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0회
43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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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거인.
보스룸은 넓은 공동이었다. 드래곤의 레어를 방불케하는 곳으로, 나는 이 던전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몬을 통해 대충 감을 잡았다.
"젠장, 레드드래곤이었어?"
[크하하하하!]
아몬이 입은 갑주는 드래곤스킨이었다. 상반신만 남아 내부에서 불꽃이 활활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두상부터 아래 흉상까지 모두 드래곤의 형태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군단에서도 드래곤 스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만큼 모를 수가 없었다.
"보통은 인간이 소환하거나 그러지 않나?!"
[인간이었지! 폴리모프한 드래곤!]
쿠--웅!
내가 있던 자리에 아몬의 불꽃주먹이 떨어졌다. 나는 놈의 주먹을 피해 옆으로 크게 뛰었다.
"젠장! 주먹만 내던지는게 어디있어!"
[여기있다!]
아몬의 몸은 갑주와 에테르체가 제각기 떨어져서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사실상 팔 부분은 마음대로 날라다니는 주먹이라고 봐도 무방했고, 덕분에 나는 공격을 피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팔은 두 개니까.
"주인님, 저도 내려서 피할게요!"
"아니다. 지금은 내가 안고 피하는게 맞아."
륜은 자신이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따로 움직이기를 원했지만, 륜 정도의 무게는 전혀 방해가 아니다.
그리고 륜이 내게 붙어있음으로써 나는 아몬의 공격을 능동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륜에게는 물의 정령왕이 제대로 가호를 내려주고 있으니까.
여차하면 륜 실드를 쓸 수도 있는 거지만, 내 양심상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륜을 데리고 튀기만 한다.'
기회를 엿보며 적의 전력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파악하는 것이 공략의 기본. 나는 마-신 파워를 전력으로 끌어올려 피하기에 집중했다.
[언제까지 피할 것이냐!]
"그러는 너야말로 언제 맞출래?"
[이 놈이!]
아몬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위험을 직감하고 주변을 살폈다.
몸을 엄폐할 곳은 없다. 하지만 나의 위험감지센서는 싸우고 있는 필드 전체가 위험해질 거라고 맹렬히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 피해봐라, 이 땅개야!]
아몬은 아래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는-
[푸화아아악!]
입에서 끈적거리는 용암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토해내기 시작했다. 질척거리는 점액처럼 흘러내리는 용암은 던전의 바닥에 닿아 땅을 녹여내리기 시작했고, 서서히 쌓이듯 고여 옆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저거 설마!"
"그래. 땅을 아예 지워버리려고 하는구나."
나는 정령력에 면역을 가지고 있는 거지, 용암에 저항력을 가진 게 아니다. 당연히 용암에 떨어지면 몸부터 녹아내리고, 뼈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역시 10위권 즈음 되면 다들 한 가닥 하는 놈들이라니까."
레드 드래곤을 먹어치운 불의 정령왕이라. 다루는 힘을 봐선 마그마의 정령왕이라고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다고 나와 놈 사이에 전력에 있어 상하관계가 형성되어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공격을 피하는 방법이 상책이었다.
타개책은 하나.
"오브젝트!"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보스룸에 장판기가 깔리면 피하거나 쳐맞거나, 그도 아니면 당연히 공중에 달린 발판 등을 이용해 피하면 된다.
하지만 이곳은 아몬의 던전이고, 아몬이 자신의 던전에 침입한 존재에 대해 편의를 봐줄 존재도 아니다. 침입자가 아래에서 끈적하게 채워지는 용암을 피하려면 알아서 공격을 피해야했다.
[피할 생각 마라! 네놈은 독안에 든 쥐다!]
"그건 내가 할 소리고."
나는 보스룸 입구까지 달렸다. 그리고는 보스룸 철문 주변을 빠르게 부순 다음, 보스룸의 철문을 부수고 당겼다.
"가자, 할레오!"
[뭐, 뭣...?]
할레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발을 디딜 공간을 찾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쿵! 쿠궁!
나는 보스룸의 철문을 뜯어 땅에 비스듬히 박았다. 마치 서핑보드를 타기 전에 파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두 발을 땅에 디딘 채 용암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나는 보스룸의 철문 위로 뛰어올랐다. 용암이 양옆으로 튀었으나, 내 붉은 문신의 힘이 깃든 보스룸의 철문은 용암에도 끄떡 없이 내 몸을 지탱했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사기치지 마라!]
"전술적 활용이라고 해주겠나?!"
발판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 나는 두 개의 철문을 용암위를 타고 다니는 서핑보드로 만들었다.
보스룸의 문이 열린 이상 철문은 단순한 오브젝트에 불과하다. 그걸 뜯어서 내 마음대로 쓰는 걸 막으려면 뜯지 못하게 막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미 뜯었네?
"으하하하하!"
나는 용암 위를 미끄러지듯 발을 움직였다. 설원 위를 지나는 설피처럼, 나는 용암을 철문으로 디디고 아몬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륜, 합체다!"
"네!"
륜은 바로 내 몸 위로 뛰어올라 목마를 탔다. 탄탄한 허벅지가 내 얼굴을 양옆에서 지탱했고, 나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으며 지지대가 되었다.
"쏴!"
파바바밧.
륜의 활에는 평소의 바람화살 대신 푸른 물줄기가 화살처럼 걸려있었다. 물의 정령왕이 진심으로 빚어낸 물화살에는 불의 정령왕에 대한 진득한 살의가 깃들어있었다.
- 나만 당할 수 없지.
넵튜뉴스는 자신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불의 정령왕 또한 당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소 어이가 없어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넵튜뉴스가 지금 내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생각한다면 충분히 봐줄만했다.
'오히려 좋아.'
넵튜뉴스도 이제 슬슬 라스를 깨달아가는 단계였고, 주변에 라스를 포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라스으으으으!"
나는 용암 위를 스케이트보드 타듯 천천히 움직였다. 중간중간 용암의 불꽃이 튀지 않도록, 보스룸의 문 사이를 딱 붙이며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이 놈! 영악한 놈이로구나! 마왕님의 시스템을 이용하다니!]
"원래 이용하라고 있는 건 죄다 이용해야하는 법인 거 모르냐? 보스룸의 문을 달아놓은 놈이 잘못이지! 나는 보스룸에 방문 따위 없다!"
사랑은 열린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진정한 라스를 위해서라면 모두에게 개방되어있는 문이 필요하다.
"아몬! 순순히 우리 분노의 군단이 되어라! 지금이라면 여성체로 세 번 박는 거로 용서해주마!"
[감히 나를 여성체로 만들겠다?! 어이가 없군!]
아몬은 다시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리며 불꽃을 토해냈다. 용암과는 다른 진짜 불꽃이라 나는 괜히 걱정되었지만....
"륜!"
촤아아.
륜의 서클렛으로부터 빠져나온 거대한 물의 방벽에 아몬이 쏘아낸 불꽃 숨결과 맞닿아 거대한 수증기를 일으켰다. 아몬도 충분히 강한 존재지만, 넵튜뉴스도 충분히 강한 존재다.
쿵, 쿵, 쿵.
륜의 몸에서 빠져나온 넵튜뉴스가 서서히 밖으로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디디고 선 방패의 위에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그 모습이 마치 여인의 잘록한 허리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너만 변신하냐?! 우리도 변신한다!"
[넵튜뉴스! 이 미친 놈! 하이엘프 여왕의 계약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오크 따위에게 굴복을 하는 것이냐!]
아몬은 넵튜뉴스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그게 마치 세뇌당한 옛 동료를 향해 외치는 정의로운 용사의 목소리와도 같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몬이 뭐라고 씨부리든간에, 넵튜뉴스는 거대한 워터 앨리멘탈로서의 모습을 갖췄다. 그리고 단순히 인간형의 모습이 아닌, 완벽한 미녀가 허리부터 내 위로 우뚝 솟아있었다.
푸른 물결의 여인은 륜의 외형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다행히 가슴 부분의 유두는 형상화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자고로 불속성 잡는건 물속성인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국룰이지. 이몬! 네놈의 타입을 원망해라! 너는 넵튜뉴스에게 진다!"
[흥! 정령들의 대결은 결국 계약자의 힘에 따라 갈리는 법! 아무리 여신의 선택을 받은 하이엘프 여왕이라고 한들, 성체 레드드래곤의 힘은 이길 수 없다!]
콰아아앙----!!
아몬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하늘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그의 양손에 지옥의 불길과도 같은 불꽃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그 때와 같은 굴욕을 겪을 수 없다! 나는 노예가 되지 않는다!]
"...포-스 이 망할 년."
아몬은 노예가 되기를 극구 거부했다. 아마도 포-스가 동원한 데스트랄에 의한 트라우마가 그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리라.
'솔직히 나같아도 좆같겠다.'
레드드래곤을 잡아먹고 던전주인이 되어 중간계에서 재미 좀 보려고 하니까, 무슨 시체 하나 들고와서 깽판을 치는 빈유 은갈치 때문에 굴욕이란 굴욕은 전부 봤을테지! 내가 잘 안다.
'하지만 내게 복종하지 않는 건 선 넘었지.'
라스를 깨우치지 않은 자에게 절망을. 나는 목마를 태우고 있던 륜의 허벅지를 들어올리며 아래로 잡아내렸다.
"륜, 2단 합체다!"
"...네!"
[뭐, 뭣...?!]
아몬은 불꽃 얼굴에 당황이 느껴질 정도로 크게 출렁거렸다. 공격을 하기 위해 이글거리던 한 손으로 눈을 가릴 정도로 그는 당황했다.
"흐하하! 순진한 놈, 라스를 부끄러워하지 마라!"
찌걱.
나는 륜과 2단합체를 했다. 그리고 내 손을 타고 흘러들어간 붉은 기운은 그녀의 서클렛에 닿아 붉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아아아아앙----!!]
강렬한 쾌감의 비명과 함께, 넵튜뉴스의 푸른 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 전체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변태같은 놈! 자기 여인을 어찌 다른 이의 앞에서 그렇게 다리를 벌리고 범할 수 있단 말이더냐!]
"오우, 순진한 동정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런데 너...뭔가 착각하는 듯 한데."
나는 륜과 입술을 맞추며 놈에게 중지를 세웠다.
"너도 이렇게 될 운명이란다."
[꺄아아아앙!!]
넵튜뉴스는 교성과 함께, 아몬의 뺨을 후려쳤다.
푸화아아아악----!!
거대한 수증기가 일며, 아몬의 몸이 순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륜과 사랑을 나누며, 넵튜뉴스에게 마-신 파워를 불어넣었다.
요정왕의 가호.
마-신 파워.
그리고 사랑의 힘까지 부여받은 물의 정령왕에게 패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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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꽃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