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회
458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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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세계가 멈췄다. 고통은 모두 사라지고, 내 눈앞에는 온통 회색빛의 세상으로 뒤바뀌어있었다.
"이계의 존재여."
검은 형상이 내게 물었다.
"힘을 원하느냐?"
"무슨 힘?"
"난국을 타개할 힘."
검은 형상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손을 잡아라. 그렇다면 저자를 물리칠 수 있다."
"그 대가는?"
"네 영혼."
악마의 제안이다. 형제를 살리기 위해 나의 영혼을 바쳐야 한다?
"......."
"갈등하겠지. 그러나 해야한다. 너는 네 형제를 구하고 싶거든, 응당 너 스스로를 바쳐야 한다."
나를 희생한다?
내 목숨이 아니라, 내 '영혼'을 희생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내 군단은 어떻게 되지?"
"......."
검은 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트랄은 소중한 존재다. 하지만 군단 또한 내게 버릴 수 없는 존재다. 내가 곧 군단이며, 내가 곧 라스토피아다."
"트랄을 버리겠다는 건가?"
"아니!"
나는 회색으로 물든 신성력의 결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전히 단단한 철벽처럼 꼼짝도 하지 않지만, 벽은 언젠가 허물어지기 마련.
"죽을 각오로 한다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터!"
"힘이 부족해서 여신을 찾지 않았나?"
"여신을 찾았지! 하지만 여신의 힘을 바란 건 아니다!"
나는 선후관계를 분명히 했다.
"기도했을 뿐이다! 여신에게! 그리고 믿을 뿐이다! 여신이 만약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분명 성녀가 아니라 나를 지지할 거라고!"
"어째서?"
"저 년의 행위에는 사랑이 없다!"
쾅! 쾅쾅!
"단순히 인간이 성교를 하여 번식을 하는 거라면 짐승과 다름없지! 그렇다면 진작에 온갖 동식물들도 신성력을 깨우쳤을 터!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신성력을 각성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다른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사랑을 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적 감수성이 존재할까?
"사랑이 아닌 필요에 의해 태어나는 아이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아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군."
검은 형상은 점차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성욕이 아니라 사랑을 외칠 줄이야."
"너…?"
성녀를 보았기 때문일까. 나는 잊고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나를 그 때...인도했던…?"
"나는 너를 지금까지 지켜봐왔다. 때로는 너를 죽이는 칼날로서, 때로는 너를 보호하는 힘으로서, 때로는 네 속에 흐르는 젖으로서."
"설마…?"
"나의 가디언, 나의 용사, 외계에서 와서 오크로 태어난 인간이여."
신은 말했다.
"그대의 사랑은 종잡을 수 없으나, 그대가 바라는 것은 알겠노라."
그는 내게 손을 뻗었다. 회색으로 물든 세계에서, 점차 은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또한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내 상식이 오크가 되면서 변했듯, 그 또한 정장의 '저승사자'라는 모습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라스푸틴. 내 이면의 용사여."
"설마…?"
은발의 여인은 나를 향해 슬픈 미소를 지었다.
"기적을 일으켜라."
"!!"
여인의 손이 내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답했다.
"여신의...이름으로."
"그래."
여인은, 여신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신이, 나의 반면이 선택한 너라면, 분명 이 세상을 능히 이끌어나갈 수 있을 터."
"설마...영혼이라는 대가가…?"
"이 힘을 받는 순간, 너는 이 세계에 종속될 것이다. 저것처럼...돌아갈 수 없을테지."
여신은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세상을 위해 네 영혼을 바치겠느냐?"
이것은 악마의 속삭임인가, 아니면 신의 명령인가.
"......좋다."
"그래."
신이라고도 할 수 있고, 악마라고도 할 수 있는 자.
"네 영혼은, 나의 것이다."
나는, 이 세계의 것이 되었다.
* * *
"......."
잿빛 머리칼이 된 여인은 자신의 머리에 흐드러진 은빛 머리칼을 붙잡았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여, 여신님?! 큰일났습니다!"
"........"
여신이라 불린 여인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당황한 천사들이 급히 들어와, 또다시 당황하는 얼굴이 가득했다.
"여신...님?"
"서, 설마...!"
"마계와의 연결을 막는 대결계가 사라진 것이...!"
"......."
잿빛 여인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이곳은 곧 지옥이 될 터.
[들으라, 여신이여.]
하늘이 열린다. 그곳에는 검은 안개가 자욱히 깔렸고, 노란 눈동자를 반짝이는 거대한 마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대로. 너를 범하고 나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솔로몬...."
잿빛 여인은 터벅터벅 앞으로 나아가 두 팔을 벌렸다.
"부디, 나 하나로 끝내주지 않겠습니까?"
[좋다. 나는 너만 범하면 되니. 하지만....]
마룡, 솔로몬은 입을 사납게 벌렸다.
[네 천사들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지 않구나!]
"여신님을 지켜라-----!!"
곧.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악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사아아-----!!
하늘이 열린다. 나를 향해 은빛의 폭격이 내려앉고, 나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외쳤다.
"여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이곳에 있나니!"
"푸하하! 이제와서 찾는게 여...신...?"
성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은빛은 나를 향해 쇄도하고, 나를 정확히 비췄다.
"뭐, 뭐야! 여기는 지하인데...?!"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빛이 나를 향해 스며든다. 나는 그 빛을 받으며 내 몸을 회복했다.
오크가, 마족이 신성력의 가호를 받는다. 나의 몸은 신성력의 힘에 의해 회복되었다. 이전까지 나를 태우던 신성력은 나를 치유하는 빛이 되었다.
"말도 안 돼...!"
"왜 안 되겠나."
나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신성력의 결계는 여전히 나를 거부하고 있지만, 적어도 내 몸을 태우는 불꽃으로 승화하지는 않았다.
꾸우욱.
나는 결계를 눌렀다. 손으로 그저 누르고, 또 눌렀다. 그러자 신성력의 결계는 안으로 쑥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계는 마치 공기가 가득 찬 풍선을 누르는 것마냥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개같은 짓이야?!"
"정의를 집행하는 것일 뿐이다."
신성력은 이제 더이상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몸에 깃든 할레오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시, 신성력까지?! 지, 진정한 용사셨군요!!]
마-신의 힘과 여신의 힘을 동시에 가지게 된 나. 이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여신의 부름을 받았기에.
내가 마신의 선택을 받았기에.
나는 여신과 마신이 동시에 선택한 존재였다. 이계의 죽은 자를 이 세상에 소환하는 힘은 분명 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힘이 넘쳐흐르고 있어요! 지금까지 사용하지 못했던 힘이...! 아아, 마력과 신성력이 경계를 넘어서 하나로 섞이고 있어...!]
내 손 위에 할레오의 힘이, 성검 레오의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내 손은 사자처럼 생겨났고, 날카롭게 벼려진 손톱은 성녀가 펼친 신성력의 결계와 마찬가지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드디어 제 진면목을 보여줄...! 아, 안 돼요! 그래도 신성력이 너무 두꺼워요!]
'여기서부터는 힘싸움이니까.'
나는 신성력의 결계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뜯었다. 뜯기지 않은 비닐을 뜯는 것마냥 손아귀에 힘이들어갔으나, 나는 모든 힘을 쥐어짜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트랄! 거기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이 결계를 찢어버리고, 반드시 너를 구하겠다!"
"형제여...!"
"트랄, 진짜 조금만 더 참아라!"
나는 앞으로 전신을 뻗었다. 겹겹이 쌓인 랩을 강제로 뚫어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는 모든 힘을 다해 결계 안으로 손을 뻗었다.
"돼지같은 오크로 태어나 고통을 받았던 나날! 너는 내게 먼저 손을 뻗었다! 포르네우스 던전에서 지옥과도 같던 나날 속에서, 너는 내게 구원이었다!"
"뭐, 뭐하자는 거야! 지금 둘이서 게이물찍어?!"
"트랄! 넌 나의 빛이다!"
똥통과도 같은 지옥 속에서 나를 구원해준 한 줄기 빛.
"군단에는 네가 필요해! 네가 그 여자에게 싸는 순간, 너는 죽어버리고 말 거다!"
"큭...!"
"개새끼야! 지금 무슨 개소리야!"
성녀는 나와 트랄을 비웃으며 허리를 격렬히 흔들었다.
"고작 섹스가지고 죽을 리가 없잖아, 멍청아!"
"네 명예가, 오늘의 굴욕이 너를 평생동안 괴롭힐테지!"
트랄은 명예를 아는 전사이며, 동시에 용사다. 그런 트랄이 자신이 싸버린 것 때문에 평생동안 괴로워하며 지낸다?
"오늘 네가 당한 수치가, 네 자존심을 죽여 너를 죽이게 될 것이다!"
자살.
트랄은 자살당할 것이다. 성녀에 의해.
"개, 개소리 집어치워! 사람이 고작 그런 이유로 죽을 이유가 없잖아!"
"너같은 씨발년은 모르겠지!"
"뭐, 뭐?! 무, 무슨 년?!"
성녀이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그 사이 트랄을 향해, 트랄을 구속하고 있는 신성력의 구속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트랄! 나는!"
우둑, 우두둑.
나는 신성력의 밧줄을 붙잡았다. 신성력에 신성력이 덧씌워지는 순간부터, 이미 신성력은 그저 나를 가로막은 옷더미에 불과했다.
"라스토피아에서!"
트랄이 살아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나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살고 싶어!"
우둑, 우두둑. 밧줄이 끊어진다. 그리고-
"너와!!"
난, 트랄을 구속한 밧줄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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