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회
438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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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지구는 멸망했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도시를 지키던 사제와 성기사들은 '였던 것'이 되고 말았다.
"아쉽구나, 아쉬워."
알짜배기들은 모조리 챙겼지만, 도시 내부의 재산이나 수만의 노예들을 놓친 건 정말로 아쉬웠다.
우리 군단이 너무 강력한 바람에 많은 인간들은 건물에 파묻혀 시체가 되었고, 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재활용이 불가능했다.
소각.
그래서 우리는 도시를 소각했다. 도시였던 흔적만 남을 수 있게 불태웠고, 우리는 여신교단의 본거지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만, 아쉽게도 곧장 진격하지는 못했다. 아니, 않았다.
'우리만 개고생을 할 수 없지.'
아무리 우리 군단이 마왕군 내에서 솔선수범하는 성실한 모범생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우리만 개고생을 하겠는가?
우리의 뒤통수를 칠 놈들도 분명 있을테고, 잠재적인 적들도 넘쳐나는 상황.
예전처럼 모든 전력을 여신교단에 몰아넣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적당한 전력을 유지하며 적당한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바로 대화의 수단.
"흐흐흐, 드디어 완성되었다."
나는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아주 특별한 물건을 들어올렸다.
지옥용광로에서 드래곤 스킨을 녹여만든 검은 알!
타조의 알만큼 크기가 큰 알은 안에 액체가 가득 담겨있는 듯 찰랑거렸다.
"양산에 성공해서 다행이다."
캉, 캉, 캉!!
나는 라인의 던전 내부에 흐르는 기계장치들을 향해 두 팔 벌려 환호했다.
"아아, 이곳이야말로 공장이지."
자고로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는 세상이라면 조만간 공업이 발달하기 마련.
때마침 우리가 얻어낸 아몬의 던전은 알로켄 던전과는 다른 각종 특이한 암석과 광석들이 차고 넘쳤다.
그리고 그걸 녹여내릴 거뜬한 열도 차고 넘쳤다.
지옥대장간.
던전마다 하나씩 설치가 가능한 던전 자체 대장간으로, 우리는 지옥대장장이를 용암의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제물로 삼아 새로운 용광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공장으로 만들어냈다.
컨베이어벨트는 골렘들이 24시간 움직이며 반자동으로 돌아가고,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형틀을 이용해 미노타우르스들이 망치를 내리치며 찍어냈다.
거기에 라스-나인 일부를 동원해 입에서 불꽃을 뿜어내니, 마족들의 마나로 돌아가는 공장이 얼추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단 하나.
이 알.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이 알이야말로 우리가 여신교단을 쓰러뜨리기 위한 비수로 작용할 것이다.
바로, 동맹이라는 이름의 비수.
"조별과제 무임승차는 못 참지."
* * *
6위 던전.
'발레포르'라는 던전 주인의 이름을 가진 마족은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의 방문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두 준비는 되었지?"
"""예!!"""
발레포르의 던전에는 고블린들이 가득했다. 발레포르는 왕관과 망토를 두른 고블린이었고, 고블린들의 '왕'이었다.
"그럼 문을 열어라."
끼이이익.
왕의 지시에 기사 고블린들은 문을 좌우로 열어젖혔다. 그러자 두 명의 여인이 드레스를 입은 채 핏빛처럼 붉은 융단을 밟으며 고블린 왕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네, 발레포르."
"......바르바토스라고? 어떻게 된 일이지?"
"마르바스였지만 자리를 바쳤지. 새로운 주인님께. 이쪽은 그레모리."
"만나뵙게되어 반가워요, 고블린 엠페러."
엠페러. 황제.
그렇다. 왕처럼 보이는 이 왜소한 고블린은 실은 고블린 '황제'다.
"그레모리라고…? 점점 이해할 수 없는데. 바르바-"
"마르바스라고 불러도 괜찮아. 어차피 주인도 딱히 그런 건 신경 안 쓰니까."
"...그래. 마르바스. 정말 네가 패배한 것이 맞나?"
"흡수합병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 근데 패배한 것도 맞아.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그레모리가 스크롤 하나를 펼치며 앞으로 내밀엇다.
"우리랑 동맹을 맺죠."
"우리?"
"라스토피아. 위대하신 라스푸틴 안드라스 아스타로트 바르바토스 마르바스 님의 왕국이십니다."
"......대놓고 자기 힘을 과시하는군, 새로운 마르바스. 고블린들이 얼마나 무서운 종족인지 알면 이런 식으로 위세를 부리지 못할텐데."
"고블린의 무서움은 알지만, 고블린보다 제 주인님이 훨씬 더 무섭지요."
"키힉. 그건 두고봐야 알지."
발레포르는 지팡이를 가볍게 땅에 두드렸다.
"동맹이라. 우리가 라스토피아와 동맹을 맺어서 좋을 게 있나?"
"여신 교단을 상대로 함께 싸운다는 대의에 함께할 수 있다는 거?"
"같은 마왕군 아닙니까?"
"하! 같은 마왕군끼리 그렇게 서로를 많이 잡아먹었나."
발레포르는 낄낄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농담은 그만. 여신교단을 무너뜨린다는 제안에는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동맹이니 뭐니 하면서 같이 엮이는 건 사양이다. 고블린에게는 고블린만의 방식이 있다."
"라스푸틴 님의 성의입니다."
그레모리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마법진 안으로 손을 뻗자, 주변의 고블린들이 일제히 경계하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그만."
발레포르가 손을 들어올리자 고블린들은 일제히 무기를 내렸다. 한 마디에 명령을 따르는 강력한 통솔력에 그레모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신성란이에요."
"...호오, 내가 아는 신성란과는 다른데?"
"진가는 소환진에 올렸을 때 알게 되겠죠."
쿵!
그레모리가 바닥에 신성란을 내려놓았다. 발레포르는 턱짓으로 부하 고블린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고블린들은 뒤뚱거리며 신성란을 소환진 위에 올렸다.
"......흠?"
허공에 손을 두드리던 발레포르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신성란 하나에 4성 성기사 하나의 신성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죠."
"갓 잡은 따끈따끈한 신성력이야. 어때, 구미가 당기지?"
"이, 이걸 성의라고 준 거라고?"
발레포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성의로 먹고 튈만한 물건이 아닌데? 원하는 게 뭐지?"
"역시 발레포르. 유일 고블린. 손익계산이 정말 빠르네."
"라스푸틴께서는 그저 동맹을 바라실 뿐입니다. 여신교단을 상대로 하는 동맹을."
"흠…. 그저 동맹만을 체결한다는 건가."
발레포르는 옥좌에서 다리를 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동맹을 맺은 자의 뒤통수를 친 전적이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럴 리가요. 저희가요?"
"나는 모든 고블린들의 황제다. 고블린들은 던전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지. 내가 아무것도 모를 것 같나?"
"...우리가 누군가를 배신했다면, 그건 배신당할 짓을 한 거기 때문이죠."
발레포르와 그레모리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동맹이 의미가 없어진다면 나도 엿을 먹이고 죽이려고 하겠군."
"하지만 가치가 있다면 동맹이 계속 이어지겠죠."
"자, 자. 싸우지 말고.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니야. 혹시 알아? 라스푸틴이 차기 마왕의 자리를 이어받을지."
"...과연. 너는 거기에 걸었나?"
발레포르는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갓슬라임, 바알이 가장 마왕에 가깝다는 생각은 없고?"
"이쪽에도 신에 버금가는 반신이 좀 있거든?"
"바알은 규격 외라는 걸 알텐데."
"여기는 상식을 초월하거든."
"...키히힛."
발레포르는 그레모리가 내민 동맹 제안서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부욱, 부욱.
손톱을 세워 아주 가볍게 찢어버렸다.
"......동맹 제안을 거절한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지?"
"물론. 성의는 잘 받았다고 전해다오. 꺼---억."
발레포르는 비릿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동맹을 거절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별 거 없다. 동맹을 맺는다고 한들, 라스토피아에는 고블린이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지."
발레포르의 말에 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푸틴은 아주 오래전부터 고블린을 배척하더군. 본인이 오크라서 그런가, 아니면 그레모리 네가 고블린과 인연이 깊었기 때문인가?"
"...닥치지?"
"흐흐, 어느쪽이든 나는 관계없다 이거다. 신성란을 되찾고 싶다고? 그러면...힘으로 가져가라."
사아아.
소환진이 은빛으로 반짝이자, 신성란은 순식간에 껍질이 녹아내리며 아래로 사그라들었다.
위이이잉!!
그리고 은빛의 반짝임과 함께 멋드러진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레포르는 소환진에서 나온 물건을 허리에 둘렀다.
"...오오, 과연.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이계의 물건이라는 건가."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후회는 라스푸틴이 해야지."
발레포르는 혀를 앞으로 내밀며 두 여인을 조롱했다.
"바알을 제치고 마왕이 되겠다고? 개소리. 나부터 제쳐봐라. 크흐흐."
"좋아. 근데 그거 알아둬."
"우리, 바알이랑 동맹이다?"
"......."
처음으로 발레포르의 표정에 금이갔다.
"1위부터 4위까지는 그래도 서로 구두 불가침 약속을 받았는데, 역시 고블린이라 좀생이네."
"어쩌나. 너 이제 좆됐다."
고오오오.
두 여인의 몸에 마법진이 펼쳐졌다.
"협상 파토난 사절단이 무슨 말을 또 하겠어?"
"선전포고야."
사락!
두 여인을 감싼 마법진은 순식간에 둘을 이공간으로 날려보냈다.
"...흥."
동맹을 버리고 독자 노선을 타기로 한 발레포르는 입꼬리를 이죽거렸다.
"고블린의 진정한 무서움을 보여줘야겠군. ...빠르긴 더럽게 빨라. 온다."
쟁탈전.
"전원 전투 준-"
솨아아아아----
"......?"
금빛이 반짝이니 고블린 수백이 일격에 죽었다.
"전술 에일라 투하."
나는 나와의 동맹을 거부한 적 던전에 6성 용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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