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8회
352일차
이 세계의 유그드라실, 그러니까 신수는 엘프들의 모든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호오, 이것을 유전자라고 부르는 건가?"
그녀는 내 표현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게놈'이라거나, '생명의 씨앗'이라거나, 신수 본인이 언급하는 '자라면 OOO 엘프로 태어나는 먼지보다 작은 찌꺼기'와 같은 용어들을 해치우고 유전자를 도입했다.
"예. 혈족이라는 개념을 아십니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신수에게 내가 요구하는 유전자를 찾기를 요구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되는대로 설명을 하였고, 신수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마나를 통해 허공에 투영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같은 혈족이면 유전자 속에 99% 가량 일치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과연 이 세계에 유전자가 실제로 존재할 지 여러모로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나는 현대의 생명공학이 판타지 세계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군단장,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신수는 아주 당당한 얼굴로 내 제안의 문제를 지적했다.
"나는 엘프종밖에 볼 줄 몰라."
"헐."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엘프 종이 아닌 자들은 어떻게 파악하면 좋단 말입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일단 그대가 말하는 대로 찾아보기는 하겠네."
신수는 엘프종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표본은 엄청 많았다.
"모든 쿠앤크 엘프를 제외한 모든 그린 엘프, 블러드 엘프에는 제 유전자가 섞여 있습니다."
그린 엘프와 블러드 엘프들은 내 피를 근간으로 하여 태어난 존재들이다. 합성이라는 방법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이어진 내 유전적 데이터는 차고 넘친다.
[먼 곳에서 온 오크여. 생명의 근원을 찾는 여행은 멀고도 험할 지어니. 그대는 자연의 흐름을 순응하며 때를 기다리거라.]
신수는 자신의 단말 엘프-대외 활동을 위해 엘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여인까지 나무 속으로 되돌리며 연구에 들어갔다.
신수인만큼, 그녀는 좋은 결과를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어디 미혼모가 엘프 뿐이겠는가!
"인간 중에 하피나 안드라스, 아니면 뱀파이어를 선택한 여자들도 있단 말이지."
우리 군단의 마족과 합성되기를 선택한 이들 중에는 블러드 엘프가 아닌 일반 마물이나 수인족으로 합성된 이들도 존재했다. 엘프 이외의 종이 약 2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 중에서도 분명히 미혼모가 존재했다.
이들을 찾을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나는 또다른 해법으로 '마법'에 눈을 돌렸다.
"그레모리야, 혹시 마법 중에 친자 검사 마법은 없나?"
"유감스럽게도 없네. 갑자기 그런 건 왜 찾아? 결국에는 지들이 좋아서 난교하다가 임신한 건데."
"그래도 최소한의 자비는 베풀어줘야하지 않겠냐. 마법에는 없단 말이지? 끙...."
뭔가 방법이 없을까하던 찰나, 나는 한 가지 좋은 수단을 떠올렸다.
"피!"
자고로 가족이란 어떤 인연이라 하는가. 혈연이라고 하지 않는가!
바로 피를 조사하면 된다. 유전자 검사만큼 확실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를 통해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다.
"아아, 이것은 혈액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젠장."
피를 통한 조사는 시작부터 막혔다. 현대 치트도 정도가 있고, 나로서는 전문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즉, 나는 피의 종류가 A니 B니 나뉘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지, 그게 어떤 원리로 분류되는 지 정확히 몰랐다.
유전자 문제에 대해서도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신수가 찰떡같이 알아들어서 망정이지, 사실상 나는 현대의 생명공학적 접근 방식의 한계에 좌절하고 말았다.
"아니야,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할 수 없었다.
미혼모를 만든 남자를 찾아서 책임을 지게 만들어 납세자를 양성하겠다는 계획도 계획이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막힘없이 일을 처리해온 내가 친부를 찾는 방법을 발견해내지 못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솔로몬 메타로 가야하나?"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모성과 부성에 호소를 해볼까. 아이를 데려놓고 반으로 가르겠다고 협박을 하면, 진짜 친부모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친권을 포기할 것이다.
"씁. 말 한 마디로 친부를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주인님, 지난 번에 주인님께서 하신 말씀 기억하세요?"
"응? 륜아, 내가 한 말이 한 둘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구나."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유레카!"
나는 소크라(테)스가 된 심정으로 륜을 안았다. 륜에게는, 그리고 륜이 소환하는 물의 정령왕은 답을 알고 있다.
"보니까 막 정령들한테 '이 땅에 있던 일을 알려다오'하는 식으로 물어보고 그러던데, 혹시 그런 거 가능하냐?"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건 왜...?"
"그러면 난교 섹스 당시에 누가 미혼모들한테 질싸했는지 정령들도 알겠네? 물의 정령들한테도 좆물이 튀었을 거 아니야."
넵튜누스는 형언할 수 없는 썩은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임신 기간을 역산해서, 당시에 질싸한 남자들을 찾아낸다. 그럼 일단 불특정 다수의 용의자에서 최대한 수를 줄일 수 있지. 흐흐. 가능하냐?"
"...차라리 물의 정령으로서 불가능했다면 좋았을 것을."
역시 물은 답을 알고 있었다. 넵튜누스는 물의 정령들을 동원하여 미혼모들이 당시 누구와 섹스를 했는지, 그리고 그중에서 누가 안에 사정했는지 파악해냈다.
- 쟤가 쌌어요!
- 쟤도 쌌어요!
- 여기 있는 애들 다 한 번씩은 사정했어요!
"...이러다 이 세계에서 질외사정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겠군."
한 명 밖에 없는 경우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물의 정령들은 전 세계예 퍼져있었고, 그가 죽었는 지 살았는 지 알아낼 수 있었다.
"뭐, 뭐야?! 나는 아무짓도 안했어!!"
"싸튀방지법에 의거하여 당신을 체포합니다."
"뭐? 내가 여자를 임신시키고 튀어? 그럴 리가 없잖아?!"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마법은 다행히 존재한답니다. 이 자는...거짓이네요."
경찰 제복을 입은 구울들에 의해 연행된 남자들은 모두 진실을 실토했다. 적절한 회유와 채찍을 제공한 끝에, 그들은 자신들이 여자를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되었다.
"저는 진짜 몰랐어요.... 그 날 한 번 하고 헤어졌단 말입니다...."
첫번째 케이스는 다소 억울한 경우였다. 이른바 '엔조이를 한 경우'.
개중에는 발정난 여인에게 오히려 역강간을 당한 이들도 있었고, 자는 사이에 착정당한 존재도 있었다.
"책임을 질 거면 결혼을 하고, 국가에 책임을 이양할 거면 양육비를 세금으로 바쳐라."
"아무리 그래도 세금을...응? 이게 끝입니까?"
"물론. 더 올려주랴?"
"아, 아닙니다!"
첫번째 케이스의 남자들은 그래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했다. 인간이 아닌 경우라면 대부분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였으니, 제 2의 인생을 살아가는 기념으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게끔 만들었다.
만약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에는 양육비를 세금으로 물렸다. 너무 과하지도 않고, 남자가 어느정도 책임감을 느낄 수 있게 세금을 부과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라스토피아가 모든 걸 책임질 것이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버려진 존재였다. 그러므로 누구 하나 버릴 생각이 없었다.
"너희들의 탄생은 여신이 축복하고, 생활에 필요한 자원은 마왕이 보조하며, 보육과 교육은 라스푸틴이 책임질 것이다."
또한 난교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은 내 미약 테러와 광역 라스로 인한 업보인 만큼, 나도 분명한 책임이 있었다. 친부를 찾는 과정은 내게 지워지는 책임을 분산하기 위한 효율적이면서도 이기적인 행동인 셈이다.
그렇게 질싸한 남자가 '한 명'인 경우는 금방 해결되었다.
문제는 이제 2명 이상인 경우.
"이건 방법이 없네."
도저히 찾을 방법이 없었다. 정령들의 기억을 더듬어 용의자를 추리는 것 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들 중 누가 임신을 시켰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주인님, 안드라스랑 웨어울프가 질싸를 했어요. 태어나는 아이를 보면...."
"날개 달렸으면 안드라스가 범인이고 늑대꼬리 달고 태어나면 웨어울프가 범인이군."
태어나는 아이가 어떤 종족인지 본다면 소거법을 이용해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씁, 근데 모체를 따라서 태어나면 어쩌지?"
하지만 블러드 엘프의 배에서 블러드 엘프가 태어난다면 어떻게 방법을 알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이 확인 방법은 아이가 태어난 뒤를 가정해야만 살필 수 있었다.
"끄응...."
여러모로 난관에 봉착한 순간, 던전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주인님, 던전으로 와주십시오.]
"왜? 던전에 무슨 문제 생겼나?"
[아닙니다. 친자 검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을 가지고 오신 분이 있습니다.]
"누구...헉."
나는 샤이탄의 뒤에 선 두 명의 여인에 등허리에 식은 땀이 흘렀다. 한 명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중성의 미녀, 신수였다. 그리고 그녀의 옆, 똑같이 생긴 흑발의 여인을 보고 좆이 수그러들었다.
"...장모님들?"
[나보다 더 이쪽으로 잘 아는 녀석을 불렀다.]
[왕국 점령 축하해. 제법 재미있는 일을 한다고 해서 왔단다.]
흑발의 정장 미녀, 에스투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싸튀충 정의구현한다고 해서 왔는데, 어떻게 내가 갈까?]
"당장 던전으로 달려가겠습니다."
나는 전신의 문신에 불을 켜고 던전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