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717화 (713/800)

717회

365일

라스푸틴이 알을 찢고 나오기 직전.

누구도 알지 못하게, 세계는 한 번 멈췄다.

알이 터져나오기 전에 온통 회색으로 물든 세계에서 유이하게 색을 가지고 움직이는 존재는 은빛의 마족과 검은 마족 뿐이었다.

"이걸로 만족해?"

검은 마족, 샤이탄이 말했다. 그녀의 평소 목소리와는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샤이탄, 그녀의 눈동자는 검게 물들어있었다.

"예, 만족합니다."

은빛 마족, 포르네라스는 더할 나위없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광경은 그녀에게 있어서 바라마지 않는 광경이었고, 파후우라는 존재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각성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다른 미래...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를 낳고, 또다른 자식을 낳았습니다. 제 쌍둥이 오빠라고 할 수 있는 자였죠."

"호오. 그래서?"

"제가 주술과 지혜를 물려받았다면, 그는 힘과 투쟁심을 이어받았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온 건 거의 없었고...사실상 아버지로부터 쪼개진 두 힘이 자식들에게 나뉘어졌다고 보는 게 맞겠죠."

포르네라스는 알 속의 오크를 가리켰다. 그의 모습은 합성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박력과도 같은 힘은 금방이라도 알 뿐만 아니라 세계를 찢어놓을 것 같았다.

"이제는 아닐 겁니다. 주인님께서는 스스로 자신과 하나가 되었고, 혼과 육신이 다시 모여 진정한 하나가 되셨죠."

"그래. 이 녀석이야말로 마왕군의 승리를 이끌 원동력이지."

꿈틀, 꿈틀.

오크의 배가 마치 심장박동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뱃속에 깃든 붉은 기운에 샤이탄(?)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다니까. 이제서야 기어나오는 거 봐봐."

"기어나온다는 표현은 조금 그렇지만...."

"기어나오다라. 유감스럽군."

알 속에서, 오크가 붉은 안광을 터뜨리며 사납게 웃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의 힘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영원불멸의 방패가 되어, 그를 지켰지."

"이제서야 튀어나온 게 기어나온 거지. 왜 진작 나오지 않았어?"

"나올 이유도 없었고, 안이 편하기도 했고, 이제는 자리를 넘겨줄 때니까."

오크는 손등을 가볍게 교차하듯 두드렸다. 그러자 녹색 피부의 전신에 문신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증기가 빠져나오듯 열기가 배출되었다.

푸쉬이이----

살 속에 공기가 들어갔다가 빠지는 것처럼, 오크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증기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근육과 함께 가득했던 살들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증기와 함께, 내부의 지방이 열기로 타올라 사그라들었다. 오크는 근육질의 오크로 모습을 바꾸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서 물어볼게."

흑안의 샤이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물었다.

"첫째, 마지막 순간. 트랄의 몸에 깃들 수 있었으면서 왜 그 몸에 깃든 거야?"

"이쪽의 성장가능성이 더 높았으니까. 시간만 충분히 지나면 성장할 게 분명했고, 실제로 성장했지."

"둘째, 왜 '오크'에게 주도권을 넘겨 준 거지?"

"......훗."

오크는 비릿하게 웃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이미 죽었던 몸. 심지어 이 몸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몸. 그런데 내가 어떻게 원래 몸의 주인을 죽이고 그 몸을 차지할 수 있겠어."

"신이시여...."

"나는 네 신이 아니다."

오크는 단호한 목소리로 네라스의 말을 반박했다.

"이미 신은 죽었다. 이 세계에 남은 신은 오직 여신 한 명 뿐.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오크에게 깃든 힘의 의지에 불과해."

"네...."

오크는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참으로 짧고 긴 순간이었다. 365일...아니, 딱 4년이로군.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오크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왕이여, 미안하구나. 너를 이곳에 불러놓고, 내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어."

"뭘. 여신의 심장을 꿰뚫을 마탄을 하나 만들어줬잖아. 그럼 됐어."

"만들었다기보다는, 그에게 그저 내 힘을 빌려준 것에 불과하지만...."

오크는 포르네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계의 마왕이여. 고맙다. 마왕의 권리와 힘을 포기하면서까지, 나와 마왕에게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해주어 정말로 고맙다."

"......저는, 그저 제 사랑을 찾아왔을 뿐이에요."

포르네라스는 시선을 돌리며 작게 속삭였다. 오크는 더없이 인자한 미소로 눈을 감았다.

"아아...그렇구나. 사랑인가. 내게는 사랑이 부족했던 건가."

오크는, 붉은 존재는 미소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신탁을 내리는 수밖에. 아아, 온 세상에 사랑을 퍼뜨리거라...나의 후예여."

사르르르.

오크는 색을 찾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굳었다. 두 팔을 높이 치켜든 자세대로 껍질을 움켜쥔 오크는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분노로 가득차있고, 오만하며, 색욕에 물들고, 탐욕스러운 오크.

라스푸틴.

적색의 기운이 완전히 가라앉자, 포르네라스는 오크처럼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위에 푸른색의 구체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여기요, 마왕님. 제 '마스터키'예요."

"...새삼 묻기도 그렇지만 정말 괜찮겠어? 내게 이걸 넘기면 너는 그냥 내 시스템 속에 살아가는 일반 마족이 되는 거야."

"네, 괜찮아요. 제게는 저를 사랑해주시는 주인님이 계시니까요."

"...참, 사랑이 뭔지."

샤이탄은 피식 웃으며 포르네라스가 건넨 마스터키를 흡수했다. 그러자 샤이탄의 몸에 달려있던 서큐버스의 흔적이 사라졌고, 그녀는 허공을 빠르게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마왕님으로서 마지막 서비스를 시작해볼까."

샤이탄은 알속의 오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포르네라스에게 눈짓을 하며 함께 알속으로 들어갔다.

"너희가 하나 간과한게 있는데, 이대로 합성되면 여기에 포르네우스의 유전 데이터가 남아있게 되거든?"

"예. 알아요. ...그게 미래에 큰 재앙을 초래했죠."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걸 빼내는 작업을 할 거야."

샤이탄은 유리병 하나를 소환하여 오크의 자지 앞에 씌웠다. 그리고 자지를 한손으로 가볍게 움켜쥐며 윙크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 몸속에 남아있는 포르네우스의 유전자를 전부 빼내는 거야. 알았지?"

"그럼 그만큼 유전자가 비지 않아요?"

"걱정마. 이거로 충당하면 돼."

샤이탄은 오크가 벗어둔 로브에서 허리에 묶어둔 장식을 집어들었다. 알록달록한 무늬로 꾸며진 장식은 오크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여인들의 머리카락을 모아 하나로 엮어둔 것이었다.

"여기서 유전자 빼내서 복사한 다음, 포르네우스 거랑 갈아끼우자."

"...그러면 그거, 생물학적으로 나중에 그거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거 다 하나로 합쳐서 넣으면 되지."

샤이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납게 웃었다.

"

* * *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정말로 낯설었다. 주변은 온통 붉은 색으로 가득했고, 그게 또 대리석이라서 이상했고, 그게 또 고대의 신전을 방불케하는 모습이라 이상했다.

'나는 던전에 있었는데?'

새삼스럽지만, 초월자에 의해 어딘가로 의식이 납치되는 건 익숙한 일이다. 다만 이런 붉은 신전은 생전 처음 봐서 이상할 뿐이다.

"여긴 어디야?"

나는 주변을 훑다가, 신전 한켠에 놓인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배가...?"

줄어들지 않았다. 정자에 깃들어 포르네우스와 하나가 되었던 '나'와 육체에 남아있던 본체로서의 '나'가 하나가 되어 합성이 이루어졌는데, 어떻게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아냐, 변했어.'

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의 변화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

나에게는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가 생겼다. 비어있는 별이라고 해도 선 만큼의 면적은 분명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일까? 나는 6성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생기자마자 생긴 내 변화에 놀라웠다.

육체의 변화는 없으나, 분명히 특별한 변화가 느껴졌다.

나는 이제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주변에 가득한 빛무리 사이, 나를 부르는 듯한 붉은 빛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마력? 신성력?

아니다.

이것을 굳이 단어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신성(神性)."

신성력으로 알려진 힘과는 다른, 진정한 신성의 힘이 느껴졌다. 내가 마액을 끼얹을 때마다 붉은 빛으로 잠식되며 타락하는 은빛 신성력 따위가 아니라, 진정한 신의 힘이 내 앞에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

나는 묵묵히 신성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내 앞에는 흉악한 악마를 상징해놓은 듯한 석상과 함께, 붉은 빛덩어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툭툭.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손등을 두드렸다. 내 손등에서 빛나는 붉은 빛은 눈앞의 빛덩어리와 '똑같은' 색이었다.

내 '문신의 힘'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신전 전체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건 대체...?"

"만나서 반갑도다."

빛덩어리는, 내게 성별이 느껴지지 않는 무성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설마."

나는 아랫도리를 확인했다. 나의 라스푸틴은 폴더폰 마냥 경건하게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에스투를 앞에두고도 고개를 들고 싶어 안달난 라스푸틴이, 빛 덩어리 앞에서는 유교 의식이 뿜어져 나오는 것 마냥 예의를 차렸다.

"신...?"

"그래. 마족의 신이다."

악마의 상에도 붉은 빛이 반짝였다. 석상의 표면에 내 문신과 비슷한 문신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빛무리는 내게 다가오며 더욱 강하게 반짝였다.

"나는 마신, 바하무트. 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지켜봐왔다."

빛무리는 내 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몹시나 반갑구나, 마족의 용사여."

신은, 나를 용사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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