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회
365일
"반갑다! 본인은 마신 바하무트라고 한다."
"......."
나는 눈앞의 붉은 빛의 구체를 두고 한참을 고뇌에 빠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알을 깨고 뛰쳐나오기 직전, 나는 의식이 납치되었다. 의식을 하이재킹 당하는 건 에스투부터 시작해서 온갖 초월자들과 미리 몇 번 해봤지만, 진화 직전에 소환당한 경우는 잘 없었다.
눈을 뜨니 온통 붉은색만 가득한 신전이더라.
그리고 내 눈앞에는 스스로를 '마신'이라고 주장하는 붉은 빛덩어리가 아른거렸다.
"이게 마신이라고?"
"그렇다. 인간의 혼을 가지고 오크로 태어난 자여."
깜놀. 나는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빛덩어리를 향해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경배하라. 신이시여, 당신의 종복이 여기 있습니다."
누구도 모를 나의 전생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 신이 분명하다. 아니면 그에 준하는 존재거나.
"무신론자이면서 굳이 빈말이라도 나를 찬양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이미 행동으로 내 신앙을 증명하였으니."
"...저는 당신을 처음뵙습니다만."
역시 속마음이 들키는 구나 싶었다. 그와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는 도대체 내 무엇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증명했다는 것일까?
"나는 너를 오랫동안 지켜봐왔다."
마신은 빛덩어리로 이루어진 손으로 내 배를 가리켰다. 내 배는 붉은 빛의 고리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뱃가죽 안의 무언가가 붉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여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뒤로, 나는 새로운 육체를 찾아 복수를 갈구했다. 그리고 네 몸에 깃들었지. 아아, 하지만 나는 네 육체를 빼앗지 않았다. 안심하거라. 단 한 순간도 몸을 강탈한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럴 몸도 아니고."
"......."
갑자기 나타나 내 몸에 깃들어있었다고 하니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속내를 읽고 있다면 내 생각도 지금 실시간으로 읽히고 있을테니 한 번 대답해보시길.
신이라는 존재가 고작 내게 깃든 이유가 무엇인가?
"가능성을 위해."
와아아----
마신의 빛덩어리 속에는 흑과 백의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천계를 배경으로 온갖 천사와 마족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른 천사와 악마들에 비해 수천 배는 큰 거대한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며 싸우고 있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의 여인은 붉은색의 악마에게 은빛의 창을 찔렀고, 그걸로 회상은 끝났다.
"마신이라는 존재였으나, 여신에게 크게 당한 뒤로 나는 그저 한낱 찌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를 대신하여 여신에게 반기를 들고 복수할 자를 위해 내 힘을 주는 정도는 가능했지. 보아라."
빛덩어리에서 핏빛과도 같은 문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나도 익숙한 모양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당신이 바로...."
"그렇다. 내가 네게 '문신의 힘'을 준-"
"나를 근돼문신국밥충으로 만든 장본인이로군. 아니, 신인가?"
"......."
마신은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깃들어있었을테니, 내가 한 말의 의미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내 몸에 반짝이는 붉은 문신을 가리켰다.
"진화 테크도 그냥 레벨업으로 진화한 평범한 4성 오크가 갑자기 문신의 힘을 각성한다? 나 주술사 테크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이런 주술의 힘이 나올 리가 없지."
"잘 아는군.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애용하지 않았나?"
"힘의 출처와 힘을 이용했을 때의 이점은 별개니까. 애초에 힘의 상태로 따지고 들었으면 신성력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이 자리까지 올려준 문신의 힘을 내가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게 포르네우스가 남겨준 힘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순순히 사용했을 것이다.
이름 정도는 바꿀테지만.
"뭐, 좋습니다. 이거 덕분에 지금까지 숱한 위기를 넘겼으니.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뭡니까?"
"이제 네게 모든 힘을 다 넘겨주었으니, 나도 성불하고자 하는 거지."
"그럼?"
"네 몸에서 이제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네가 네 육신으로 신성의 힘을 깨달을 정도가 되었으니, 이제 나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 말이야."
마신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신이 보여준 화상 속, 마신을 앞둔 나(★★★☆☆)는 마신이 내뿜는 빛에 눈이 멀어 타들어갔다.
"시스템적으로 표현하면 네가 ★★★★★☆이라는 데미-갓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았기에, 나도 이제 너와 직접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 5성이라는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 신성을 어느정도 가졌다는 말이다. 지금 수준은 데미까지는 아니고 쿼터-갓 정도는 되겠군."
"......."
내가 신성을 지닌다면 무슨 신이 될까.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너무 큰 존재가 된 것 같아 괜히 두려워졌다.
"겁먹지 마라. 너는 네가 하던 대로 행동하면 된다. 물론 내가 떠남에 따라, 네 절대방어가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절대방어. 그 어떤 공격에도, 심지어 신성력에도 뚫리지 않던 절대방어라 함은 하나밖에 없다.
"...설마 이 배둘레햄의 원천이 당신이셨습니까?"
"미안하구나. 네 몸 속에 깃들어 가장 많은 힘을 내기에는, 지방이라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좋더구나."
헐.
"그래, 네 머릿속에 있는 지식에 따르면, 탄지단 494의 원리에 따라...."
"......"
단백질 덩어리인 근육보다 지방을 매개로 힘을 일으킨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마신이란 말인가. 나는 내 피부에 문신이 깃들어 반짝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 혈관 속 콜레스테롤이 문신의 힘을 일으키는 원동력인 듯 했다.
아아, 그렇다면 그건 콜라스테롤이 아닐까?
"그럼 이제...."
"내가 빠져나가도 여전히 뱃살은 남아있을 것이다. 지방세포 하나하나는 네가 표현하는 '문신의 힘'을 사용하는 그릇이 될 것이다."
"...그럼 영원히 이 살을 빼지 못한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나는 희망을 보았다.
"문신의 힘을 최대한 일으키면 지방세포가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힘을 방출하는 셈이며, 내가 네게 주는 마지막 안배이니라. 어디 한 번 예전처럼 힘을 사용해보거라."
"......."
나는 마신의 제안대로 문신을 일으켰다. 피가 점차 끓어오른다는 감각이 나를 채웠고, 내 몸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음...."
나는 근돼문신국밥충에서 근육문신충이 되었다. 외형을 비유하자면, 약물을 복용한 보디빌더들의 형태와 비슷해졌다.
'전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래도 좀 그렇네.'
아무래도 완전히 빠져서 진정한 근육미남이 되는 건 진짜 6성, 반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절대방어는 잃었을 지 몰라도, 절세미남은 지켜냈다. 다행히 자지에는 지방이 끼어있지 않았던 건지 성기 사이즈는 줄어들지 않았다.
스르르.
빛덩어리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게 마치 악수를 하는 모습이라,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께서 저같은 존재에게 이렇게 악수를 청해도 되는 겁니까?"
"지상에 남은 마지막 신을 쓰러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영웅을 위한 축복일세."
"...흐."
마지막 남은 신. 그게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맙네. 그대 덕분에 안심하고 떠날 수 있군."
"잠시만요. 그냥 떠나기 있습니까?"
나는 손을 잡아당겼다. 마신은 은근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몸에 깃들어서 놀다간 임대료는 지불하고 가셔야지요."
"...어떻게? 지금까지 내가 그대를 살려준 횟수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
"아뇨. 부족합니다. 그냥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되고, 부탁은 더럽게 간단합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래도 마신님이신데, 여체화 정도는 가능하시지요? 가실 때 가더라도, 섹스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
착각일까. 빛덩어리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신이란 왜 전지전능한 존재일까."
마신은 한탄과 함께 모습을 바꿨다. 서서히 내 아랫도리, 라스푸틴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디보자...그대가 바라는 모습은...."
붉은 빛무리가 가라앉자, 그곳에는 머리에 양의 뿔을 달고 있는 적발의 나체 여인이 나타났다. 내 가슴 자락에 시선이 닿을 정도의 여인은 뿔이 달려있는 것을 제외하면, 적발의 에스투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우야."
하지만 완벽한 에스투는 아니었다. 지방을 베이스로 힘을 만들어냈던 마신 답게, 가슴 부위에는 마신의 위엄이 가득 몰려있었다.
'오히려 좋아.'
루나급 가슴을 가진 에스투라니. 라스푸틴이 흥분하여 벌써부터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이건 이거대로 굴욕이군. 마신에게 마왕처럼 모습을 갖추게 하고 범하려고 하다니."
부히이이잇.
"뭐, 어디 마음대로 해보시게."
내가 원하는대로 모습을 바꿔주다니.
"내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라스 한 판 해주지."
역시,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