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회
359일차
건축에는 건축가의 사상이 깃들게 된다.
집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하나의 주거공간에는 그 집을 짓는 자의 생각이 깃들게 된다.
던전 또한 마찬가지다.
시스템이라는 좋은 개조 수단을 가진 던전 주인은 자신의 생각을 던전의 구조로 표현하고는 한다.
그리고 내가 포르네우스 던전을 이틀동안 살피며 느낀 것은, 던전을 살피면 살필수록 내 던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다.
침입자에 대한 지독한 악의.
수많은 함정을 배치하여 먼저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패턴.
그리고 상대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부하들의 배치.
그 모든 것이 내가 던전의 구조를 구성하는 기본 생각을 담고 있었다.
포르네우스 던전에 내가 설계에 힘쓰고 내가 의견을 제시한 것도 아닌데, 나의 색이 들어가있는 것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정말 어떻게 된 일일까.”
우리는 포르네우스 던전을 차근차근 공략하며, 그 속에 있는 나의 흔적에 대해 수도 없이 곱씹었다.
나는 포르네우스 던전에 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르네우스가 던전 구조에 아이디어를 제공해보라는 식으로라도 한 번도 중용되어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힘을 감춘 노예 병사 A일 뿐이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힘을 쓰지 않았다.
“파후오크들에게 내 데이터가 남아있는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한 명의 또다른 오크 종일 뿐입니다.”
“그럼 또다른 나를 소환했다든가.”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또다른 네가 순순히 포르네우스의 아래에서 숨죽이고 살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라는 존재가 포르네우스 던전에 많은 도움을 줬다는 설은 기각되었다.
그렇다면 가장 그럴듯한 가정은 역시 기술 유출 설이다.
“산업 스파이로구나!”
우리 던전 운영의 핵심 노하우가 유출된 것이 틀림없다.
다만 던전은 유출범이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내가 포르네우스에게 반기를 든 것처럼 하지 않는 이상, 던전의 하수인은 던전 주인에게 반기를 들 수 없다.
포르네우스는 나를 던전의 부하에서 내치는 과정을 거쳤기에, 나는 포르네우스의 앞에서 쌍욕을 내뱉으며 도망칠 수 있었다.
“포르네우스…. 이제 얼마 안남았다.”
우리는 던전의 구조를 전부 파악해냈고,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그리고 넘어가자마자 우리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화르륵!
말 그대로 뜨거운 환영이었다. 계단을 넘어 던전의 다음 층으로 넘어간 순간, 우리를 뒤덮는 후끈한 열기에 몸에 절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입구에 함정깔기….”
적의 포털 앞에 버지니움 실드를 깔아 적 던전에서의 침공을 실시간으로 소멸시켜 태워버리던 나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이 그와 비슷했다.
끼에에에엑!
내가 한 층을 넘어가자마자, 지옥에서 들끓는 듯한 불꽃이 나를 휘감았다.
“거 더럽게 뜨겁네.”
이미 몸이 여러번 불에 타서 화염에 다소 내성이 생긴 덕분에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겉에 두른 로브가 불길을 전부 튕겨냈고, 나는 다음 층의 입구를 가득 채운 적 마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것들은 뭐야?”
전부 실체가 없는 환영이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산소가 부족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으나, 눈앞의 존재들은 전부 귀신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거 설마…?”
“주인님! 정령이에요!”
륜이 계단을 넘어오기 무섭게 불꽃은 당황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눈앞을 알짱거리는 불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응?”
불씨는 내 손에 갇혀 빠져나오려고 아둥바둥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 화력이 고작 성냥불보다 약하여, 나는 불꽃을 쥐고 손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끼에에엑!
불꽃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나는 그걸 양손으로 붙잡고 마구 흔들다 바닥에 내팽겨쳤다.
“이게 불의 정령이라고?”
내가 손바닥을 훠이 휘두를 대마다 불꽃 덩어리들은 하나 둘 기절하여 바닥에 퍼질러졌다.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듯한 기분에 나는 괜히 짜릿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타다 만 담뱃불같이 타는 놈들이 정령?”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아몬의 군대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몬? 그거 7위 던전 주인 아니냐?”
[예. ...아무래도 지금 저희랑 비슷한 상황인 듯 합니다?]
싸우면 싸울수록 나는 나와 너무나도 흡사한 던전 운영에 그저 기가 막혔다.
본진보다 더 높은 등위의 던전을 앞세워 본진을 숨기는 전략.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니면 어떤 마족도 생각해낼 수 없는 작전이었다.
마족으로서 상위 던전의 이름을 버리고 실리를 택한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이 거 뭐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던전을 점령하고 포르네우스를 붙잡아 때려잡으면 결과를 알게 되리라.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나는 예상치 못한 적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만 복제한 줄 알았더니.”
눈앞에는 흉측한 갑옷의 오크 전사가 서있었다. 그는 손에 돈까스 두드리는 거대한 망치를 든 채 사납게 이를 갈았다.
“트랄?”
“크워어어!!”
트랄을 닮은 놈은 괴성을 내질렀다. 트랄에게서는 볼 수 없는 광적인 흥분에 나는 입안이 바싹 말랐다.
“미친….”
내 육신을 부르르 떨리게 만드는 강대한 힘은 나보다 강했다. 레벨이 98에 이른 나보다 더 높은 레벨의 보유자였다.
레벨 100.
고작 2차이일 뿐이지만, 나는 놈의 속에 있는 잠재력을 읽었다. 6성으로 초월하기만 하면 놈은 마왕의 자리를 넘볼만큼 강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설령 진짜 트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선 넘네.”
남의 육신을 저렇게 멋대로 써먹다니, 용서할 수 없다. 누가봐도 타락하여 오염된 모습인 것도 불쾌한데, 원본이 하도 잘생겨놓으니 타락한 모습도 잘생겨보이는 것도 용서할 수 없다.
“쓰벌, 누구는 뱃가죽 덜렁덜렁 거리게 만들어놓고 트랄은 팔레트 스왑에 간지나는 갑옷 씌워놨다 이거지?”
역시 포르네우스는 복날 개 패듯이 패죽여야한다.
화르륵!
트랄의 뒤로 불꽃의 정령들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트랄을 선두로 우리 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놈들은 우리를 전부 불태워버릴 기세로 불씨를 뿌려댔다.
“륜, 지금이다.”
“네!”
륜은 벗어둔 서클렛을 이마에 착용했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손을 뻗었고, 나는 할레오를 쥐고 ‘준비’를 마쳤다.
“짝퉁이 어디서 눈을 그렇게 뜨고 덤비려고 하느냐!”
구구구구.
륜을 중심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불꽃의 정령들은 우리 쪽의 기운을 느끼고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고, 나는 뒤에서 뿜어져나오는 막대한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아아, 이것이 바로 해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몸을 옆으로 놓으며,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회전---회오리---"
던전 복도를 가득 채우는 물속에서, 나는 붉게 물든 할레오를 꽉 붙잡았다.
"슛---!!
퍼어어억-----
내가 전방을 향해 내던진 몽둥이는 가짜트랄의 미간을 정확히 때렸다.
* * *
"......저 새끼 뭐지?"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는 시스템을 통해 보이는 상대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다.
"넵튜뉴스는 또 왜 저기서 저러고 있고."
이프리트는 정령계로 가서 따져볼까하다가 참았다. 그간 자신의 정체를 숨겨왔는데 괜히 넵튜뉴스에게 정체를 들킬 이유는 없었다.
이프리트, 그는 던전의 주인으로 <아몬>이라는 또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7위 던전의 주인이 고작 30위 던전인 포르네우스의 하위 던전이 된 것이 굴욕이었지만, 포르네우스 던전에는 4위 던전도 가볍게 도모할 미친 괴물이 존재했다.
데스트랄.
불의 정령들을 순식간에 때려죽이던 그 괴물은 적이면 너무나도 두렵지만 아군이면 이만큼 든든한 자가 없었다. 아몬은 데스트랄과 함께 다른 던전을 직접 공략해봤기에 그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이지를 상실한 괴물로 다행히(?) 한 번 죽어버렸지만, 최상급 마석만 있으면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는 게 제일 큰 무서움이었다.
데스트랄만 없으면.
저 괴물만 없으면 자신도 포르네우스 던전을 도모할 수 있다. 한 명의 5성 100레벨 괴물이 두려워서 싸움을 피하는 거지, 포르네우스 자체는 무섭기는 커녕 던전 주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다.
"부하 복은 더럽게 많은 놈이라니까."
데스트랄부터 시작하여 하급~중급 마석만 있으면 여느 80레벨 부럽지 않은 오크를 기본 병사로 부리는 데다가, 아몬으로서 부럽기까지 한 참모도 존재한다.
고작 수 개월만에 한 번 쫄딱 망해버린 포르네우스 던전을 아몬 던전과 비비는 거로도 모자라 상위권 던전과 비슷한 전력을 만든 괴물같은 여자가 존재했다.
"부럽...응?"
사라락.
은빛의 반짝임과 함께, 문제의 그녀가 나타났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또 무슨 지시를 하려고 온 거지?"
"지시는 아니고, 부탁이에요."
여인은 후드를 뒤로 벗었다. 얼굴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에 아몬은 표정이 굳었다.
"너...?"
"하고 싶죠? 반란? 그럼 저랑 같이 하시죠."
여인의 얼굴은 포르네우스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도대체...왜?"
"왜냐면...."
여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보좌를 했을 뿐이에요."
여인이 사납게 웃는 모습을 보자, 아몬은 방금 전에 본 미친 존재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