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87화 (683/800)

687회

351일차

사회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면 그에 따라 이득을 보는 자들도 있고, 피해를 보는 자들도 있다.

신분제 사회에서 라스로 대동단결한, 라스푸틴 아래에 모두가 평등한 자유를 맛본 라스토피아의 주민들은 한정된 자유에도 기뻐하며 행복해했다.

더이상 귀족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 뛰쳐나온 아이의 부모는 더이상 귀족이 일가를 그 자리에서 벨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도로교통법 위반 및 아동 관리 소홀로 체포합니다."

"...네?"

"지엄한 라스토피아의 법률에 복종하겠느냐, 아니면 이전처럼 이 자리에서 처형당하겠느냐?"

"체, 체포당하겠습니다!"

귀족의 눈치 대신 '법률'과 '규칙'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해야만 했다.

규칙을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는 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라스토피아의 국민들은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

"도대체 이 법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아아, 그것은 버지나니야 법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스토피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회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르고 남작령이라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진 법은 남작령의 전 주인이었던 여인의 이름을 본따 만들어졌다.

법은 모두가 지켜야하는 것.

하지만 유일하게 지키지 않아도 되는, 초법적인 존재가 하나 있었으니, 이름하야 라스푸틴.

"내 이름을 빼앗고자 하는 자, 누구든 도전하라."

라스푸틴은 라스푸틴이라는 이름을 걸고 도전자를 받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자리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누가 마검의 주인이며, 군단의 주인이며, 라스토피아의 주인에게 반기를 들겠는가?

애초에 조디악 왕국의 다음 대 국왕을 자처해도 이상할 게 없던 자가 스스로 법률이라는 구속구롤 차고 국민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체계가 잡히고, 사람들은 적응할수록 편안함을 느꼈다.

몰락한 귀족도 일반 양민도 전직 노예도 모두가 라스푸틴이 만든 법 앞에 평등했다. 귀족이라고 세금을 내지 않거나, 양민이라고 세금을 더 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귀족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져버렸으니, 변화한 사회에서 귀족들은 새로이 적응해야했다.

마법을 쓸 줄 아는 자는 마법사로서, 지식이 뛰어난 이들은 행정관으로서, 검술을 알고 전략 전술에 능한 이들은 장교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하나 둘 적응했다.

그리고 여기에 도태되는 자들이 바로 신분을 내세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던 '몰락귀족의 후예들'이었다.

"저희는 여러분들이 라스토피아에 적응하기 위한 도우미입니다."

"우선 확인해보겠습니다. 여기 해당하는 항목에 체크하여주십시오."

유아르나는 스스로를 '드라고니안 복지사'라고 말하는 남녀가 건넨 판을 받았다. 빳빳하고 하얀 종이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각종 질문이 적혀있었다.

"...이, 이걸 어떻게 다 만든 거예요?"

"질문에 답해주십시오. 저희도 모릅니다."

유아르나는 드라고니안 복지사들이 준 '설문지'라는 것에 주눅이 들었다. 자신이 섹스...라스에 빠져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가진 사이, 고작 몇 달 사이에 세상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귀하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아십니까?

아니오. 마법은 사용하지 못했다.

귀하가 받은 고등교육에 해당하는 내용을 체크하여 주십시오.

지식도 사교계의 지식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검술과 전략은 배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가문의 대소사를 관리하며 어느정도 배경지식이라도 갖춘 게 있다면 그걸 적겠지만, 유아르나는 그럴만한 위치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좋은 가문의 남자와 결혼해 후계를 낳고, 다음 대의 아이들은 크게 성공하여 가문의 위상이 높아지게만 하는 것이 주어진 역할이었다.

"......."

유아르나는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다 흘러나왔다.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도태되어가는 듯한 우울함이 그녀를 휘감았다.

"나는...아무거도 하지 못하는...."

"잘 낳게 생기셨는데요?"

"임신 잘하게 생기셨습니다."

"...뭐?"

이것은 칭찬인가, 모욕인가. 유아르나는 드라고니안 복지사들이 말한 것을 한참동안 곱씹으며 생각해야만 했다.

"그게...지금 할 소리인가?"

한동안 잊고있던 귀족스러운, 고압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유아르나는 스스로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더이상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굳이 따지자면 상대가 더 라스토피아에서 '높은 계급'의 존재였다.

드라고니안은 마왕군의 축복을, 던전의 축복을 받아 변모한 존재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블러드 엘프가 되어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를 낳게 된 자신과 비교했을 때, 상대는 귀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준남작이나 기사에 준하는 자들이었다.

변화한 시대에 빠르게 적응한 것으로 모자라 자리를 꿰차기까지한 자들.

유아르나는 드라고니안이 된 이들이 부러우면서 질투심이 났다. 과연 저들은 어떻게 드라고니안으로 될 수 있었을까.

"전 귀족이시군요. 음...항목에 가산점."

"글씨를 읽고 쓰는 것에 가산점."

"그거야 당연한 거...."

유아르나는 다른 여인들을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평민인 두 여인은 설문지와 힘겹게 씨름하고 있었고, 유아르나에게 반 말을 틱틱 내뱉던-노예 출신이 분명했던-여인은 아예 설문지를 탕탕 두드리며 시끄럽게 외치고 있었다.

"나 글 못 읽어! 어쩌라고! 읽어주든가!"

"거친 언행. 다른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폐를 끼침. 감점."

"태도 불량. 문맹. ...흐음, 이건 안 되겠네요."

두 드라고니안 복지사는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송하겠습니다."

드라고니안 버틀러가 손가락을 튕기자, 밖에서 구울 둘이 들어와 여인을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격렬히 저항하려던 여인은 드라고니안 메이드의 수면마법에 의해 순식간에 잠들었다.

"군단장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베푸시는 복지는 어디까지나 라스토피아를 위해 일하는 국민을 위한 것이지, 호의만 누리고 권리만 주장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무슨 말이에요?"

"글쎄요...."

유아르나는 유일하게 복지사들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점을 바로 파악해냈다.

문맹이 아니라는 것 만으로, 그녀에게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유아르나 님. 글을 읽고 쓸 줄 아십니까?"

"네."

유아르나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복지사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구울 두 마리를 데리고 그녀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여기는...?"

"이곳은 당신이 쓸 집입니다. 저희는 당신의 전담 복지사가 되어, 당신이 출산과 산후조리에필요한 모든 자원을 지원할 것입니다."

"이...곳이 집이라고요?"

남작가에 비교하면 작은 공간이었다. 집안일을 직접 하라는 것처럼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침실이 문과 문으로 나뉘어져 한 공간 안에 존재했다.

남작가에 비교하면 자신의 방보다 조금 넓은 공간이었다.

"예. 산후조리 1년까지는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뒤부터는 월세를 내야합니다."

"세금을...내라? 얼마요?"

"자세한 건 계약서를 참고해주십시오. 미리 말하자면 1달에 5실버입니다."

싸다. 싸다 못해 이래도 되나 싶은 저렴함이었다.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나면-"

"10년간 이곳에서 지내시면 소유권은 이전됩니다. 이 집은 당신의 것이 되겠지만...중간에 퇴거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드라고니안 복지사들은 계약서를 비롯하여 집을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능에 대해 소개하고 집을 떠났다. 유아르나는 현관문이라는 것을 닫아 걸어 잠근 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

남작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니 그보다 더 푹신한 침대에 금방 잠이 쏟아졌다.

남작가가 몰락한 뒤, 단 한 번도 '자신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그녀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안락함에 편안함을 느꼈다.

"......."

유아르나는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베개는 축축히 젖어있었고, 다시 일어난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계약서...사용 설명서...."

유아르나는 글귀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며 집 안의 구조를 파악해나갔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직접 실험해가며 집안의 기능들을 하나하나 파악해나갔다.

약 세 시간의 사투 끝에 그녀는 집안의 구조를 90% 가량 파악해냈다.

"혼자 살기에는...조금 넓네."

유아르나는 적적함에 우울해졌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배를 쓰다듬으며 의지를 다잡았다.

"죽기는...싫으니까."

삶에 대한 의지를 단단히 새기며, 그녀는 '냉장고'라는 마도구의 문을 열었다.

* * *

"흐흐흐, 어리석은 여자들."

나는 아파트에 하나 둘 자리잡는 여인들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너희들이 먹고 마신 모든 것들, 전부 라스토피아의 세금으로 상환해야 할 것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 아니 권리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무분별한 섹스로 인해 미혼모가 된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세금은 거둘 것이다.

모든 것은 라스토피아의 무한한 영광을 위하여.

"가정을 꾸려서 라스토피아에 봉사해라, 크흐흐."

나는 나무로 된 정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목재로 이루어진 집은 그 어느 곳보다 더 현대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한옥 스타일의 집이었다.

"장모님! 도움!"

"나는 왜 찾은 것이냐?"

마도 안마의자에 누워있던 여인은 다름아닌 신수, 유그드라실이었다. 그녀는 마력 진동 마사지기에서 빠져나와 내 방문 사유를 물었다.

"혹시 그런 거 만들 수 있습니까?"

나는 신수에게 내 현대적 지식을 정제하여 설파했다.

"호오. 불가능한 건 아니지. 재미있군. 그것의 이름은 뭐지?"

이 세계에서 오직 신수만이 가능한 작업.

"아아, 그것은 유전자 검사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이 세계에 친자확인의 시스템을 구축하여, 책임 없는 쾌락을 즐긴 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이다.

무상의 쾌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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