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4회
328일차구
조디악 왕국의 왕성, 오피큐스에 전운이 내려앉았다.
이미 분노의 군단이 점령한 와중에 전운이 내려앉을 일이 딱히 없기는 했지만, 라스토피아의 주민들은 철저하게 전투 무장한 오크와 엘프들을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최정예 오크, 10명.
최정예 엘프, 20명.
그리고 각종 아인종이 무려 20명.
고작 50명 뿐인 숫자였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일당백의 기세로 수 천에 이르는 위용을 과시했다.
이들이 던전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이 4~5개에 Lv가 최소 70인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을 것이다.
사실상 군단장을 제외한 라스토피아의 전력이 모여있었따.
특히 그들의 선두에 선 이는 찬란한 금발을 휘날리며, 은빛 갑옷에 황금빛 양털 장식을 두른 성검의 용사-아리에스였다.
"후우, 주인님께서는 왜 이걸 제게 맡기셔서."
아리에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긴장을 달랬다.
"왜요? 아리에스만큼 지휘가 뛰어난 사람이 없잖아요."
"던전 공략에 안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리에스는 차마 에일라로서 겪은 첫 패배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냐하면 그건 아니고, 혹시나 똑같은 패배를 반복할까봐 두려워진 것이다.
승리를 확신하며 기사단을 몰고 들어갔으나, 갑자기 빤스만 입고 나타난 웬 정체불명의 오크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 기사단이 전멸했다.
만약 오크가 인간박이가 아니었다면, 에일라는 1년도 전에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괜히 제가 지휘했다가 부정을 타는 게 아닐까요...?"
"후훗, 걱정마세요. 주인님께서 언제 던전 공략에 실패하신 적이 있으셨어요?"
엘프 여왕, 륜은 아리에스를 옆에서 격려하며 뒤를 가리켰다. 아리에스의 뒤로는 또다른 엘프 여왕 루나, 마녀 그레모리, 아더를 비롯한 던전 주인들, 그리고 분노의 군단에서 소위 '네임드'로 통하는 수많은 전사들이 있었다.
모인 이들의 레벨을 전부 다 합치면 족히 4000은 넘어가지 않을까.
아리에스는 이토록 강한 전사들을 지휘하는 입장이 된 것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군단의 지휘봉을 대신 붙잡은 2군 사령관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때. 특별한 말은 필요 없었다.
한 명 한 명 죽지 않고 살아돌아오는 것.
그리고 '본대'라고 할 수 있는 라스푸틴과 용마성 꼭대기, 소위 '보스룸'앞에서 조우하는 것.
그걸 위해 사실상 단 '다섯 명'을 제외하고 모든 네임드가 용마성 바르바토스 입구에 집결했다. 아리에스는 자신의 뱃속에 따스하게 남아있는 주인의 정기를 느끼며, 천천히 성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겨눴다.
"진입합니다."
던전을 공략한다는 건 똑같지만, 과거와는 다르다.
그 때는 철없는 여기사 에일라였다면, 지금은 성검의 여자 용사 아리에스다.
위이잉.
전이문을 넘어온 왕성의 안 뜰은 고요했다. 이미 라스푸틴이 숱한 골렘 괴물들을 갈아버리며 활짝 열어둔 전이문은 보초 하나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왕국을 멸망시키는 건, 오크에게 자지 타락한 여자 용사가 앞장서는 게 규칙이라고."
아리에스는 당당히 자신이 오크에게 성적으로 굴복했음을 밝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리에스가 내놓은 하복부에는 붉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성검의 용사로서 타락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음문이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신성력을 사용하며 당당히 용사로서의 자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갑시다. 옥좌를 쟁취하러. 주인님을 그곳에 앉히고,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님의 성검에 봉사하는 시간을 위하여--!!"
"""라스으으!"""
아리에스의 지휘하에 전사들이 앞으로 달렸다. 그들은 라스푸틴이 이미 정기톱으로 닦아놓은 길을 달려, 전이문을 넘어 왕국 내성까지 닿았다.
끼이이익.
내성의 성벽이 좌우로 열렸다. 이미 앞을 지키던 보초 골렘은 반으로 갈려 라스토피아의 광석으로 바뀌었다.
문이 열리자, 분노의 군단은 안을 가득 채운 검은 존재들에 기세를 끌어올렸다.
수시이이잇.
앞에는 2m에 이르는 검은 강철 병사들이 각양각색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 속이 비어있는 텅 빈 갑옷이었고, 투구의 머리는 와이번의 두상을 닮아있었다.
"리빙 아머...!"
"저것들, 전부 드라고니안이에요!"
"이곳에 모두 모아두고 있었나...!"
보이는 리빙 아머의 수만 기백.
[오너라, 침입자들이여.]
멀리서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왕국 꼭대기에 허상의 안개가 반짝이기 시작했고, 옥좌에 앉은 젊은 청년이 왕관을 쓴 채 오만하게 그들을 내려봤다.
[왕국의 진정한 힘 앞에 무릎을 꿇어라, 이 하등한 잡종들이여.]
쿵!
오피큐스 국왕이 지팡이-성검 오피큐스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리빙 아머 골렘들이 하나 둘 검은 안광을 번쩍이며 무기를 집어 들었다.
[유린하라.]
키샤아아아아앗----!!
[저 더러운 잡종들을 죽이고, 조디악 왕국의 영광을 다시 되찾는 것이다!!]
수 백에 이르는 리빙 아머 군대가 아리에스의 2사단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크들이 앞에서 방패를 세우고, 뒤에서 엘프들이 활을 들어 지시를 기다렸다.
번쩍!
아리에스가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여신의 힘이 담긴 신성력이 반짝였다. 몽글몽글하게 솟아난 신성력이 작은 구슬을 만들며 터진 순간.
"요격 개시--!"
쩌렁쩌렁한 아리에스의 호령과 함께, 조디악 왕국의 명운을 건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상대가 던전인 이상, 정공법은 두 가지.
던전의 물리적 입구를 찾아 정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시스템의 힘을 이용해 마법적 입구를 열어 급습하는 것.
바로 쟁탈전, 포털이다.
뷰릉, 뷰릉, 뷰릉.
"정기톱이 새로운 먹이를 찾고 있다. 어디있냐, 바르바토스!"
나는 쟁탈전을 걸자마자 포털을 넘어갔다.
쟁탈전에 걸리지 않게 안드로말리우스 던전을 내 던전에 쟁탈전을 걸었놓았고, 나는 안드말리우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나의 핏줄 오크에게 이름을 반납하도록 만들었다.
쟁탈전의 승리 조건 중 하나는 스스로 이름을 승자에게 바치는 것이다.
"군단장께서 내려주신 안드로말리우스의 이름을 당신께 다시 바칩니다."
<알림> 쟁탈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내게 당연히 이름을 반납했다. 나는 대신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너는 이제부터 깐프뷰르 지쥬인이다."
나는 조디악 왕국을 점령한 기념으로, 우리 라스토피아의 콜로세움을 관리할 오크 관리인을 선정했다.
"던전을 운영한 경험을 살려, 너는 라슬링장을 관리하거라. 이제 그곳이 너의 던전이니라."
바야흐로 콜로세움의 관리자 가문 '지쥬인 일가'의 탄생이다.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깐프뷰르는 영광스러운 임무에 충성을 맹세했다.
당연히 이에 따라, '아스타로트' 던전은 다시금 쟁탈전을 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일부러 쟁탈전을 걸기 쉽게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고, 처음부터 바르바토스의 던전에 쟁탈전을 걸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왕국의 성벽을 도모하지 못한다면, 바르바토스의 뒤를 쳐서 역으로 공격하려고 했다. 그게 지하왕성이라는 건 몰랐지만.
"쓰으읍, 하아."
나는 온통 짙은 검은색으로 물든 주변을 살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퀘퀘하고 꿉꿉한 냄새는 우리 던전에서 주로 나는 크림치즈 냄새가 아닌, 곰팡이와 먼지의 냄새다.
감옥.
나는 왕성의 지도를 꺼내, 이곳이 왕국에서 중죄인을 가두는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바르바토스 던전의 구조상 가는 길이 군데군데 전이문으로 막혀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이곳으로 올라가는 길 어딘가에 반드시 던전의 중심으로 향하는 '정답'이 있다.
포털은 언제나 적 던전의 소환진과 열려있는 곳의 끝에 열리니까. 나는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기 위해 전이문에 발을 디뎠다.
"이건 놀랍군."
설마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좌우로 펼쳐진 감옥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보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좆간이 마족보다 더 잔인한 법이라니까."
나는 사지가 마구잡이로 결손된 여자들을 보며 순간 소름이 돋았다. 레비즈는 양반이다 싶을 정도로 잘려나간 여자들은 인형처럼 몸을 떨며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인형?
"아 씨, 놀래라."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인형이었다. 어쩐지 여인의 살내음이 나지 않는다 싶었더니, 정교하게 만들어진 여인의 인형이었다.
"호문클루스? 그거랑은 좀 다른데."
[생체반응은 없습니다.]
원거리에서 인형들을 탐색한 샤이탄의 브리핑에 나는 정기톱의 스위치를 올렸다. 내 정기가 빠져나가기 무섭게 사자이빨톱날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바로 감옥의 쇠창살을 갈랐다.
치지지지징.
할레오까지 깃든 체인소드의 힘에 쇠창살은 힘없이 잘려나갔다. 나는 잔해를 옆으로 걷어찬 뒤 인형의 상태를 확인했다.
팔 다리가 없이 몸통과 머리만 달린 여자 인형은 내가 아는 누군가를 조금 닮아있었다. 나는 흡사 그녀를 모사한 듯한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설마...?"
[레비즈 안. 그녀와 똑같군요.]
"혹시 바르바토스, 레비즈가 그렇게 된 거 보고 빡쳐서 이런 인형을 만든 건가? 볼 때마다 나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겠다면서?"
[그건 아닌 듯 합니다. 인형...레비즈가 태어나기 전보다 훨씬 더 이전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만.]
샤이탄의 말대로 레비즈 인형은 제법 많이 낡아있었다. 원형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쌓여있는 먼지나 세월의 흐름은 숨길 수 없었다.
[다른 방을 살펴보시죠.]
"...다른 방도 마찬가지인데?"
다른 방에도 레비즈가 가득했다. 다만 그곳의 레비즈는 뭔가 조금씩 달랐다.
아무리 조각을 맞춰바도 98% 레비즈 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채워지지 않는 2%의 부족함에 미묘한 불편을 느꼈다.
감옥 안에 있는 수 백의 레비즈 인형들에게서 나는 두 가지 감각을 느꼈다.
하나는 이들을 바탕으로 레비즈가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곳에 있는 레비즈들은 전부 '버려진' 게 아닐까 하는 것.
"......."
나는 다음 전이문을 넘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나와 샤이탄이 생각만 하고 곧 폐기했던 사안이 실제로 펼쳐지고 있었다.
"우와, 미친 새끼들."
내가 넘어간 일자형 통로는 양옆으로 수많은 레비즈 인형이 사지 멀쩡한 채 형틀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축사의 가축처럼 알몸으로 묶여있었으나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크르륵, 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열심히 허리를 흔들던 리자드맨들이 레비즈 인형을 박고 있던 자지를 빼내고 무기를 집어들었다. 나는 레비즈 인형의 아래로 흘러내리는 액체에 불쾌감을 느꼈다.
"이 놈들, 설마 인형 상대로 알까기 중이었냐?"
[......!! 주인님, '정문'쪽에서 연락입니다!]
놀란 샤이탄의 급보에 나는 정기톱에 불을 붙였다.
[에일라 사단이 대규모 골렘 부대와 대치 중!!]
"...확실히 병사들 늘리려고 작정했구나, 작정을. 성에 물들지 않는 병사들을 만들어 나를 카운터 치려고. 참 독하다, 독해."
뷰릉, 뷰릉, 뷰릉.
나는 리자드맨들을 향해 정기톱을 겨눴다.
"근데 어쩌냐. 너희들 생산 기지 털렸는데?"
"국왕 폐하의 명이시다! 저 새끼 죽여----!!"
광기에 물든 리자드맨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렸다.
"레비즈 인형들, 내가 다 챙겨가주마---!!"
1던전 1레비즈.
남이 쓰던 거에 박기에는 찝찝하니, 레비즈가 낳은 드라고니안 알과 합성하면 되리.
"바르바토스야, 네 던전에서 아주 골수까지 뽑아먹어주마!!"
모든 레비즈 인형을 모아, 드라고니안을 셀 수 없을 만큼 뽑을 것이다.
10만 드라고니안 양병.
"그러니까 레비즈 인형들, 내가 다 가져가마!"
나는 할레오 체인소드를 힘차게 휘둘러, 리자드맨들을 반으로 갈라버렸다.