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1회
458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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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계획은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내가 어그로를 끌고 륜이 저격으로 마무리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는 했다.
그 덕분에 성녀는 도망가지 못했다. 텔레포트스크롤에는 구멍이 뻥 뚫렸고, 나는 성녀의 면상을 바닥에 처박는 것으로 성녀를 제압했다.
"륜! 넵튜뉴스를 불러!"
"네!"
륜은 바로 넵튜뉴스를 소환했다. 신전 한 가운데 나타난 물의 정령왕은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피에 굳은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붙잡아!"
넵튜뉴스는 성녀의 몸 위에 덧씌워졌다.
자신의 몸을 성녀의 위에 씌워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 깨어나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끔 구속했다.
이른바, 물의 감옥이다. 성녀는 이제 물의 감옥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몸이 되었고, 나는 성녀를 구속하느데 성공했다.
하지만.
"트랄!"
성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급히 몸을 돌려 트랄에게로 향했다.
"......."
트랄은 이미 눈을 감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항상 의식을 잃기 전까지 버티면서 살아있던데, 트랄은 아무리 옆에서 흔들어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트랄…?"
나는 그의 혈을 짚었다.
심장이 아주 미약하게 뛴다. 하지만 그 심박은 점차 줄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호흡은, 애초에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형제여."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생기가 사라진 그의 손은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온기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씨발, 이건 너무하잖나…."
아무리 세계를 위해서라지만,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
"왜 네가 희생을 해야하냔 말이다."
군단에 죽더라도 부활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조차도 나의 죽음을 이용했다.
그러나 트랄은.
트랄만큼은 부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던전에 등록된 존재도 아닐 뿐더러, 부활할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트랄…."
그는,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손을 보았다.
"아…."
그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를 민 것으로 모자라, 내게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가리켜주고 있었다.
"주인님…."
사아아.
륜이 내곁으로 다가왔다. 부하들마다 모두 지급한 체력포션이나 마액을 꺼내들었고, 나는 트랄의 입으로 바로 부어버렸다.
주르륵.
하지만 액체형태의 포션은 전혀 트랄의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일부러 목구멍을 확장하듯 누르면 기도에 들어가서 켁켁거리며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일은...없었다.
"아…."
인정해야만 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재처럼 바스러지는 오크를 보며, 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사아아아.
은빛의 기운이 트랄에게서 빠져나왔다. 빛무리는 마치 황소의 모습을 연상케하며 뭉치기 시작했고, 트랄의 가슴 위에서 서너번을 빙글빙글 돌았다.
파스스.
황소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자, 트라의 몸은 은빛 안개가 되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그르르….
황소는, 나를 향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뒷 말은 더 필요없다는 듯 밖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나는 홀린듯이 은빛 황소의 뒤를 따라 걸었다.
와아아---
신전의 밖에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군단의 병사들이 여전히 죽어가고 있었고, 여신교단의 생존자들이 우리 군단의 병사들을 상대로 아직도 끈질기게 살아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너는...나보고 여기서 멈추지 말라는 것이냐?"
황소는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하늘 높이 재가 되어 승천하듯 떠났다.
성녀를 제압했다. 나의 형제를 떠나보냈다.
그러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황소는 말하는 듯 했다. 내가 아직 해야하는 것이 있지 않냐고.
"...륜, 넵튜뉴스를 데려와다오."
"주인님…."
"어서."
내 지시에 륜은 넵튜뉴스를 데리고 섰다.
안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심지어 신성력으로 회복까지 했는지 피떡이 되었던 얼굴이 사라진 성녀가 넵튜뉴스의 안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가자."
나는 륜과 함께 신전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외벽을 기어오르듯 달렸고, 우리는 금방 신전의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었다.
여신 교단의 성지, 아크 생텀의 꼭대기.
백악의 거성보다 높은 신전의 꼭대기 위에서, 나는 넵튜뉴스 속에 있는 성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휘릭.
성녀는 바로 몸이 뒤집혔다.
어느새 내가 신전의 벽을 등반하면서 시선이 끌렸는지, 몇몇 군단의 병사들과 여신교단의 병사들이 내 쪽으로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후우."
나는 속에서 차오르는 울분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걸 나의 목청껏, 온 힘을 다해 사방으로 외쳤다.
"들으라, 인류여-----!!"
저 하늘 높이 나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게,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나, 라스푸틴이 성녀를 붙잡았도다! 여신의 뜻을 곡해하고 왜곡하는 존재를 사로잡았나니!"
트랄은, 그는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내가 꼭 해야하는 것을 위해.
"항복하라, 여신 교단이여! 우리, 마왕군의 승리다------!!"
나는 하늘 높이, 승전보를 울렸다.
* * *
성기사, 드르디 어라스트는 보았다.
아크 생텀의 꼭대기에 올라가있는 오크의 모습을.
그리고 그의 손에 잡혀있는 성녀의 모습을.
"아아…."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도 목숨을 걸고 지켰어야 할, 여신 교단의 마지막 성녀가 마왕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 안 돼…."
드르디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냈다.
주변에는 자신을 억제하려고 여러 블러드 엘프들이 몸으로 누르고 있었으나, 드르디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신전을 향해 나아갔다.
"내가, 내가 지켜야 해…!"
"크윽! 막아!"
마왕군은 성기사들을 억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즉사할 정도가 아니면 다시 부활하고 재생한다는 것을 알기에, 마왕군은 성기사들이 일어나지 못하게끔 억제하는데 집중했다.
끼이익, 끼이익.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사명감에 찬 성기사의 발걸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면에서 막아세우면 신성력에 화상을 입고, 밧줄을 엮어 당기자니 신성력의 힘에 오히려 딸려갈 뿐이었다.
"성녀시여…. 여신이시여…!"
아크 생텀이 무너지는 순간, 여신 교단은 끝이다.
신의 섭리는 마왕군에 의해 철저히 유린될 것이며, 결국 인류는 파멸할 것이다!
"아아…! 안 돼…!"
"형제여!"
순간, 드르디는 눈앞을 가로막는 존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는…? 분명 5지구에서…?"
"미안하네, 형제여! 하지만 깨어나게! 진실을, 목도하는 것일세!"
변절한 성기사는 드르디를 향해 성수를 끼얹었다. 차가운 기운이 머리에서 흘러내렸고, 드르디는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보았다.
드높은 하늘.
휘황찬란한 신전의 안, 여신께서 앉아야 할 곳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아아…!"
그녀는, 천사는 여신이 아니었다. 지상에 신성력을 뿌리며 인간을 사랑하는 천사는 결코 여신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박애가 없었고, 편애만 있을 뿐이었다.
단지 지금까지 인류만이 신의 사랑을 독차지해왔을 뿐.
"아아…! 나는, 도대체…!"
여신은 이 땅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존재였다.
인간만이 여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인류의 착각이었다.
인간을 사랑한 건 여신이 아니라, 그저 여신처럼 행세를 하는 한 명의 천사였음을 보고 말았다.
자신의 힘이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 그 근원을 알아채고 말았다.
"여신이시여…!"
드르디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아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고 참회하며, 동시에 기도를 올렸다.
"당신의 이름을 참칭한 이들에게...천벌을…!"
* * *
저벅, 저벅, 저벅.
신전은 마왕군의 군화로 더럽혀졌다. 온통 은빛만이 가득한 곳에는 검은 물결이 차올랐다.
"막아라! 저들은 이단이다!"
천사 한 명이 신전 안으로 들어오는 마왕군을 향해 창을 겨눴다. 하지만 다른 천사들, 특히 날개의 수가 적은 천사들은 하나 둘 눈치를 보며 창을 들기를 주저했다.
"이단이라."
흑발의 청년은 잿빛 머리칼의 여인을 품에 안고 당당히 걸었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보좌하는 온갖 마족들이 무기를 앞으로 겨누고 있었고, 그 뒤로 여러 천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왕이 여신을 안고, 마족과 천사들을 이끌고 신전에 들어오는 기이한 상황.
어째서 이런 일이 된 것일까. 마왕군의 침입을 막으려는 천사들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저벅, 저벅.
길이 좌우로 열렸다. 여신이 앉아야 할 옥좌에는 13쌍의 날개를 가진 대천사가 앉아있었다.
"가브리엘은 어디에 있지?"
"그녀는 이 속에 있다."
붉은 머리의 대천사는 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리며 옥좌에서 다리를 꼬았다.
"불경하구나."
"누가 감히 나를 불경하다하느냐. 마왕이여."
"...크, 흐흐. 그래. 나는 마왕이지. 이곳에서는 절대로 너를 이길 수 없는 마계의 존재. 하지만...느껴지지 않느냐?"
솔로몬은 아래를 가리켰다.
"너희들의 힘의 원천이, 신앙이 사라지고 있음을."
"뭐…?"
화륵.
아크 생텀의 신전 위.
아아아아아악-------!!
하늘 높이 치솟은 첨탐의 위에서, 붉은 화마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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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