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3회
466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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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 생텀 점령으로부터 약 엿새.
지난 6일 동안 세계는 크게 변했다.
여신교단의 몰락.
마왕군의 승리.
그리고 마왕이 직접 이끄는 마왕군(진)의 천계 함락.
지상의 일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천계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천족은 몰살당하지 않았다.
마왕 솔로몬은 천계를 점령하되 몰살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대신 여신 '이었던' 존재를 취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남은 신성이 갑자기 사라짐에 따라, 마왕은 아주 쉽게 천계를 습격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무엇을 숨기랴.
여신은 나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줬을 뿐이다.
성검 레오의 용사에게 신성력의 힘을 각성할 수 있도록, 타락한 할레오가 신성력의 힘이 가득한 성검 레오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신성력의 방패를 상대로 내가 피부가 불타지 않고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여신은 나를 위해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켰다.
비록 솔로몬이 스위트한 마음가짐으로 여신을 안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과연 여신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고 나를 도왔을까?
절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솔로몬에게 살해, 아니 간살당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
그녀가 솔로몬을 이계에서 납치해 온 장본인이기 때문.
아니, 마계의 우두머리이자 마족들의 지배자, 마왕군의 진정한 주인인 마왕이 왜 여신이 부른 용사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신과 솔로몬만이 알고 있을 뿐.
사실 몰라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중요한 건 솔로몬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는 몰라도 여신을 신전 제단에 눕히고 라-스했다는 것.
놀랍게도, 솔로몬은 여신을 임신시켰다.
시스템은 여신이었던 존재조차 여자로, 어머니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오오, 찬양하라. 위대한 솔로몬. 위대한 시스템이여.
그렇다면 전쟁은 끝났냐?
아니다.
천마대전은 끝나지 않았다. 지상에서 여신 교단을 만들어 여신을 참칭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흑막이 아직 잔당으로 남아 버티고 있다.
대천사 가브리엘.
대천사 미카엘.
한 명은 이해가 간다. 다름아닌 솔로몬에게 범해져 루시펠을 낳은 장본인이니, 마족 멸절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말하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왜?
'이유 따위야 뭐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그들이 여신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결사항전을 하는 이유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결사항전을 하며 누구 한 명이 끈질기게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몹시 불쾌한 일이다.
"언제 죽나…."
나는 엿새간 모든 식사와 수면을 이곳에서 했다. 바로 용암지대의 앞에서.
먹는 거야 대충 끼니를 챙기면 그만이고, 자는 거라면 분신을 이용해 24시간 감시체제를 구축했다.
누구를 위해?
성녀를 위해.
'영화같은데 보면 저런데서 탈출하고 막 그러던데.'
"하아, 하아, 하아…."
성녀는 거친 한숨을 뱉어냈다. 이미 전신을 가려주던 옷은 실오라기 하나 없는 전라였다.
"으, 으으…."
당연했다. 신성력은 몸을 보호해주지 옷까지 보호해주지 않는다.
이미 아크생텀의 첨탑에서 화형식을 거행했던 만큼, 용암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여인-성녀는 전신의 털이 다 타버린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로 죽지 않아…! 절대!"
성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헛것이다. 성녀는 죽을 운명이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언제 신성력이 꺼지지 모른다는 불안감.
혹시나 눈을 붙인 사이 몸이 피곤해서 신성력을 놓아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
그 모든 불안감이 하나로 합쳐져, 성녀를 상당히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신성력으로 제정신을 차릴 수는 없지.'
아무리 신성력으로 몸을 둘러쌓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인간이 죽음의 위기를 실시간으로 오랜 기간동안 버틸 수는 없다.
이른바 스트레스 지수가 폭발하여 죽는다. 성녀는 신성력의 보호가 끊어지는 즉시 용암에 녹아내릴 운명이었으니까.
"누가...구해줘…."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성녀의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모조리 죽었다. 애초에 성녀에게 목적이 있어 모여, 동료라고도 할 수 없는 자들이지만.
그들조차 없다.
성녀를 구하러 올 사람은 누구 하나 없다.
다른 마왕군? 그렇게 구하고 싶으면 처들어오라지. 용암 속에 손을 집어넣고 성녀 째로 회수하면 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지금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성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성녀가 살아서 나갈 수 있겠는가.
순간.
푸시이이.
어디선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나는 하늘, 천계를 향해 알코올 가득한 술병을 들었다.
"이제 버프 끝났다."
성녀에게 무한한 힘을 주던 대천사들은 성녀에게 힘을 줄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들은 마왕군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마왕의 친정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했다.
즉, 마왕군은 엿새간의 전투 끝에 붙잡고말았다.
대천사를.
그리고, 대천사가 보내주는 신성력의 힘이 이제 더는 없는 이상, 용암 위에서 악을 쓰는 악녀도 이제 끝이다.
"사, 살려줘…!"
성녀는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할게! 개처럼 짖으라면 짖겠어! 그러니 제발, 제발 살려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해서 그런지, 성녀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절박했다.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의 문턱이 바로 눈앞에 놓여있는데,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아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상대가 성녀다.
살릴 가치도 없고, 심정적으로 반드시 죽여버려야 할 존재.
냉정히 생각하여, 나는 바지부터 벗었다.
푸쉬이이.
성녀를 중심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액체와 용암이 닿는 순간부터 연기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나는 귀두 부분을 손으로 털었다.
"이…!"
아래에 있는 성녀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왜 자신이 죽어야하는지. 정말로 천계의 천족들은 자신을 배신한 것인지.
"슬슬 끝이군."
"살려줘! 제발! 나 이대로...죽고 싶지 않아!!"
성녀는 악다구니를 쓰며 내게 손을 뻗었다. 자신을 향해 골든샤워를 뿌렸음에도, 성녀는-생존에 대한 의지로 가득찬 성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대줄게! 씨빨, 대주면 되잖아!!"
성녀가 나를 결코 죽이지 않을 거라고.
"관심없다."
시간이 되었다. 아래에서 차오른 용암이 서서히 성녀의 몸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
비명이 동굴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분명 누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을 터.
아무도, 없다.
"성녀. 네 패인은 하나다."
트랄을 범하려고 들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사형은 확정이었다.
"시, 싫어-----!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은, 허억…!"
단말마.
성녀는 단말마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다시금 하늘을 향해 술병을 들어올렸다.
"승전을 축하드리오, 마왕."
나 또한 마찬가지.
나는 마왕을 향해 찬양을 펼쳤다.
"마왕님 만만세."
아마도 지금쯤, 천계에서는 천사들의 잔당이 쓰러지고 있을 터.
뚝.
신성력의 연결이 끊겼다. 나는 이 세계로 넘어와 기나긴 연구 끝에 구현한 담배를 길게 빨았다.
"후우…."
히뿌연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간다. 주변의 열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연기는 사방으로 흩어지며 뿔뿔이 흩어졌다.
마치 용암속에서 녹아내리는 누군가처럼.
"굿바이, 성녀."
나는 연초를 용암 위로 튕겼다.
"안녕이다."
성녀는 녹아내렸다. 트랄의 그것과 함께.
그리고.
"......."
나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만했다.
"거기 있느냐."
"네, 아버님."
포르네라스.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시스템창을 펼쳐 건넸다.
"트랄은 죽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렇죠. 트랄...님은 명예롭게 돌아가셨죠."
"그래서 트랄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나는 포르네라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내 손을 맞잡고 자신의 시스템창을 열어 내게 권한을 넘겼다.
포르네라스 던전.
이미 등록되어있는 부하들이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있으니.
트랄.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안했는데."
포-스는 오래전 던전을 탈출한 트랄의 데이터만으로 데스트랄을 만들어 조종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법을 찾아봤다. 만약 던전을 넘겨받으면 인연소환의 리스트도 함께 넘겨받는지.
안 되더라.
트랄은 리스트에 없는 존재였다.
그게 용사여서 그런지, 아니면 트랄의 몸 일부가 성녀에게 남아 빠져나오지 않아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네라스가 포르네라스가 되면서 많은 것을 포기했던 것처럼, 나 또한 뭔가를 포기하면 방법은 있었다.
"마왕님."
나는 마왕을 호출했다. 검은 안개가 앞으로 퍼져나가며, 흑발 정장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신 왔어. 무슨 일?"
"트랄을 살리고자 합니다."
"......."
여인, 에스투는 표정이 굳었다.
"그거…진짜야?"
"예. 저는."
나는 내 가슴을 당당히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트랄을 되살리고, 마왕의 자리를 포기하겠습니다."
트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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