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회
365일
나는 포르네우스를 무간지옥에 빠뜨렸다.
그리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시시포스로 만든 셈이다. 죽음을 향해 별이 내려가지만, 결국 별은 다시 바닥에 닿는 순간 채워지며 영원히 죽음에 이를 수 없다.
"주인님, 포르네우스의 육체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내버려둬. 자기가 라스토피아 공공재로 돌아가는 거 구경해야지."
여기서 내버려둬라는 말은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 아니다.
"플라우로스, 미안하다. 네게 쓰레기 처리를 맡게 해서."
뀨르릉.
"뭐? 내가 쓰레기라고 발언한 건 처음이라고? 그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가지고 놀아도 되냐고? 물론이지! 대신 죽이지만 마라. 2성일 때는 죽여도 되지만, 1성일 때는 절대 안 돼. 2성으로 진화시키고 나서 가지고 놀렴. 알겠니?"
뀨륵, 뀨릉.
무능하고 약한 포르네우스(★)는 플라우로스의 촉수에 의해 쉽게 망가질 수 있다. 그러니 한 번 죽어도 보험이 되는 포르네우스(★★)는 아무 문제가 없다.
덜렁, 덜렁.
촉수나무 위에는 사람 한 명이 축 늘어져있었다. 아둥바둥 거리다가 삶은 포기한 포르네우스는 죽기를 바라지만, 플라우로스의 배려에 의해 죽지는 않았다.
"역시 자동화는 플라우로스가 최고지. 아아, 이것은 매크로라고 하는 것이다."
복수는 내가 할만큼 했으니, 이제 포르네우스에 대한 고통의 연속은 짬을 때리면 된다. 나는 포르네우스를 향해 기도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나를 향해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복수는 끝났다.
누군가는 복수가 허망하고 아무 의미도 없다며,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자비와 용서를 베풀라고 했다.
'이게 자비고 용서지.'
영원히 죽이지 않는 것 만큼 자비로운 행위가 또 어디있을까? 나는 다시금 찔컥거리기 시작하는 소리를 뒤로한 채, 나의 던전으로 돌아왔다.
"샤이탄, 시각은?"
"이제 10분 남았습니다."
샤이탄은 내게 시스템을 통해 시계 하나를 비췄다. 그녀가 보인 홀로그램 시스템 창에는 23:49:18 이라는 수가 적혀있었다.
00:00:00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0분. 나는 내 앞에서 대기중인 은빛의 밀프, 아니 엘프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오너라, 바르바토스."
"예...주인님."
파이톤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조디악 왕국의 수호룡이자 8위 던전의 주인, 바르바토스.
아직은 그녀가 <바르바토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게 굴복하고 이름을 바치겠느냐?"
"...당신은 제게 자유를 주신 분. 기꺼이 굴복하겠습니다."
바르바토스는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엎드렸다. 안이 비치는 드레스 특성상, 사실상 알몸으로 오체투지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림> '바르바토스'의 이름을 가지시겠습니까?
"예."
지상에 얼마 남지 않은 드래곤이 내게 절을 하며 이름을 바쳤다. 나는 바르바토스에게서 바르바토스의 이름을 회수했다.
사아아.
그녀의 몸에서 보라색 안개가 퍼져나와 내 몸에 흡수되었다. 나는 잠깐동안 눈을 감고 안개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파후우 쿰처쿠 척 바르바토스]
'안드라스부터 여기까지 정말 악착같이 올라왔네.'
63위부터 8위까지 딱 1년.
오크의 평균 수명이 10년이라고 치면, 나는 인생의 10% 가량만에 열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되었다. 물론 위에 마르바스 같은 자도 나와 동맹이 되었으니, 이제 윗단계로 올라가는 건 식은 죽 먹기.
"앞으로 남은 네임드들을 다 따져도 얼마 없군."
나는 바닥부터 문구를 적어나갔다. 누구나 한 번 즈음은 들어봤을 제법 유명한 이름들이 내 앞에 길게 늘어졌다.
7위, 아몬.
6위, 발레포르.
4위, 가미긴.
3위 , 바싸고.
2위, 아가레스.
그리고 1위, 바알.
0위에 '솔로몬'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가정하면 한 명 더 있기는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지금부터 우리는 '동맹'이 될 테니까.
"자기, 나 왔어."
포털이 열리자 흰 토끼 수인이 귀를 쫑긋이며 나타났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미안하다. 네 자리를 빼앗아서."
"으응, 아니야. 강한 자가 더 높은 곳에 가야하는 건 먹이사슬의 기본이지. 대신 바르바토스를 나한테 주기로 했잖아?"
"그래. 고맙다, 마르바스."
<굴복> 오크의 몸으로 새롭게 태어난 나의 마신을 향하여, 라스.
나는 마르바스의 속마음이 보였다. 그녀는 내게 전쟁으로 패배하여 굴복한 바르바토스와 달리, 스스로 마력의 끈을 만들어 네 발로 엎드렸다.
"라-스."
나는 마르바스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이 의식을 통해, 나는 바르바토스에서 한 단계 더 높은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파후우 쿰처쿠 척 마르바스.]
"...음. 됐다."
5위. 나는 마르바스로부터 받은 이름을 양도받아, 그녀를 바르바토스로 만들었다. 따라서 아스타로트라는 자리는 잠시 비게 되었지만, 던전 주인이 될 자들은 어차피 차고 넘친다.
"...오너라, 시즌2."
라스푸틴이 굶주렸다. 나는 시간의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00 : 00 : 00.
내 앞에 시스템 창이 열렸다. 나는 익숙한 흑발흑안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낸 것에 환호성을 내지를 뻔 했다.
[모든 마족들은 들으라.]
평소의 귀찮음 가득한 모습과 달리, 솔로몬은 눈가에 살기등등한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한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내린 힘을 거두겠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짜릿해졌다. 솔로몬은 그런 반응을 즐기는 지, 손을 들어올리며 불만을 잠재웠다.
[걱정마라. 너희를 버리는 게 아니다. 너희에게 새로운 힘을 부여하고자 함이니, 걱정 말거라.]
새로운 힘. 그 이름은 바로 업데이트라고 한다.
새로운 기능 확대, 편의성 증대, 필수 기능 추가 등등만 있다면 좋겠지만, 버그픽스, 핫픽스, 꼼수방지 등 기존에 있던 시스템을 잘 활용하던 이들은 피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힘을 얻는 순간, 앞으로 나아가라.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을 직접 눈으로 볼 것이다.]
지금까지 꿀빤 놈들에게는 불똥이 떨어진 셈이고, 나같이 성실하게 할 일 다 하고 있던 자에게는 새삼스러운 일일 뿐.
[나 솔로몬, 여신과 교단에게 전면전을 선언한다.]
마왕의 공언하에, 여신교단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가 확정되었다.
[지금까지 모은 힘을 모두 쏟아내라. 마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삑.
화상이 끝났다. 그리고 시스템은 바로 치직거리며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던전 전체에 홀로그램같은 전파가 뻗어나가며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들은 대로 변하기 시작하는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비쥬얼 업데이트는 일단 인정이지."
시스템 2.0 업데이트에 따라, 던전의 모습은 새롭게 변했다. 자연 동굴에 가까웠던 벽은 온통 칠흑으로 뒤덮인 대리석 바닥이 되었다. 나는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하는 던전의 모습을 즐기며, 던전 주인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의자에 앉았다.
위이잉.
"커스텀 플라잉 옥좌도 인정이고. 으음, 완벽해."
시스템의 업데이트에 따라 추가되는 요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아마 다른 마족들도 새롭게 늘어나는 컨텐츠에 희열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떨까.'
뭐든지 공짜는 없는 법. 다들 새로운 기능의 추가에 환호성을 터뜨리겠지만, 그만큼 재료가 까다로워지는 건 당연지사.
"엿 먹어라, 적폐들아."
* * *
"오오오!"
아몬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크 하나로 패악질을 부리던 포르네우스는 죽었고, 이제 자신은 자신만의 던전을 꾸려 살아나가기를 바랐다.
그런데 시스템을 새로 개편한다?
"솔로몬...그분이 진정한 마신이야...!"
아몬은 눈물을 흘렸다. 불의 정령이라 정령력이 흘러나오는 셈이었지만, 아몬은 솔로몬이 새롭게 '업데이트'하는 것들을 보며 급히 분석에 들어갔다.
"시간 가속의 관? 바깥보다 세 배는 빠르게 흘러가는 곳이라니. 이거 알 집어넣...지는 못하는 구나. 순수하게 시간이 세 배라.... 수명을 당겨쓰는 셈이구나!"
"오오, 인연소환 밸런스 조정! 그래, 5성 하나 잃으면 최상급 마석 몇 개는 나가는 건 너무 심했지. ...근데 이러면 무한 부활 막히지 않나?"
"일반 소환에...엘프들 대거 추가? 와! 역시 신이야! 엘프들마저 마족으로 영입하다니! 흐으, 그...조디악 왕국 무너뜨린 놈들이 엘프들 공유해줬구나! 아아, 감사합니다!"
아몬은 두 손을 꼭 부여잡고 기도를 올렸다.
"흐흐흥, 이제 애들이랑 떡치면서 즐겁게 놀아야...헉."
아몬은 보고 말았다.
<조교실>
<감금복>
<삼각목마>
<스타킹>
....
온갖 성적 물건들의 향연. 마치 특정 누군가의 취향을 반영한듯한 물건들이 가득한 목록에 아몬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와.... 이걸 이제 구할 수 있다고? 이제 마나만 있으면 이런 것도 만들어낼-"
- 신성력이 부조카당
"...에?"
* * *
"흐흐흐."
레메게톤 2.0.
새롭게 업데이트된 시설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신성력'이라는 재료가 필요하다. 나는 던전 주인들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 것이 생각나 전신이 짜릿해졌다.
"존버하던 놈들 조졌군. 어쩌냐. 이제 지상에서 신성력 얻을 수 있는 놈들은 한정되어있는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이제 신성력을 얻기 위해서, 여신의 힘이 깃든 자들을 사냥해야지?"
나는 마왕에게 내가 가진 성행위와 관련된 재산을 모두 풀었다. 그리고 그들이 납부하는 재료의 가치에 대한 7.469% 만큼의 인센티브를 마석으로 제공받기로 했다.
"가만히 놀고 있는 놈들은 신규 업데이트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거고, 나는 그거로 꿀빠는 거고."
신성력.
내게는 너무나 흘러 넘쳐서 처치 곤란한 것들이다.
"솔로몬 만만세."
나는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안에는 륜과 루나의 맛이 섞인 성유가 찰랑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