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9회
420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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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땅이 흔들렸다.
단지 그렇게 느꼈다. 마왕군의 영토이니 지하에서 이상한 것이 얼마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고 직감했고,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지룡 따위의 마수에 대해 충분히 대비했다.
하지만 진동의 주인이 누군지 알게 된 순간, 드워프들은 모두 경악했다.
전신을 가린 검은 로브는 복부 근처부터 양 다리처럼 좌우로 갈라지는 형태였다. 마치 고간에 달린 무언가를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듯한 형태였다.
"라스푸틴이다!!"
라스푸틴!
조디악 왕국을 무너뜨리고 라스토피아를 세운 분노의 군단장!
이름 석자 만으로도 아랫배가 떨려오게 만드는, 여신교단의 공적이자 인류의 재앙!
"나를 아느냐?"
오크는 송곳니를 사납게 들어올리며 무기를 겨눴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라스푸틴의 등장에 긴장했다.
두근, 두근.
라스푸틴이 들어올린 무기는 기다란 봉에 도끼날이 좌우로 달린 형태였다. 붉은 문신이 기하학적 무늬로 반짝이는 도끼에는 막대한 힘과 마력이 느껴졌다.
절대적 강자.
드워프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혼자서 드워프 왕국의 전력을 상대로 나선 저 오크의 자만심이 결코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감히 내 동생을 잡아다가 정조대나 만드는 생산 노예로 써먹다니!"
드워프 장로 하나가 망가진 정조대 하나를 집어들었다. 안에는 멋드러진 장인의 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용서할 수 없다!"
"그건 내가 할 소리군. 장인이 만들어낸 정조대를 감히 망가뜨려?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천벌을 받는 건, 네 놈이다!!"
드워프 장로는 땅을 힘차게 달렸다. 풀플레이트 갑옷보다 더한 중갑을 착용한 그는 자신의 몸보다 더 커다란 해머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여신의 이름으로!"
드워프 장로의 해머에는 신성력이 깃들기 시작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은빛의 힘에 드워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어떤 마족도 신의 철퇴 앞에서는 무릎을 꿇으리라!
"신성력? 흐흐, 가챠 티켓이 여기있네?"
라스푸틴은 정체불명의 말과 함께 무기를 휘둘렀다. 쌍날도끼는 해머를 맞받아칠 것처럼 긴 궤적을 그렸다.
상대를 때리기 위한 거대한 해머와 베기 위한 도끼날이 부딪힌다? 드워프들은 해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 왕국을 무너뜨린 존재의 힘을 경시했다.
서걱-!
"고작 이 정도로?"
라스푸틴은 해머를 도끼날로 베어버렸다. 해머는 반으로 갈려진 것으로 모자라 해머를 움켜쥔 드워프 장로의 팔까지 함께 잘라버렸다.
"큭, 으아악!"
장로는 자신의 잘려나간 손목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라스푸틴은 단걸음에 뛰어 드워프 장로의 머리를 도끼면으로 내리찍었다.
"깡!"
"커헉…."
드워프 장로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리를 보호하는 신성력의 힘은 신성력의 보호막 통째로 머리와 함께 으깨졌다.
"이거 옮겨!"
라스푸틴은 드워프 장로를 요새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는 신성력을 가진 드워프를 붙잡은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흐하하! 신성력 있는 놈들아, 이 몸이 그런 쥐좆만한 신성력에 질 것 같으냐?!"
라스푸틴의 모욕에 드워프들 중 일부가 얼굴을 붉혔다. 드워프는 따로 사제라고 할만한 자들이 없었지만, 신성을 깨닫고 여신교단에 호의적인 이들이 분명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여신 운운하며 기도를 올리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여신께서 있던 신성력도 거두어가겠구나!"
라스푸틴은 그들을 향해 맹렬히 조롱을 퍼부었다.
"어차피 마왕님께 따먹힐 신 따위를 믿으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신성력을 가진 드워프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제히 전열 밖으로 뛰쳐나왔다. 신성을 깨달은 그들에게 있어 여신에 대한 욕은 자신이나 부모를 향한 욕보다 더 심한 욕이었다.
"신성모독이다!"
"그러는 너희야말로 신에 대한 모독이다!"
라스푸틴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드워프들을 상대로 높이 뛰어올랐다.
해머와 대검이 부딪히거나 무기가 서로 어긋났고, 단번에 드워프의 머리보다 더 높이 뛰어오른 라스푸틴은 도끼날을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나, 라스푸틴! 도끼 자국 메이커라고 하지!"
쿵!!
높이 뛰어오른 라스푸틴은 드워프들의 무기를 밟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단 일격에 드워프들의 투구에 달린 뿔이 뎅겅 잘려나갔고, 라스푸틴은 다시 도끼날을 세워 도끼면으로 드워프들의 머리를 후려쳤다.
깡, 깡, 깡, 깡!
드워프들은 모조리 맑은 소리와 함께 픽픽 쓰러졌다. 목뼈가 부러지거나 두개골이 부서진 경우는 양반이겠다 싶을 정도로, 라스푸틴은 드워프들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어차피 죽을 놈들에게 도끼자국을 만들어봐야 의미는 없겠지. 흐흐."
"혼자서 잘도 중얼거리는 구나, 이 미친 놈!"
또다른 드워프가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라스푸틴은 도끼를 옆으로 놓으며,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모닝스타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까----앙!
"느려."
라스푸틴의 건틀렛에 모닝스타가 붙잡혔다. 손등은 노출시켜놓고 손바닥은 드래곤 껍질과 비슷한 재질의 갑옷으로 덮은 라스푸틴은 씩 웃으며 모닝스타를 손으로 짖이겼다.
"이런 위험한 무기를 휘두르다니. 꼬맹이가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꼬맹이?! 이 건방진…!"
"나를 건방지다고 한 놈들은 모조리 죽었지. 하지만 너는 신성력이 없으니...유감이구나."
퍼억.
라스푸틴은 드워프를 수도로 기절시켰다.
"너는 암컷이 되어, 고간에 도끼자국이 박힐 것이다. 걱정말고 자고 있거라. 깨어난 뒤에는 드워프의 개념이 바뀌어있을테니."
라스푸틴은 키득거리며 도끼를 다시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자루를 위아래로 넓게 붙잡은 라스푸틴은 드워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신성력이 있는 자, 죽인다!"
라스푸틴은 드워프들을 죽이지 않았다. 대신 신성력이 있는 드워프만 철저히 죽였다.
베어 죽이고, 때려 죽이고, 발로 얼굴을 걷어차서 죽이고, 도끼날로 목을 뎅겅 잘라 죽이는 등 철저히 신성력을 가진 존재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키에에엑!
뒤에서 구울들이 뛰쳐나와 시체들을 집어들었다. 신성력을 가진 드워프들을 잡아들고 요새 안으로 도망쳤다.
그들의 몸에는 라스푸틴과 마찬가지로 붉은 문신이 반짝이고 있었다. 평범한 구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 배나 빠른 속도로 시체를 들고가는 통에 드워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드워프들이여! 요새를 넘어라!!"
묵묵히 라스푸틴을 지켜보고 있던 드워프 국왕이 드디어 드워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간악한 오크는 내가 상대하겠다!"
쿵, 쿵, 쿵!
국왕은 양손에 든 도끼를 움켜쥐고 앞으로 달렸다. 라스푸틴과 덩치차가 크게 나지 않는 그는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앞으로 달렸다.
"죽어라, 이 더러운 오크!"
국왕이 앞으로 망치를 내던짐과 동시에, 라스푸틴도 국왕을 향해 내달렸다.
"네놈을 죽여 대가리를 딴 다음, 내 딸의 묘비 위에 술잔으로 바칠 것이다!"
"나는 네놈을!"
라스푸틴은 국왕의 신성력 가득한 망치를 도끼로 쳐내며 사납게 웃었다.
"네놈을 여자로 만들어 보지를 따먹은 다음, 계곡에 술을 부어 쪽 빨아먹을 것이다!!"
카앙, 카앙, 카아앙----!!
망치와 도끼가 서로 부딪히며 파공성을 널리 일으켰다.
* * *
와아아아아!!
대규모 드워프 군단이 목책을 무너뜨렸다. 국왕이 라스푸틴과 일기토를 벌이는 사이, 국왕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요새를 점령하는데 집중했다.
키에엑!
구울은 망치 한 방에 망가졌다. 드워프들은 상상 이상으로 상대하기 쉬운 라스토피아의 언데드 병사들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한 왕국을 점령한 괴물들이다. 설마 이 정도로 약할까?
"장로, 저기!!"
드워프 장로들은 요새 안쪽의 무리를 가리켰다. 각진 장비로 전신을 가린 자들이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갑옷을 입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장로, 저건 설마?!"
"말로만 듣던 이계의 물건들!"
당대의 갑옷과는 전혀 다른, 움직이기에 다소 불편한게 아닐까 싶은 갑옷은 전신의 일부에 색칠된 유리같은 것이 박혀있었다.
위이잉.
그리고 그들의 풀페이스 투구에는 눈 부분이 가로로 길게 빛나기 시작했다.
[투항하라, 드워프들이여.]
최전방에 있던 중장비 전사의 목소리에 장로들은 무기를 놓칠 뻔 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고, 장로들과 드워프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로도페리 필리아!!"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 방어구는 무엇이냐!"
[아아, 이거?]
위이잉, 철컥.
안면을 보호하는 유리 부분이 사라지자, 전신갑옷 안에 있던 로도페리가 얼굴을 드러냈다.
"이계의 강화복."
다른 말로는, 강화전투복이라고 한다.
"선택해. 남자로 죽을래, 아니면 암컷으로 살래?"
"이...드워프들의 배반자!"
"아니. 배반이 아니야."
로도페리는 단호한 얼굴로 바이저를 내렸다.
"이건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야."
철컥, 철컥.
로도페리를 비롯한 강화복 드워프들의 손에 진압봉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마왕군에 빌붙은 배신자들을 비웃었다.
"하하, 그만한 무게를 지탱하는게 가능할 리가 없지!"
"장식으로 만드는 거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가능해! 최소한 마석 상급 몇 개는 때려박아야-"
고오오오.
하늘에서 붉은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화복 드워프들의 관절부위가 붉게 반짝였고, 외부 장갑에 붉은 문신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설마…."
"동력? 그런 거…."
로도페리는 진압봉을 힘껏 휘둘렀다.
"라스면 해결 돼!"
강화복의 하복부에는 음문이 새겨져있었고, 어디선가로부터 흘러들어온 마-신의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라스으으으으!!"
드워프와 드워프.
종족의 성별 정체성을 건 운명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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