠 오랜만에 한 통화인 만큼 진득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좋은 일로 한 것도 아니고, 곧 보게 될 것이다.
그럼 하연양과 협상 후 관리기구 팀원들을 끌고 협회로 오시게나, 꼭 그녀를 설득해야 하네
“네 형님 걱정마시고,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곧 보도록 하지
뚝!
나이 먹은 사람답게 이만성은 할 말이 끝난 후 곧장 전화를 끊었다. 이도경은 잠시 끊긴 스마트폰을 보다 양하연의 연락처를 찾았다.
“번호가...여기있군”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받아라 제발’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협상이고 뭐고 없었다.
그렇게 1분 후
딸깍!
네
“다행히도 받았군 잘 지내고 있었나?”
지금 본론은 그게 아닐 텐데요.
‘여전히 차갑군’
이도경에게 악감정이 있어 보이는 대꾸였지만, 그녀 양하연은 세상 모두에게 차가웠다. 저러다가 끊어버릴까봐 이도경은 바로 본론을 말했다.
“그래 자네도 느꼈을 테니까 본론만 말하지 지금 당장 각성자 관리기구로 와 줬으면 하네”
대가는요
대가라
“얘기 해보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주도록 하지”
흠...
그녀는 고민 중인지 1분여간 전화기 너머로 숨소리만 들려왔다.
“생각나는 게 없으면 나중에...”
리브레스 교수회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 보여 나중에 생각해보고 요구하라는 말에 생각지도 못한 곳의 이름이 들렸다.
“......”
국장님이 리브레스 교수회와 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선이라고 할 정도의 인연이 있는 곳은 아니네...”
리브레스의 교수 한명과 인연이 있는 거지
리브레스 교수회 같은 거대 단체와 내가 뭐라고 선이 있다고 말할까 이도경의 생각은 그러했기에 그녀의 말에 부정했다.
그래도 연락이 닿는 교수 정도는 있을 텐데요
“......”
이도경은 이 여자가 뭘 원하는 건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별다른 외부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왜 리브레스 교수회와의 선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저를 소개해주세요 당신과 연이 닿아있는 교수에게
“......그거로 끝인가?”
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소개 시켜 주기 전에 우리가 오늘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네만...?”
네임드와의 싸움에서 가장 큰 어그로가 끌리는 것은 당연히 랭커다 가장 위험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럴지도 모르죠
하...
옅은 씁쓸함이 배인 탄성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그게 제 운명이겠죠.
그녀는 무언가를 단념한 듯 말을 내뱉었다.
“...그렇나? 알았다네 이번 일이 해결만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대를 소개해주지”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가도록 하죠. 나중에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해요
“그러도록 하지”
뚝
“후우, 일단 가장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건 잘 해결됐군”
이제 이쪽에서도 할 일을 해야겠지
뚜르르르르
“어 1팀장 날세 1팀부터 13팀 전원 집결시키게, 아 3팀장은 비밀 임무를 보냈으니 그 밑의 부 팀장이 인수인계를 받게 하고, 그래 지금 당장 전원 소집하게 비번도 포함해서 전부”
툭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준비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군’
털썩
의자에서 일어난 이도경은 국장실 구석에 있는 관물대를 열었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있는 관물대 안에는 가지각색의 화살들, 그리고 검은 빛이 맴도는 거대한 각궁이 하나 걸려있었다.
“목숨 걸 일은 이제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화살 하나하나를 화살집에 담는 이도경의 모습은 무언가 의식을 치르는 듯 보였다.
똑똑
15발의 화살을 담은 화살통과 각궁을 등에 매자 얼굴에 사선의 칼자국이 있는 남자가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고개 숙이고 말했다.
“국장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툭툭
이도경은 준비를 완료한 채 고개 숙이고 있던 1팀장의 어깨를 두드린 후 문 밖으로 나와 정렬해 있는 각 팀원들을 봤다.
여기 서있는 자들은 더욱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다.
어느 길드를 가도 제법 그럴싸한 자리에 앉는 것이 가능한 그런 엘리트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인 모습에 이도경은 자랑스러웠으며, 슬펐다.
그에 비해 자신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함부로 부정을 저지른 것에 스스로가 아주 역겨웠다.
그래서 이도경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여기서 빠질 사람 거수하라”
‘나 또한 랭커 이들의 빈자리를 내가 감당하면 되는 일’
그러니 얌전히 보내주겠다. 이런 개죽음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네임드와 랭커의 싸움에 너희 일반 각성자는 시간 벌이용 고기 방패에 불과하다.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 거수 하라”
랭커가 숨을 돌릴 1~2초의 시간을 벌기 위해 열댓 명이 목숨을 버리는 곳이 지금 우리가 가는 전장이다.
그러니 제발
“마지막으로 묻겠다. 거수하라”
이곳에서 도망쳐다오.
그때 200여명 가량의 인원 중 한 명이 손을 올렸다.
‘한명뿐인가?’
저 한명을 제외하고 여기 있는 팀원 중 얼마나 많이 죽을지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여러모로 이 땅에 어둠이 스며들겠군’
3대 대표 길드, 지금은 썩어빠졌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다.
최초 창립자들과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은 누구보다 용맹하게 괴수들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냈지만, 동시에 많이 죽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꿰찬 것들이 지금의 길드장 놈들이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협회나 여기 관리기구나 많은 힘을 잃고, 억눌러 뒀던 썩은 물들이 들어차겠지.
‘일단 놈부터 잡는다’
상황이 참으로 암담했지만, 그것도 다 놈을 쓰러뜨린 후의 이야기다. 그 상황에서 사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기에 덤덤하게 이도경은 손을 든 한명을 쳐다봤다.
“한명 뿐인가? 그래 그럼 그대는 집으로...”
“국장님”
“?”
이도경이 돌아가라고 하려는 찰나 손을 든 인원이 말을 걸었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
‘그래 가족은 꼭 지켜야지’
자신 또한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인 딸을 지키기 위해 부정을 저질렀다. 내 가족이 소중한 만큼 남의 가족도 소중한 법 이도경은 흔쾌히 보내주기로 했다.
“그래... 그럼 가족에게 돌아가...”
“돌아가서 가족들 소고기 좀 먹이게 보너스 좀 많이 주십쇼!”
““......””
순간 싸해진 복도의 분위기, 허나 곧 실소들이 들렸다.
큭!
하하하!
에라이 미친놈아!
긴장감과 비장함이 조금 줄어든 복도에 웃음과 친애의 욕설들이 흘러나왔다.
이도경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며 생각했다.
‘난 국장 자격이 없는 놈이군.’
이도경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강하면서 살아서 돌아갈 생각보다는 죽을 생각부터 했다.
거기에 바보 같이 그걸 스스로도 모르게 티를 내고 있었고, 이끌어야 할 팀원에게 위로 섞인 농담을 들은 거다.
‘부하에게 위로받는 상사라... 쪽팔리기 그지없어’
피식
“하하하하하!”
이도경은 자신의 멍청함이 웃겨서 웃었고 좀 덜어낸 감정을 느끼며 아까 손을 든 팀원을 가리켰다.
“하하, 그래 그대는 5팀 팀원이군 이름이 뭔가?”
“한이명입니다!”
“그래 보너스를 많이 달라고 했나?”
“넵!”
이도경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보너스는 넉넉하게 챙겨주지 쓰다가 부족하면 전화하게 내사비로 부족하지 않을 만큼 주마”
“약속하신겁니다?!”
““하하하하!!””
아까 보다는 가벼워진 분위기, 이도경은 그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잊지 않겠다는 듯 머리에 새겼다.
그렇게 웃음소리는 가라앉고 다시 진중해졌지만, 처음과는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기필코 네임드를 죽이고 살아 돌아오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빛에 이도경 또한 아까와는 다른 각오를 했다.
“각성자 협회에 네임드와 싸울 각성자들이 모여 있을 거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곳으로 향한다.”
좌절과 절망을 털어낸 이도경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죽음을 각오했다.
“가자!”
‘너희들이 절대 나보다 먼저 죽지 않게 해주겠다.’
““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