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회
365일
진화.
마족이 시스템의 힘을 빌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마왕의 기적.
고작 3성 오크였던 나는 마왕의 기적 덕분에 어엿한 군단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오크 전사에게 주어진 정규 루트는 아니었지만, 나는 정해진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강해지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났다.
이 ‘진화’라고 하는 매커니즘에 대해서 나는 이미 숙지하고 있다.
그리고 인연소환의 매커니즘에 대해서도 이미 숙지했다. 샤이탄을 비롯한 여인들을 통해 얻은 던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나는 인연소환과 진화의 원리를 터득했다.
혼백은 그대로 둔 채, 육체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것!
“1성일 때의 정보를 등록하고, 개체의 미래를 읽는 거지. 수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래의 모습을 불러온 다음, 그 육체로 개조시켜 안에 영혼을 집어넣는 식이더군.”
시공간 마법만 잘 다루는 줄 알았는데, 영혼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가히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바 솔로몬.
“포르네우스. 1성과 2성의 진화 조건을 알고 있나? 모르겠지? 그냥 던전 운영이고 나발이고 부하들이 죄다 다 옆에서 보좌하면서 도와줬으니 아무것도 모르겠지. 관심있는 거라고는 자기 배로 낳을 애새끼들 자지가 얼마나 단단하고 튼실할까 하는 것밖에 없었잖냐.”
내 말에 포르네우스(2성)은 전신을 벌벌 떨었다.
지금까지의 떨림이 쾌락의 공포였다면, 지금의 공포는 분명한 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무기로 위협을 해서? 내가 포르네우스에게 무한의 쾌락을 줘서? 내가 포르네우스를 라스토피아의 공개 창녀로 만든다고 협박을 해서?
아니다.
그녀는 지금 내 집념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포르네우스, 나는 네게 ‘죽을 자유’를 박탈하마.”
퍼억.
나는 도끼를 내려쳐 포르네우스의 모가지를 날렸다. 피분수는 금방 하늘로 치솟아 마석들을 적셨다.
“인연 소환.”
나는 1성으로 내려간 그녀를 바로 소환했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 마냥, 포르네우스의 몸은 보라색 빛에 한 번 반짝였다가 다시 나타났다.
“허억, 허억, 허억...!”
“짜잔.”
“히이익?!”
나는 내가 도끼로 목을 날린 2성 포르네우스의 모가지를 잡고 흔들었다. 자신의 잘린 목이 보이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내가 파후오크 새끼들 죽이면서 얼마나 좆같았는지 알겠지?”
“시, 싫어!!”
“나는 좋다.”
포르네우스는 내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걸어 발목에 도끼를 휘둘렀다.
서걱-!
“아악!!”
발목이 뭉텅 잘려나간 포르네우스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엎어졌다. 사람도 발목이 잘린 정도로는 쇼크사가 아니라면 어느정도 의식을 차리고 있는 것처럼, 포르네우스는 당연히 마족답게 죽지 않았다.
“어딜가. 진화해야지.”
“그만, 그만둬!!”
“그만두는 방법은 이미 진작에 얘기했다.”
진화.
포르네우스(1성)을 향해 보랏빛 안개가 스며들었다. 포르네우스는 안개를 손으로 마구 휘저으며 진화의 마력을 거부하듯 난동을 피웠지만, 난동이 무색하게 안개에 전신이 먹혔다.
고오오오.
포르네우스는 2성이 되었다. 게임 이펙트로 치면 그녀의 머리 위에 별 두 개가 반짝이며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음, 좋구나. 고작 중급 마석 1개도 되지 않는 걸로도 포르네우스를 한 번 죽였다 살릴 수 있다니. 혜자네.”
덥썩.
나는 또다시 도망치려는 포르네우스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녀는 꼴사납게도 내 자지 아래, 다리 사이로 기어서 도망치려고 했다.
“왜 그래? 볼성사납게. 너 지금 진화해서 다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이게 네 발인 줄 아냐?”
나는 포르네우스의 잘려진 다리를 가리켰다. 당연히 포르네우스의 다리는 멀쩡히 붙어있었고,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아, 아아....”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너 죽이는 건 영원히 포기할 수 없지. 왜? 내가 지루해하다가 너를 그냥 죽이기라도 할까봐?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고 있어? 저런. 유감인걸.”
나는 포르네우스의 머리를 잡아들었다. 고작 한 손으로도 이렇게 쉽게 들리는 마족인데, 왜 그 때의 나는 이 마족의 조막만한 주먹에 웅크리고 살았던 걸까.
‘생각해보니 더 열받네.’
입장이 바뀌기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행위였다.
‘이러니까 내가 꼭 지질한 과거에 앙심을 품고 복수하는 것 같잖아.’
왕따가 고등학생 때 일진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커서 복수를 하는 그런 상상과 비슷한 건가? 거지같은 상사가 직급으로 인격적 모독을 받았지만, 어느순간 출장 외근을 나간 하청업체에서 상사를 다시 만나는 그런 경우와 비슷한가?
‘그럼 뭐 어때?’
지질한 복수든, 숭고한 복수든, 결국 내가 만족하기 위해 복수를 하는 것이다. 내가 포르네우스에게 가진 울분은 이 정도로 해결할 수 없다.
“포르네우스여. 나는 너를 영원히 죽일 것이다. 하지만 결코 죽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빡대가리인 너라도 이 정도 말은 이해하겠지?”
“그러지마...! 제발!”
“하지말라면 더 하고싶어지는게 인지상정 아니겠냐. 너는 언제 내가 하지말라고 할...아니지, 아예 말도 못했지. 그런 말을 했다가는 네가 무슨 지랄을 할지 몰라서 지레 겁을 먹었으니까.”
아아, 포르네우스의 부하 파후우여. 너는 어떻게 거지같은 3년을 버텨낸 것이더냐.
‘추억미화도 안 되네. 거지같게.’
포르네우스와의 관계는 정말이지 최악이 아닐 수 없다.
“봐...봐 줘...!”
포르네우스는 나를 향해 애걸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슬슬 내렸고, 그녀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잘할게! 앞으로 잘할게...요!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할테니까...제발!”
“그래? 그럼 한 번 더 죽고 진화하자.”
“아, 아니야아아아아!”
“왜. 시키는 대로 한다며.”
푹. 찍. 소환.
살해와 부활의 과정이 고작 30초가 채 지나지 않았다. 컵라면이 익을 시간보다 더 빠르게 죽었다 살아난 포르네우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봤다.
“너...너...!”
“이거봐. 잠깐 순간을 모면하려고 자존심을 내던지려했지. 하지만 간도 쓸개도 내놓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려는 자가 아니야. 그 순간의 굴욕도 참지 못하는 존재지.”
이런 여자와 결혼해서 네라스라는 자식까지 낳은 파오후여, 도대체 그는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을게.”
“뭐?”
“낳을게...! 낳는다고! 네 자식을 원없이 낳아줄게! 됐어?!”
포르네우스는 거래를 청했다. 하지만 이 얼마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눈빛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란 말인가?
“자식이 물건이냐? 어?! 너한테 자식은 고작 목숨을 넘기기 위한 도구냐?!”
나는 포르네우스의 머리를 붙잡고 소환진 안쪽으로 집어던졌다. 바닥을 구른 포르네우스는 입에서 검붉은 침을 뚝뚝 흘렸다.
“이런 마족의 아래에서 한 때나마 인정받아보겠다고 발버둥치던 내가 병신이었구나! 아아, 내가 등신이었어!”
나는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작자는 어디까지 추해지려고 하는 걸까.
포르네우스가 내 육체와 최고의 궁합이라고 한들, 이미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포르네우스를 살리고 중용하면 여신이 다리를 벌린다거나 최상급마석이 수 억개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밑바닥부터, 72위 안드로말리우스부터 다시 시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포르네우스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야, 어차피 네가 굴복하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너한테 걸려있는 쟁탈전, 평생동안 계속 걸려있어도 아무 문제 없다 이 말이야. 그리고 솔직히 말해줄까? 너 지금 네가 버티고 있으면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있는 줄 알지?"
포르네우스가 멍하니 나를 올려다봤다.
"아니야, 멍청아. 이건 왕국을 점령해서 새로운 왕국의 깃발을 꼽는 그런 거랑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고. 업데이트가 아니라 차기작이다 이 말씀. ...하 씨, 이렇게 말하면 못알아먹겠네."
나는 그녀를 향해 확인사살을 날렸다.
"너만 남기고 레메게톤 2.0으로 업데이트 하는 방법도 있다고.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하냐?"
"......내가 버티고 있는게...무의미하다고?"
이 어리석은 자를 보라! 설마 진정으로 자신이 이악물고 버티고 있어야만이 시스템을, 포르네우스라는 이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무의미하지는 않지. 너는 레메게톤의 승자가 될테니. 아아, 1기 레메게톤의 우승자는 포르네우스가 되었습니다! 그럼 2기를 시작하면 되겠군."
"아, 아니야.... 나는...!"
"그 누구도 시스템의 변환에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 마왕님이 시스템 좀 개편하겠다고 하는데 꼬와? 꼬우면 나가야지. 아, 그러면 네가 1등은 안되겠다. 너처럼 기존 시스템을 버리지 않겠다고 고집 피우는 놈들도 있을 거 아니냐."
나는 포르네우스를 향해 엄지를 내렸다.
"좋아. 너를 위해 쟁탈전도 걸리지 않게, 바르바토스와의 쟁탈전이 영원히 이루어지게 내버려두마. 바르바토스, 어차피 나랑 라스할 때 말고는 평생 자기 던전 안에서 잘테니까."
드래곤이 죽을 때까지, 포르네우스는 죽지 못한다.
"나한테 복수하고 싶어? 그러면 드래곤이 자연사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다! 아니지. 이렇게 얘기할까? 드래곤이...멸종되는 그 날 까지."
바르바토스라는 던전의 주인 자리도, 계승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 때까지 버텨봐라, 포르네우스. 나는 레메게톤 시즌2로 떠난다."
과거의 영광 속에 묻혀 누구도 모르는 이름으로 남으리라. 나는 포르네우스를 향해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굴복> 항복할테니, 진짜로 죽여줘.
나는 드디어 포르네우스의 굴복을 받아냈다. 바르바토스의 쟁탈전은 승리로 끝났고, 이제 포르네우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축하한다, 포르네우스. 네게 죽음을 선사하마."
나는 나를 향해 헤벌쭉 웃는 포르네우스를 향해 마검을 휘둘렀다. 포르네우스의 심장을 찌르는 칼날에 포르네우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순간.
번쩍-
포르네우스의 몸이, 안에서부터 터지듯 밝게 빛나기 시작했고-
"꺄하하! 멍청한 새끼! 내가 그냥 죽을 것...같....?"
"어휴, 눈뽕."
나는 심장이 찔린 포르네우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자폭기? 그런 거 요즘 누가 당하냐."
나는 하품과 함께 포르네우스의 이마를 검지로 툭 밀었다.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모르지?"
"어, 어떻게...?"
"뭐긴 뭐가 어떻게야. 지금 바르바토스가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는데."
나는 혼란에 빠진 포르네우스의 이마를 계속 건드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망한 던전의 포로가 구속되어있는데, 탈옥 확률이 지금 50%를 넘어가네? 의심 안 하는게 머저리 아니냐."
진정으로 굴복한 자는 탈옥조차 생각하지 못한다.
"포로를 다뤄본 적도 없으니, 포로를 어떻게 취급하는 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 응?"
시스템 만만세.
나는 포르네우스에게 족쇄를 채우며 뺨을 툭툭 쳤다.
"오함마 가져와."
마검 발라서 찍어버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